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2월에서 4월까지 일기를 담은 제3권에서도 이북보다 이남에서 일어난 일에 관한 설명이 압도적으로 많다. 앞으로도 이 불균형을 크게 벗어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굳어진다. 입수할 수 있는 자료와 연구가 남쪽에 치우쳐 있다는 점은 애초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고, 그 문제를 최대한 극복해서 남북 간의 균형을 맞춰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작업에 들어가 보니 자료와 연구의 분량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북의 변화에는 이남에 비해 변수가 적었고, 따라서 변화의 구조가 간단했다. 소련군의 역할은 이남의 미군처럼 적극적인 것이 아니었고, 또 일관성이 있는 편이었다. 이북에서 조선인 지도자와 집단들이 지도체제를 형성해 가는 과정이 이남에 비해 순조로웠던 가장 큰 이유는 점령군의 개입이 적었던 것이다.
이남에서 정치적 분열과 대립이 격심했던 것은 미군의 작용에 기인한 바가 크다. 미군은 직접 통치에 나서서 권력을 적극적으로 행사했고, 남용한 일도 많았다. 특정 정치세력을 옹호하면서 또 다른 특정 정치세력을 탄압했다. 이남에서는 민의의 작용은커녕 그 표출조차 어렵게 되고, 여러 정치세력의 상호작용은 민의와 유리된 채 자금력과 조직력 등 다양한 요소에 좌우되며 복잡하게 펼쳐졌다.
남북 간의 정치풍토 차이는 일본 항복 후 반년이 지난 시점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북에는 공산당이 주도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임시인위)가 수립되었고, 이남에서는 좌익 중심의 통일전선인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과 우익 집결체인 남조선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이 만들어졌다.
소련군은 진주 이래 지방 행정과 치안을 자치적인 인민위원회에 최대한 맡겼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인민위원회의 전국적 조직화를 유도했다. 북조선을 포괄하는 정치조직을 지향한 것이다.
한편으로 소련군은 공산당 중심의 제 정당 연합체제를 후원했다. 이 연합체제에 조선민주당(조민당)이 반발했지만 안팎의 공작을 통해 정리되었고, 독립동맹-신민당과 천도교청우당이 참여함으로써 안정된 정치체제를 빚어냈다. 그래서 임시인위 수립이 중앙에서도 지방에서도 안정된 기반 위에서 이뤄졌고, 토지개혁 같은 거대한 사업에 바로 착수할 수 있었다.
이남의 미군정은 이와 달리 조선인의 자치 노력을 배제하고 일본의 식민통치체제를 복원했다. 미군 진주 전에 결성된 지방 인민위원회는 파괴되었고, 인민위원회 중앙기구를 표방한 인민공화국(인공)은 무시와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미군 장교들은 일본인의 통치 역할을 물려받을 역량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을 돕는 조선인 집단의 호가호위(狐假虎威)가 극성을 떨게 되었다.
군정청 관리를 비롯해서 미군정에 협조한 조선인 집단은 기능적 기준에 따라 선발되었다. 일본의 통치에 협조하던 사람들이 있었고 일제시대의 특권층으로서 미국 유학 등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다. 미군정 간부들에게 향응과 뇌물을 제공할 수 있는 재산가들이 있었고, 같은 신앙인으로서 신뢰받을 수 있었던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이같이 기능적 기준으로 선발된 미군정 협조 집단은 이북에서 자치적 행정과 치안을 맡은 사람들처럼 민의를 수렴하거나 대변하는 정치적 역할을 맡을 수 없었다. 오히려 식민지체제 청산의 시대적 과제에 역행하는 성향의 집단이었다. 미군정의 성격이 식민지체제에 가까운 것이었으므로 식민지체제에 적합한 사람들이 협조 집단을 형성한 것이다.
한편 미군정 지도부는 반공-반소의 성향을 보였다. 미국 사회에는 1919-20년 ‘반공 소동(Red Scare)’의 전통이 살아있었다. 소련 승인도 제일 뒤까지 늦춘 자본주의국가가 미국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으로 함께 싸웠지만 미국인 중에는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해 경계심을 품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반공-반소 성향이 제일 쉽게 나타날 수 있는 곳이 군부였다. 군부에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뚜렷하게 하기 위해 ‘가상적(假想敵)’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반공주의자로 명성을 떨친 맥아더를 보더라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에 대한 투철한 이해보다는 전쟁과 전투를 그저 좋아하는 ‘군인정신’이 더 두드러져 보인다. 조선 점령 미군은 맥아더 휘하에 있었으므로 그의 반공주의에 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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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조선의 민심은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토지 소유의 과도한 집중 등 일본 제국주의통치의 폐단을 극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길이 사회주의 정책노선이었기 때문이다. 일제 말기 항일운동에 좌익이 앞장선 전통도 그런 분위기에 보탬이 되었다. 일제하의 감옥살이가 해방 후 지도자의 자격으로 인식되었는데, 감옥살이 경력에서 좌익이 압도적이었다.
일제 통치자들은 ‘좌익’을 매우 넓은 범위로 파악했다. 자기네 통치에 반대하는 자들은 웬만하면 다 좌익으로 취급했다. 민족주의 저항을 아예 개념부터 부정했기 때문이다. 경찰 등 미군정 협조 집단은 이 전통을 이어받았다. 자기네처럼 미군정에 협조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좌익으로 몰았고, 현지 실정을 모르는 미국 군인들은 여기에 넘어가 조선인 민족주의자에게 경계심을 품었다. 내 편 아니면 무조건 빨갱이로 모는 풍조는 이승만이 하지 사령관을 ‘용공주의자’로 비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당시의 좌익 중에 계급혁명을 확고한 목적으로 가진 공산주의자는 극소수였다. 대다수는 양심적 지식인으로서 “보다 공정한 사회”를 원하는, 굳이 선택한다면 사회민주주의 정도를 택할 사람들이었다. 독립건국의 긴박한 과제 앞에서는 스스로 원하는 공정한 사회의 기준을 어느 정도 양보하고 타협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공산주의자 중에도 계급혁명을 건국 후까지 기다려서 추구해도 된다는 온건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북에서는 이 ‘범 좌익’이 모두 인민위원회 체제를 지지하고 참여했다. 친일파와 지주층만이 배제되었고, 지주층에서도 개별적 지지와 참여가 많았다. 광범한 지지와 참여 덕분에 임시인위 출범 직후 토지개혁 사업 추진이 가능했다. 김일성을 정점으로 한 권력구조가 굳어지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지금까지는 이북 정치-행정조직의 순조로운 발전이 대다수 인민을 만족시켜주고 있었다.
반면 이남에서 “보다 공정한 사회”를 위해 인민위원회 활동에 나선 사람들은 미군정에게 제지받고 탄압당했다. 중도적이고 온건한 사람들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고, 확실한 공산주의자들만이 미군정에 저항하는 길을 찾았다. 미군과 미군정의 불합리하고 난폭한 태도에 반발하는 민심의 구심점을 공산당이 제공했다.
1945년 연말에 시작된 반탁운동을 통해 좌-우익 경계선이 새로 만들어졌다. 미군정에 의지하는 한민당-이승만 세력과 상해-중경 임정을 지지하는 민족주의 세력이 합쳐져 반탁세력을 만들었고. 이것이 우익의 울타리가 되었다. 반탁운동을 통해 우익 통합이 강화되면서 우익끼리만 비상국민회의로 뭉쳤다. 비상국민회의의 최고정무위원회가 미군정 자문기관인 민주의원 간판을 걸면서 미군정과 우익의 결탁이 한 차례 매듭지어졌다.
민족통일전선을 포기한 우익끼리의 결집에 대한 반발로 중도적 인물과 단체들이 대거 민전에 참여했다. 민전은 좌익의 주동으로 결성되었지만 통일전선을 표방하고 문호를 개방했기 때문에 참여 범위가 넓었다. 심지어 비상국민회의를 떠난 임정 비주류 요인 몇몇도 민전에 참여했는데, 그중에는 넓은 의미의 ‘좌익’으로도 볼 수 없는 인물들이 있었다.
민주의원은 미군정의 획책으로 만들어진 기구였다. 애초에 미군정이 바란 것은 우익이 중심을 잡되 좌익도 포괄하는, 통일전선의 성격을 가진 기구로서 미소공위에서 남조선을 대표하게 하는 것이었다. 좌익의 정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현실적인 목표를 세운 것이었다. 이 실수를 이승만이 이용해서 극우세력의 아성으로 민주의원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민주의원을 만드는 데 군정청에서 앞장선 사람이 하지의 고문으로 들어와 있던 이승만의 측근 굿펠로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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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3월 20일 개막한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는 연합국의 조선 독립 약속을 이행하기 위한 실무기구였다. 1943년 11월 미-영-중 3국 정상의 카이로선언에 조선 독립 방침이 나왔고 소련도 후에 이를 추인했다. 그러나 그 후의 연합국 정상회담에서 더 이상 구체적인 방침은 나오지 않고 있다가 일본 항복 때 미-소 두 나라 군대가 조선에 진주했고, 몇 달 후 모스크바에서 열린 연합국(미-영-소) 외상회담에서 두 점령군으로 구성하는 미소공위가 조선의 건국 준비를 맡게 한 것이었다.
연합국은 조선 인민을 위해 조선 독립 방침을 내놓은 것이 아니었다. 조선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제국의 일부로 외부에서는 인식되고 있었다. 조선인의 항쟁이 연합국의 전쟁 수행에 큰 도움도 되지 못했다. 선량한 일본인이 비록 군국주의의 피해자라 하더라도 연합국에게 적국민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도 적국의 일부였다.
그럼에도 조선 독립 방침을 세운 것은 두 가지 목적을 위해서였다. 그 하나는 일본제국에 대한 조선인의 협력을 약화시키고 저항을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전략적 목적이었다. 또 하나는 일본제국의 재기를 막기 위해 제국을 해체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민족자결의 명분이 들어 있었다.
카이로에서 조선 독립 방침이 나온 것은 장개석 덕분이었다. 그 시점에서 다른 연합국들은 명분보다 전략에 급급한 형편이었고, 이 방침의 전략적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던 장개석이 이 방침을 제안했고, 일본 관계 전략에서는 중국의 제안을 다른 연합국들이 존중한 것이다. 카이로 선언 확보에는 임시정부의 공로가 있었다.
중국이 제기한 조선의 전략적 가치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빛을 보지 못했다. 일본 항복 시점에서 중국의 발언권은 축소되어 있었고, 다른 연합국들은 조선 독립에서 일본제국의 분할이란 의미밖에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던 것은 미-소 양대 강국의 세력권 획정이었고, 조선은 두 세력권의 경계선이 되었다.
점령이 곧 세력권 확보였다. 전쟁으로 약화된 서유럽 열강은 전쟁 전의 세력권 회복조차 힘겨웠고, 미국과 소련의 경쟁 양상이 되었다. 조선의 분단 점령에는 남북이 각각 미국과 소련의 세력권에 들어가는 의미가 있었다. 조선 독립을 일본제국 해체의 일환으로 보는 연합국 관점에서는 조선을 다시 둘로 쪼개는 것이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분단 점령을 해놓는다 해서 꼭 분단 건국을 해야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분단 건국은 민족자결의 명분에도 어긋날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미-소 양쪽에 다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미-소 관계 전개에 따라 어느 한 쪽이 물러서든가 양쪽이 함께 물러날 가능성은 열려 있었다. 38선은 일본 항복을 받을 준비가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취한 임시 조치였다.
그런데 일본 항복 4개월 후 열린 모스크바 외상회담 때까지도 이 임시 조치를 대치할 다른 대책이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을 독립시키되 그로 인해 미-소 어느 쪽도 불안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방책을 강구한 것이 신탁통치였다. 이 방책의 실행을 양쪽 점령군으로 구성하는 미소공위에 맡긴 것도 두 나라의 만족을 보장하기 위해서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연합국’은 1차적으로 미-영-소 세 나라였다. 미-소 두 강대국과 함께 영국이 낀 것은 전쟁을 처음부터 끝까지 치른 나라였기 때문이다. 중국과 프랑스는 세 나라의 도움으로 전쟁을 견뎌낸 나라였기 때문에 발언권이 약했다. 그래서 테헤란, 얄타, 포츠담 회담이 모두 3국 회담이었다. 카이로회담에 중국이 참가한 것은 테헤란회담을 앞두고 대 일본 전략만을 의논하는 회담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과 평화조약을 유지하고 있던 소련은 카이로회담에 참석하지 않았다.
조선 문제에 대해 영국은 힘도 약하고 거리도 멀고 관계도 적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관여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래서 조선은 미-소 두 나라 소관이 되었고, 두 나라는 그 처리를 맡을 미소공위를 만들었다. 두 나라 정부가 아닌 두 점령군으로 만든 기구였기 때문에 어느 수준 이상의 정치적 절충을 하기 힘든 한계를 가진 기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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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일본 지배로부터 ‘해방’되었지만 그 대신 두 나라 군대의 ‘점령’을 받았다. 조선인을 위한 점령이라고 두 나라는 겉으로 주장했지만, 세력권 확보의 속뜻을 굳이 감추려고 하지도 않았다. 어느 쪽도 조선을 당장 통째로 집어삼킬 엄두는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절충안은 두 가지였다.
한 가지 방안은 각자 자기 점령 지역을 자기 세력권으로 굳히는 ‘분단 건국’이었다. 두 나라 사이만의 흥정이라면 가장 손쉬운 방안이었다. 그러나 조선 민족주의의 반발과 국제 여론의 비판을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
그래서 다른 방안, 즉 조선을 하나의 국가로 독립시키되 어느 한 쪽이 압도적인 이득을 보지 않고 서로 견제할 수 있는 방안이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채택되었다. 신탁통치가 상호 견제의 핵심 장치였다.
그런데 ‘신탁통치-통일건국’ 방안이 외견상으로는 두 나라에 공평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미국 쪽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쪽으로 생각할 여지가 있었다. 조선 항일투쟁에서 좌익의 역할이 컸고 조선인 대다수가 토지개혁과 산업국유화 등 사회주의 정책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위치 때문에 조선의 경제관계가 미국보다는 소련 쪽으로 치우칠 개연성이 있었다. 그래서 조선을 중립적 위치에 두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소련 쪽으로 기울어지기 쉽다고 미국 입장에서는 생각할 수 있었다.
그래서 조선 관계 모스크바 결정을 불만스럽게 여기는 세력이 미국 쪽에 나타나게 된다. 특히 군부에서 이런 경향이 강했던 것은 대전 후 급격한 병력 감축에도 이유가 있었다. 국제적 긴장과 갈등을 늘리고 싶어 하는 경향이었다. 게다가 조선 주둔 미군은 ‘전쟁광’ 맥아더의 지휘 아래 있었다. 미소공위 초기 단계에서 미군 측이 회담 성공에 연연하지 않은 태도는 이런 경향이 작용한 결과였다.
조선 민족주의자로서 이 두 가지 길 중에 택하라면 당연히 ‘신탁통치-통일건국’을 택했을 것이다. 그런데 남북의 가장 저명한 민족주의자 김구와 조만식은 신탁통치 반대를 이유로 모스크바 결정과 미소공위를 거부하는 태도를 취했다. ‘신탁통치 없는 통일건국’이라는, 미-소 어느 나라도 제시하지 않은 길을 고집한 것이다.
반탁세력은 민족주의 기준으로 볼 때 두 가지 서로 다른 태도가 뒤섞여 나타난 것이었다. 한쪽에는 ‘이상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해방을 항일투쟁의 결실로 이해했다. 그리고 연합국이 조선인을 위해 조선을 점령한다는 명분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더 이상의 속박을 거부한다는 뜻에서 신탁통치를 반대했다.
또 한쪽에는 ‘현실주의적 반민족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조선 해방이 연합국 승리의 부산물임을 이해했다. 그리고 식민지시대의 기득권을 지키고 키울 수 있는 길이 미국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데 있음을 알아챘다. 그래서 다른 연합국의 견제 없는 미국의 지배를 확립하기 위해 신탁통치를 반대했다.
해방을 연합국 승리의 부산물로 이해하면서 통일건국을 지향하는 ‘현실주의적 민족주의자’는 없었을까? 없었을 리가 없다. 모스크바 결정에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더라도 일단 현실로 받아들이고, 민족통일전선 결성을 통해 그 한도 내에서라도 최선의 결과를 지향하고자 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점령군의 지원을 받지 못했고, 1946년 4월까지 목소리를 낼 공간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5월 들어 미소공위가 무기정회에 들어간 뒤에야 그들의 좌우합작 노력이 해방정국의 표면에 떠오르게 된다.
이북에서는 1946년 3월의 토지개혁 실시를 계기로 조선인 자치정권인 임시인위가 민심을 수렴하며 순조로운 발전을 시작했으나 이남에서는 미군정이 조선총독부를 이어받아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조선인의 자치역량은 이북에서 더 빨리 성장했고 그럴수록 미군정은 더욱더 억압적 통치수단에 집착하게 되었다. 1946년 전반기를 통해 미군정의 가장 큰 사업은 식민지시대보다 두 배 규모의 국가경찰 육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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