독립운동을 하러 남양에?

 

홍명희(1888-1968)1914년 말에서 1917년 말까지 3년간 남양(싱가포르 등)에서 지냈다. 이 시기 그의 모습은 많이 밝혀져 있지 않다. 훗날 회고 중에도 이 시기에 관해서는 단편적인 에피소드뿐, 무엇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며 지냈는지 정색하고 밝힌 내용이 별로 없다.

 

27세에서 30세까지, 누구의 인생에서나 매우 중요한 시기다. 홍명희에게는 특히 중요한 시기였다. 그는 1910년 초 4년간의 일본 유학을 중도에 접고 귀국했고, 몇 달 후 조선 망국에 이어 부친 홍범식(1871-1910)의 자결을 겪었다. 아버지는 유서에서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기엔 내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노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스스로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피치 못해 가는 길이니 내 아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하나 조선사람으로서의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잃어진 나라를 기어이 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

 

2년 후 탈상하자마자 중국으로 떠난 것은 복국(復國)의 길을 찾기 위해서였다. 말년에 자식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임꺽정>을 쓴 작가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다. 홍범식의 아들, 애국자이다. 일생 동안 애국자라는 그 명예를 잃을까 봐 그 명예에 티끌조차 묻을세라 마음을 쓰며 살아왔다

 

비장한 각오로 중국을 향했던 홍명희가 6년 후 귀국할 때까지 실제로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은 남양이었다. 독립운동의 본거지 상하이에 독립운동을 위해 찾아갔던 이 청년이 남양이라는 미지의 땅으로 넘어가 짧지 않은 시간을 보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홍명희에게 특별한 사람이던 신규식

 

홍명희의 남양 행은 신규식(1880-1922)의 권유에 따른 것이 분명하다. 신이 홍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는 신의 타계 소식을 들었을 때 잡지의 조사(弔詞) 청탁조차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일화가 보여준다. 1922101일자 <동명>에는 너무 애통해서 글도 못 짓겠다고 홍명희가 편집자 최남선에게 보낸 편지가 조사 대신 실렸다.

 

대한제국 무관이던 신규식은 합방 후 자결 시도에 실패하고 중국으로 가 동맹회에 가입하고 쑨원을 위시한 그곳 혁명지도자들과 교분을 맺었다. 임시정부가 중국국민당의 지원을 받을 길을 연 최대의 공로자였다.

 

신규식은 상하이에 온 홍명희를 아들처럼 대했다. 순국의 뜻을 함께했던 인물의 아들에게서 뛰어난 천품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청년을 새로운 방식의 독립운동으로 이끌고 싶은 마음에서 남양 행을 권했을 것이다.

 

자결 시도 때 한쪽 눈 시력을 잃고 애꾸란 뜻의 예관(睨觀)이란 아호를 쓴 신규식은 아호와 달리 시야가 넓은 사람이었다. 실력 양성이 외적 타도보다 독립운동의 더 중요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홍명희에게 남양 행을 권했다면 중국혁명을 지원한 화교사회와 같은 역할을 맡을 한교(韓僑)사회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홍명희는 남양에서 3년을 지내고 상하이에 돌아왔다가 곧 귀국했다. 남양 사업은 포기했으나 실력 양성의 길은 한결같이 지켰다. 귀국 후 가장 큰 노력을 기울인 사업이 신간회였고, 신간회가 좌절된 후 <임꺽정> 집필에 전념했다.

 

그의 1918년 귀국은 해외 무장항쟁보다 국내의 실력 양성 운동으로 방향을 잡은 결과였다. 귀국 후 신간회 등 조직사업에 주력하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좌절되자 소설 집필에 집중했다. <임꺽정> 집필은 주어진 여건에서 가능했던 최선의 독립운동이라고 그는 자임했다.

 

 

신규식의 남양

 

신규식이 남양을 바라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신규식이 생각한 남양은 당시 중국인들이 화교사회를 중심으로 생각하던 남양이었다. (“남양이란 말부터 중국에서 바라본 방향을 표시한 것이다.) 대부분 식민지 상태에 있던 동남아시아(이하 동남아”)에서 인구의 4-5%를 점하는 화교는 준 지배계급의 위치를 누리고 있었다. 많은 인력을 현지에 데려올 수 없던 유럽인 지배자들이 높은 문화-기술 수준을 갖고 원주민과 유리된 정체성을 가진 화교집단을 여러 방면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한 결과였다.

 

남양 화교 인구는 19세기 초의 1백만 명 선에서 19세기 말 1천만 명 선으로 늘어났다. 유럽인의 식민지배가 자리 잡던 기간이었다. 유럽인 지배 아래 화교는 상당한 혜택을 누리면서 현지 민중의 미움받이가 되기도 했다. 화교 박해 사태는 대개 식민지배 체제 아래 일어났다. 식민지배가 없을 때는 이주자들이 단순히 적응에 전념했으나 식민지배 아래서는 화교집단의 호가호위(狐假虎威)’ 경향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원래 남양 화교는 국가정체성이 약한 집단이었다. 중국인 정체성을 지키더라도 출신 지역과 가문에 대한 소속감을 통한 것이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별로 없었다. 19세기를 지나며 변화가 일어났다. 원주민과 유럽인 지배자들 사이에 끼인 입장에서 본국의 뒷받침을 아쉬워하게 된 것이다.

 

당시 중국인의 위기의식은 국가의 중흥을 바라보는 변법(變法)’과 국가체제의 교체를 바라보는 혁명두 갈래로 갈라졌다. 애초에 국가의식이 취약하던 화교사회는 혁명 쪽으로 치우쳤고, 본국의 조류가 무술변법(1898) 실패 후 혁명으로 기울자 혁명파의 지원 기지로 떠올랐다. 쑨원은 1903년 이후 아홉 차례나 남양을 방문하며 지원을 호소했고, 신규식이 가입한 동맹회는 그 지원의 통로 역할을 맡은 조직이었다.

 

 

왜 홍명희는 남양을 포기했나?

 

홍명희가 깊이 존경하던 신규식의 권유를 따르지 못하고 남양 사업을 포기한 이유는 무엇일까? 분명히 밝혀진 이유가 없으나, 신이 전해 듣던 남양 사정과 홍이 직접 겪으며 파악한 남양 사정 사이의 간격을 추측할 수 있다.

 

남양에 관한 신규식의 정보는 동맹회에서 얻은 것이었다. 혁명의 지원 기지로서 화교사회의 역할을 중시하는 동맹회의 관점에서 현지 원주민은 지배-교화의 대상인 미개한 존재였다. 동남아에서 화교는 식민지배자에 가까운 입장이었다.

 

화교사회와 비슷한 성격의 한교사회를 동남아에 건설할 수 있다면 독립운동을 위한 유력한 방략이 되었을 것이다. 실현 가능성도 어느 정도 생각할 만한 사업이었다. 독립운동가 중에는 재력가들도 있었고 무력을 양성할 인적 자원도 있었다. 원주민과 유럽인들을 상대하는 데도 조선인이 중국인보다 못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

 

그러나 현지에서 살아보면서는 신규식의 막연한 전망을 넘어서는 문제들을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원주민도 차츰 근대문명에 적응하며 민족주의를 일으킬 단계에 접근하고 있었다. 화교가 누려온 틈새가 그대로 한교에게까지 보장될 형편이 아니었다. 그리고 화교와의 이해관계 충돌도 동맹회의 도움만으로 완전히 회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홍명희가 남양 사업을 포기한 결정적 이유는 목표로 하는 한교사회설계의 구조적 어려움에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본국의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입장에서 현지 식민지배자들과의 관계에 어떻게 임할 것인가? 독립운동을 위한 자원을 현지에서 확보하면서 원주민에게 가해자가 되는 길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화교와 협력관계는 어느 선까지 가능할 것인가?

 

 

남양문명을 상상한다.

 

홍명희가 남양을 전전하던 때로부터 백여 년이 지나는 동안 그 지역 사정이 많이 연구되고 알려졌다. 대략 지금의 동남아다. 유엔 통계국에서 세계를 20개 남짓으로 나누는 통계 기준지역(geoscheme) 중 아시아 5개 지역의 하나다. (동아시아, 남아시아, 서아시아, 중앙아시아와 함께)

 

많은 연구성과가 쌓여 왔는데도 이 지역에 대한 일반적 시각은 백년 전에 비해 크게 바뀌지 않고 있다. 요컨대 외래문명(중국문명, 힌두문명, 이슬람문명, 유럽문명)의 정복(또는 감화) 대상으로 보는 타자화시각이다. 유럽인도 중국인도 이 지역에서 얻을 물질적 이득만 생각했지, 이 지역의 경험에서 자기성찰의 기회를 찾을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교섭 상대로부터 자기성찰의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상대와 나를 아우르는 우리의 입장을 세워야 한다. 상대를 타자아닌 우리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통상적 기준이 문명이다. 문명을 갖지 못한 미개인은 인간의 조건을 완전히 충족시키지 못하는 존재이므로 우선 감화(또는 정복)를 통해 문명인으로 만들어놓아야 우리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이제 시작하는 작업은 남양문명개념의 설정에 목표를 둔 것이다. 근년의 연구성과 중 이 개념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많은데, 아직 제대로 묶여 나오지 못하고 있다. 역사학 방면의 역할이 필요한 단계라 생각되어 시도에 나설 마음이 들었다.

 

남양(南洋)”이란 말을 앞세우는 데는 두 가지 까닭이 있다. 하나는 중국사 중심으로 공부해 온 사람으로서 남양과 중국 사이의 관계를 고찰의 주축으로 삼을 것이므로 중국의 남양인식에 출발점을 두려는 것이다.

 

또 하나 까닭은 남양문명의 배경으로 남양어족(Austronesian Language Family)에 주목하는 데 있다. 동남아를 중심으로 태평양과 인도양 일대에 널리 퍼져 있는 이 어족의 존재는 19세기 중에 유럽 언어학자들에 의해 확인되었다. 언어의 공유는 문명권 성립의 핵심 조건이다. 이 어족의 분포 상황 위에서 남양문명의 존재를 더듬어보려 한다.

 

(중국에서는 ‘Austronesia’를 직역한 남도南島란 말을 쓴다. 그러나 ‘-nesia’는 폴리네시아, 인도네시아 등 용례에서 만이 아니라 섬들을 둘러싼 바다까지 포괄하는 뜻이고 은 동양, 서양 등 용례에서 바다가 아니라 광대한 지역과 해역을 포괄하는 의미이므로 남양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남양사>란 가제의 새 작업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오랑캐의  역사>를 마무리한 후 "근대국가" 집필은 다음 작업의 방향을 찾는 모색 단계였고, 이제 방향을 정해 2-3년간 진행하려 합니다. 블로그 올리기도 좀 잦아질 듯.)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