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전통시대 중국인들은 유목을 문명과 대비되는 야만의 모습으로 여겼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 유목은 문명 발전의 한 측면이었다. 식물을 길들여 식량자원을 확보한 것이 농경이라면 같은 목적으로 동물을 길들인 것이 목축이었다. 다만 식물이 동물보다 먹이사슬의 아래쪽에 있어서 확보할 수 있는 분량이 더 많기 때문에 농경이 문명의 주축이 된 것이다.

 

목축이 유목의 형태로 크게 확장된 것은 농경사회의 성장을 배경으로 이뤄진 일이다. 영국 고고학자 앤드루 셰라트는 부산물혁명(Secondary Product Revolution)’을 이야기한다. 초기의 목축은 식량으로서 고기를 얻는 데만 목적이 있었는데, 기원전 3-4천년대에 털, 사역력, 운송력 등 부차적 용도가 개발됨으로써 목축의 대형화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기는 유목사회 내에서 소비되지만 다른 부산물들은 인근의 농경사회에 제공하고 곡식 등 여러 가지 물품과 교환할 수 있는 것이다.

 

목축의 대형화에 따라 유목의 형태가 발전하게 되었다. 가축 떼가 커짐에 따라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 초지가 황폐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 상태의 초식동물이 계절에 따라 옮겨 다니는 경로를 따라 움직이며 가축을 관리하는 방식이 개발된 것이다. 이동 방식은 여름에 높은 곳으로 갔다가 겨울에 낮은 곳으로 돌아오는 수직형과 여름에 북쪽으로 갔다가 겨울에 남쪽으로 돌아오는 수평형이 있다. 알프스와 안데스, 히말라야 산지에 아직도 남아있는 이동목축(transhumance)은 수직형 이동 방식이다. 동유럽에서 동북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초원지대에서는 수평형 이동 방식이 널리 행해졌다.

 

농경지대가 크게 자라나지 않은 문명 초기에는 유목지역과 농경지역이 뒤얽혀 있었다. 중국에서 춘추시대까지 중원(中原)’에 뒤섞여 있던 오랑캐가 아직 진행 중이던 농업화의 단계를 보여준다. 전국시대에 중원의 농업화가 완성되면서 북방에 장성(長城)의 축조가 시작되었다.

 

유목이 행해진 곳은 강우량이 농경에 부족한 초원지대였다. 춘추시대까지 중원 이곳저곳에 산재해 있던 오랑캐의 대부분은 농업기술의 발달에 따라 농경으로 전환해 화하(華夏)’에 흡수되었고 일부가 외곽의 산악지대와 초원지대로 옮겨가 유목사회를 이루었다. 유목사회는 농경사회에 비해 잉여생산이 작기 때문에 내부의 생산관계만으로는 계층과 직업의 분화가 활발하지 않고 대규모 정치조직을 키워낼 동력도 없었다. 생산 활동과 생활을 함께 하는 부족이 조직의 확실한 단위였고, 부족 간의 연합은 느슨한 형태에 그쳤다.

 

유목사회에 부족을 넘어서는 정치조직이 자라난 것은 농경사회와의 관계 때문이었다. 농경사회가 영토국가로 조직됨에 따라 물자의 교환에 불리한 조건을 강요받게 되자 그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대규모 조직의 동기와 수단을 갖게 된 것이다. 약탈도 물자 교환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기록에는 유목민의 농경사회 약탈이 많이 남아있지만, 농경민의 유목사회 침략과 약탈이 더 많았다. 기록이 농경사회의 특기였기 때문에 치우쳐 있는 것이다.

 

기원전 3세기 말에 일어난 흉노제국을 그림자 제국이라 한 것은 진-(秦漢) 제국의 통일에 대응해 일어난 현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유목민의 제국이 나타나자 셰라트가 간과했던 유목사회의 부산물 하나가 새로 생겨났다. 무력(武力)이다. 유목사회는 그 생활방식 때문에 강한 군사력을 양성할 수 있었다. 한나라가 흉노제국을 격파한 이래 당()나라 때까지 유목민 기마병은 중국의 모든 무력충돌 현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왕조를 공격하는 쪽에서든, 방어하는 쪽에서든.

 

당나라 때 돌궐과 위구르가 중국과의 관계에서 이득을 취한 밑천은 그 무력이었다. 무력 시장에서 유리한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경쟁자를 배제해야 했다. 그래서 다른 오랑캐의 흥기를 막는 데는 당나라의 부탁이 없거나 보상이 충분치 않아도 자발적으로 힘을 기울였다. 만주 방면의 거란과 여진이 9세기 중엽까지 세력을 키우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당나라보다 돌궐제국과 위구르제국의 압력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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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0년 전 강의실에서 중국사를 가르칠 때 가장 기본 도구는 개설서(통사)였다. 미국산으로 페어뱅크와 라이샤워의 <동양문화사>, 일본산으로 미야자키의 <중국사>, 그리고 중국(대만)산으로 부낙성의 <중국통사>가 번역본이 나와 있어서 활용할 수 있었다.

 

이번 작업을 위해 보다 근래에 나온 개설서를 보고 싶어서 페어뱅크와 골드먼의 <신중국사 China: A New History>(2006 증보판)를 구해 읽고 있다가 지금까지 본 개설서와 아주 다른, 그리고 내 작업에 적절한 참고가 되는 책을 만났다. 발레리 한센의 <열린 제국 The Open Empire: A History of China to 1800>이다. 2000년에 나온 초판은 1650년까지를 살핀 것인데 2015년의 증보판에 1800년까지를 다루는 한 개 장을 덧붙였다.

 

<열린 제국>의 첫 번째 목적은 왕조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전통시대 중국의 역사서술에서 왕조사인 정사(正史)’가 워낙 압도적인 중요성을 누렸기 때문에 현대의 연구자들도 왕조사의 틀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문헌자료 중에 정사의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이래 고고학과 인류학 등의 연구를 통해 획득한 비()문헌자료와 전통적 형태에서 벗어난 문헌자료가 이제 새로운 시야를 어렴풋이나마 열어줄 만큼 분량이 되었다. 한센이 이 새로운 자료를 활용해서 정치-남성-이념 위주의 왕조사를 넘어 사람들의 실제 생활 모습에 접근하려 애쓴 것은 중국사 연구의 오랜 편향성을 바로잡으려는 시도로서 높이 평가할 일이다. (이 책의 가치를 크게 보면서도 중국사 공부하는 이들에게 입문서로 권할 수 없는 것이 아쉽다. 상식을 뛰어넘는 관점을 세우는 데 너무 몰두해서 그런지 상식에 미달하는 오류가 너무 많다.)

 

그러나 이 노력은 아직 초보적 단계에 머물러 있다. 시대구분에서부터 한계가 드러난다. 1중국의 발명”(-1250~200), 2서쪽을 바라보며”(200~1000), 3북쪽을 바라보며”(1000~1800)3개 부로 구분해 놓았는데, 1부는 중화제국이 존재하지 않은 시기(제국이 아직 자리가 덜 잡힌 약간의 시기 포함)를 다룬 것이므로 그 이후와 크게 나눠지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제2부와 제3부 사이에는 구분의 의미가 별로 납득되지 않는다.

 

중국사의 전개에서 서쪽과 북쪽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동쪽은 바다에 막혀 있고 남쪽은 농업 확장, 즉 화하(華夏) 확장의 방면이었는데 서쪽과 북쪽은 모두 유목민의 활동 영역이었다. ()나라 때의 흉노 이래 몽골계, 돌궐계 등 여러 계통 유목민들이 중국 서북방의 초원지대에서 활동했고, 형편에 따라 북방에서 서방으로, 또는 서방에서 북방으로 옮겨 다닌 일도 많았다. 중국의 서쪽과 북쪽 변경은 모두 유목민의 세계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센이 서쪽과 북쪽 사이의 차이를 크게 보는 것은 초원지대의 바깥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북쪽의 초원지대 너머에는 동토지대뿐인 반면 서쪽으로 초원지대를 지나가면 페르시아문명과 인도문명이 있었다. ‘서쪽 시대에는 유목민의 세계 바깥에 있는 다른 문명권과의 관계가 중요했는데 북쪽 시대에는 유목민과의 관계에 묶이게 되었다는 것이 두 시대를 구분하는 취지일 것이다. 그래서 한센은 불교의 역할을 중시한다. 후한(後漢) 말 받아들인 불교가 송()나라 초까지 성행한 사실을 놓고 중국이 서방으로 열려있던 시기로 규정한 것이다.

 

중국에서 불교의 성행은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중국사를 크게 구분하는 근거로 삼는 데는 무리한 감이 있다. 인류 문명은 온대지역에서 발생하고 발전했다. 큰 문명권들은 동서(東西)로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었다. 유라시아대륙의 동쪽 끝에 있는 중국문명권에서 보자면 다른 주요 문명권은 모두 서쪽에 있었다. 다른 문명권과의 관계를 기준으로 중국사의 시대구분을 시도한다면 불교문명권, 이슬람문명권, 기독교문명권과의 관계가 기준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관계가 육로를 통해 주로 이뤄지는 시기와 해로를 통해 주로 이뤄지는 시기를 구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쪽과 북쪽 사이에는 그런 문명사적 의미의 차이가 없다. 중국이 서쪽을 바라봤다고 한센이 말하던 시기의 끝 무렵에 가서야 해상운송이 활발해지기 시작했고 그 전까지 서방과의 접촉에서는 육로의 비중이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육로, 즉 실크로드를 이용하는 조건에 계속해서 큰 작용을 한 것은 중국의 서방에서 북방에 걸쳐 활동하던 유목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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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조너선 스카프는 <Sui-Tang China and Its Turko-Mongol Neighbors: Culture, Power and Connections, 580-800(수당제국과 그 투르크-몽골 이웃들)>(2012)에서 중국 북방 지역의 기후와 생태 조건을 살펴 각 지역 인구의 한계를 추정한다. 깊은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강우량이 적은 것은 당연한 사실인데, 그에 덧붙여 위도와 고도를 고려하는 점이 특이하다. 몽골고원은 기온이 낮아 증발이 적기 때문에 강우량이 비슷한 다른 지역에 비해 초원의 식생이 풍성하다는 것이다. 몽골 지역의 초원 1 평방킬로미터에 50 두 가축을 키울 수 있는 반면 신장 지역에서는 서너 마리밖에 키울 수 없었다고 말한다. (25-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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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의 큰 세력이 서북방 신장 방면보다 북방 몽골 방면에서 많이 일어난 까닭을 설명해 주는 이야기다. 그런데 동북방은 어땠을까? 만주 방면에는 강우량이 꽤 큰 평지가 많다. 그러나 중세 이전의 기술 수준으로는 농업 발달이 어려운 조건이었다. 위-진-남북조의 혼란기에는 중국의 농업 발달이 남쪽으로만 향했다. 당나라 때까지 만주 지역에는 소규모 밭농사가 여러 형태의 산업과 뒤섞여 있었다.

 

이 지역에서 비교적 큰 농업사회를 이룬 것은 발해(渤海, 698-926)였다. 고구려의 농업기술을 이어받은 발해는 당나라의 군사력이 닿지 않는 만주 동부 지역에서 독립을 지키다가 713년 이후에는 당나라와 조공-책봉 관계를 맺고 만주 중부 지역까지 세력을 넓혔다. 당나라와 비슷한 시기에 발해가 멸망한 것을 보면 당나라와의 관계가 발해의 체제 유지를 위한 중요한 조건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순수 유목사회에 비해 농업을 포함하는 혼합사회는 생산력이 크면서도 군사력에서 뒤졌다. 유목사회에서는 모든 구성원이 잘 훈련된 기마병이기 때문이다. 만주 방면의 혼합사회는 남방의 농경사회와 서방의 유목사회 양쪽으로부터 군사적 압박을 받았기 때문에 큰 세력을 키울 수 없었다. 다만 두 방면 모두 제국이 와해되어 정치조직의 확대에 방해가 없을 때는 호-한 2중 체제의 이점을 활용할 수 있었다. 5호16국 시대 선비족의 활동이 그런 예다.


840년 위구르제국이 무너진 후 거란의 흥기 과정에서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872-926)의 지도력도 2중 체제를 통해 빚어진 것이었다. 거란은 원래 8부(部)로 갈라져 있었고 각 부의 수령도 3년 임기 선출직이 관례였다. 아보기의 일라(迭剌)부는 중국 방면을 공략, 농민과 농토를 확보함으로써 힘을 키운 결과 제부를 통합하여 요 왕조(907-1125)를 열 수 있었다. 


요나라의 2중 체제는 초기부터 남정(南廷)과 북정(北廷)을 함께 둔 데서 나타난다. 남정은 5대10국의 혼란기를 틈타 중국에서 탈취하는 농경지역을 운영하고 북정은 주변 유목민족을 상대하고 부족사회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경제력과 군사력을 분담한 셈이다. 


요나라의 제국체제가 안정 단계에 들어선 것은 제5대 경종(景宗, 969-982) 때였다. 그때까지는 황제가 시해되는 일이 거듭되고 황위 계승방법도 불확실했다. 경종 이후는 장자 계승이 다시 흔들리지 않았다. 5대10국의 혼란이 경종 무렵 송나라의 재통일로 수습되고 있던 상황에 영향을 받은 측면도 있었을 것 같다.


936년 석경당(石敬瑭)이 후당(後唐)을 멸하고 후진(後晋)을 세우는 과정에서 거란의 도움을 청하는 조건으로 연운16주(燕雲十六州)를 떼어준 결과 요나라가 장성(長城) 이남까지 영토를 확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요나라는 중원 진출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946년에 후진의 수도 개봉(開封)을 점령했으나 바로 퇴각한 것은 황제의 죽음 때문이기도 했지만, 정복의 의지가 강하지 않았음을 또한 보여준다.


‘서희(徐熙)의 담판’(993)도 요나라가 영토의 야욕이 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침략군이라면 으레 영토를 뺏으러 오는 줄 알고 당시 고려에서 당황했던 모양인데, 담판을 통해 오히려 강동6주(江東六州)를 확보한 서희가 영웅이 되었던 것이다. 서희의 업적은 용맹한 기세로 거란 장수를 겁줘서가 아니라 요나라가 원하는 고려의 역할을 정확하게 읽어내고 그에 부응함으로써 얻은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당시 강동6주는 발해 멸망 후 여진인이 주로 거주하던 지역임에 비추어 볼 때, 요나라가 바란 것은 여진의 견제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스카프는 <수당 제국과 그 투르크-몽골 이웃들>에서 전통시대 중국사 서술의 ‘계층 편향성’을 지적한다. 기록과 편찬의 담당자들이 모두 중앙의 문사 계층이었기 때문에 변경 지역의 실정에 어둡고 경직된 관념에 얽매이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52-53쪽) 20세기 이래 고고학 연구의 확장과 발전에 의해 이 편향성이 조금씩 보정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래도 50년 전 중국사 공부를 시작할 때에 비해 시야가 많이 밝아졌음을 생각하며, 우리 세대까지 얻어놓은 그림을 남기는 일에 보람을 느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