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독맹 등 40여 단체, 법령 제55호 “정당에 관한 규칙” 반대 성명

군정청 법령 제55호 정당에 관한 규칙에 대하여 독립동맹, 무정부주의자총연맹, 중앙인민위원회, 인민당, 공산당, 기타 사회단체·문화단체·학술단체 등 40여개 단체는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25일 군정청 공보국장 뉴맨 대좌에게 질의한 바 있었는데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법령 운용 여하는 정치활동 일체를 거부하는 경우를 초래하게 되므로 민족통일을 분열시킬 위험성이 농후하게 내포되고 있다. 그 결과는 곧 조선임시민주주의정부 수립을 지연시키게 될 뿐 아니라 만일 그 법령이 그대로 실시된다면 연합국헌장을 근본적으로 무시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만일 그대로 실시된다면 우리의 정당한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서울신문> 1946년 02월 28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2월 20일 발포된 제55호 법령은 정당의 등록 등 “정당에 관한 규칙”이었다. 40여 개 단체의 목록은 나와 있지 않지만 대개 좌익 쪽인 것 같다. 허가제도 아니고 등록제인데 왜 이것을 “정당 활동 금지”처럼 엄중하게 보는 것일까? 이북에서는 전년 10월부터 정당등록제가 시행되고 있었는데, 왜 미군정의 정당등록제에만 문제 제기가 있었던 것일까?


법령 제 55호의 내용이 너무 까다로웠다. 등록에 관한 제1조 중 등록사항을 규정한 (다)항의 내용은 이랬다.


각 정당은 당수의 서명날인으로써 정확함을 증명한 좌기사항을 서류우편으로 제출할 事.

① 정당의 명칭 또는 칭호 及 기호.

② 당헌 또는 당의 목적을 표명하는 포고문. 공연히 또는 은밀히 당과 결합한 인원을 표시하는 기왕 발포한 각종서류 일부를 포함한 것.

③ 당내에서 보통당원 이상 다른 직무를 처리하거나 다른 권능과 세력을 행사하는 당원의 당내 지위 及 성명. 만약 정당이 1개소 이상에서 활동할 시에는 其 장소에서 행한 행동에 책임담당원의 성명과 其 지위, 정당이 지부 또는 소속단체를 통하여 활동할 시에는 其 장소 及 其 정당원의 성명 지위를 개별적으로 기입할 事.

④ 정당 또는 정당의 일부가 제반 회합재료의 준비사업 수행 及 기타 목적을 위하여 과거 60일간 실제로 사용한 제 사무소의 정확한 주소 及 장소의 기재, 정당이 우편물을 접수할 장소 또는 정당 본부로 등록할 장소도 기입할 事.

⑤ 정당의 조직 시일 及 정치적 활동 개시일.

⑥ 과거 60일간 자기 정당과 합동 또는 협력한 정당의 명칭 주소 及 정당기구의 명확한 기재.

⑦ 정당원 수, 지부가 有할 시에는 각지부의 당원 수, 정확한 수자를 알 수 없을 시에는 현재 활동하고 있는 인원의 개수, 정당에 대하여 현금을 거출한 자의 수와는 별도로 재정적으로 其 당의 활동을 원조한 자의 수와는 구별하여 보고하여야 함.


여기까지는 좀 엄격하다는 느낌은 들지만 상식에서 아주 벗어난 것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제2조의 “정당 관리 규정”이다.


제2조 정당 관리규정

(가) 정당사무소

각 정당은 공칭하는 당명을 보지할 事. 신 본부 사무소는 정확한 주소와 제반기재사항이 서류우편을 통하여 등록될 때까지 등록부에 기록한 본부를 이전치 못함.

각 정당은 각 지부 또는 합동된 정당의 사무소를 등록할 事.

각 정당 본부가 신주소의 등록 없이 본부 혹은 지부의 사무소를 이전하는 경우에는 공보국장은 該 정당의 해체를 명할 수 있음. 해체 명령 후에 행한 該 정당 간부 또는 당원의 정치활동은 본령에 위반됨. 단 해체 사무 또는 공보국장이 발포한 규칙에 의하여 정당의 등록을 갱신할 시에는 차한에 부재함.

본조 규정을 준수치 아니하고 공연히 또는 은밀히 정치활동을 하는 단체에 가담한 자는 본령에 위반함.

(나) 당 자금회계

각 정당은 전 자금과 재산에 대한 정확한 회계를 장부에 기입할 事. 此 회계부는 당 사무소에 완전히 보관하여 서명 날인한 此 검열담당 위임장을 소휴한 관리가 공보국 권한을 대행하여 검열할 때는 집무시간 중 何時든지 이용할 수 있게 할 事.

당은 재산과 수입 지출에 관한 정확한 보고서를 당년 각기 최후일 이전에 서류우편으로 소할 등록관서에 제출할 事.

此 보고서에는 당에 대하여 자금 또는 가치 있는 물자를 기부한 각인의 성명 주소(또는 기부의 타 출처)와 각 기부 금액을 기입할 事.

제반 수입의 실제 출처와 제반 지출의 최후수납자도 알 수 있으면 특기함이 可함.

(다) 부칙

공보국은 정당 관리 부칙을 발포할 수 있음.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정당활동을 해본 일이 없어서 이런 정도의 규정이 “정당에 관한 규칙”으로서 합당한 것인지 여부를 나는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대단히 엄격한 기준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런 엄격한 관리의 주체가 선거관리위원회처럼 안정된 헌법기관이라면 또 모르겠는데, 군정청 공보국이라면 곤란하다.


군정청이 미군 점령지역의 유일한 ‘정부’라고 자칭해 왔는데, 그 성격은 엄밀히 말해 ‘행정부’에 그치는 것이지, 주권을 담당한 ‘정부’일 수 없다. 1945년 9월 20일 포고문에 군정의 의미를 이렇게 규정했었다.


군정청이라는 것은 “인민의,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민주주의 정부를 건설하기까지의 과도 기간에 있어서 38도 이남의 한국 지역을 통치, 지도, 지배하는 연합군 총사령관 아래서 미군에 의하여 설립된
임시정부인 것이다. 군정청은 남한에 있어서 유일한 정부이며 군정청 본부의 도, 부, 군을 통하여 기설 각 기관을 운영하는 것이며 군정청 유일의 임무는 한국의 복리상 견실한 정부와 건전한 경제의 기초를 확립하는 데 있다. (송남헌, <해방 3년사 1> 100쪽에서 재인용)


군정청이 “유일한 정부”인 것은 다른 정부가 없기 때문일 뿐, 그 성격은 민주주의 정부, 즉 완전한 주권 정부를 건설할 때까지 그 “기초를 확립”하기 위한 “임시정부”라는 것이다. 이 임시정부를 연합군 총사령관 아래 미군이 세운 근거는 일반명령 제1호다. 일반명령 제1호에 규정된 미군의 임무는 총독부와 주둔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항복 접수 후 총독부와 주둔군의 기존 역할을 미군이 넘어선다는 것은 미군 자체의 기준으로도 용인될 수 없는 일이었다.


군정청이 주권정부를 자칭한 것이라면 미군의 점령이 곧 ‘침략’이라는 뜻이다. 군정청이 정당 관련 업무를 보지 않을 수 없다면 정당 운영을 도와주는 범위의 업무여야 했다. 규제 성격의 관리 업무는 삼가야 할 입장이었다.


더구나 미군이 한민당과 밀착해 좌익을 탄압하는 자세는 최근의 학병동맹 사건으로 명약관화하게 드러나 있었다. 2월 중순 군정청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미군정에 대한 한국인의 지지도가 매우 낮게 나타나 당국이 여론조사를 더 실시하지 말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355쪽) 이런 상황에서 군정청의 엄격한 정당 활동 감독 방침에 좌익이 반발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당의 난립과 무질서한 정당 활동의 문제점은 널리 지적되고 있었다. 코믹하다면 코믹한 장면 하나가 최근 연출되었다. 1월 19일 미 국무부 빈센트 극동국장이 한국 신탁통치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설명한 연설 중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조선의 통일된 임시정부를 설치하는 데는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많다. 그 이유는 현재 조선에는 90여개의 정치단체가 있는 까닭이다.”


사흘 후 비상국민회의 주비회에서 빈센트의 연설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위 대목에 대한 반응으로 이런 대목이 있었다.


“조선 내에 90여 개의 정당과 정파가 있어서 임시정부의 수립을 곤란케 한다고 하였으나 그것은 최근 조선의 사정과는 부합치 않는다. 조선의 군소정당은 56개의 대정당으로 통합이 되었고 기타의 단체는 대개 문화 내지 직업단이다.”


정치적 분열에 대한 불안감을 보여주는 이런 반응은 통일전선의 필요성에 대한 강박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1945년 12월 29일 서울신문 기자와의 대담에서 홍명희가 보인 대범한 태도는 당시로서 이례적인 것 같다.


(問) 일부 민중이나 또는 정파 중에는 탁치를 하게 된 원인이 국내분열에 있으며 또 국내분열을 일으킨 것을 일부 정당 내지 정치세력의 책동에 있다고 보는 편도 있는 듯한데?

(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국내분열을 일으킨 까닭으로 탁치를 실시했다면 우리보다 훨씬 심각한 국내분열과 항쟁이 있는 폴란드, 불란서, 이태리, 그리스 같은 국가는 왜 탁치를 실시하지 않는가. 또 우리의 국내분열이란 것은 결코 그다지 심각한 것은 아니다. 또 탁치의 이유가 국내의 분열 까닭이라고도 나는 생각지 않으나 만일 그것도 어느 정도 원인이 되었다면 그것은 극히 교묘한 구실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탁치의 원인이 우리 편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그것은 결국 우리가 싸워야 할 진정한 대상을 그르치고 더욱 민주의 귀추를 어지러이 하고 민족의 분열을 조장하는 것 밖에 안 된다. 그러므로 이때에는 어느 당 어느 파에 분열의 책임이 있다고 구명하고 규탄할 시기가 결코 아니라고 믿는다. 만일 기어이 책임의 소재를 명백히 해야 한다면 어느 당 어느 파라도 허심탄회하게 자기를 반성하여 책임을 진다면 다함께 똑같이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홍명희는 통일전선이 이뤄지지 않는 사실보다 통일전선의 필요성을 빌미로 다른 당파에게 책임을 물음으로써 대립을 심화시키는 추세를 걱정한 것이다. 2월 20일의 제55호 법령에 대한 그의 논평은 찾아보지 못했지만, 분열과 혼란에 대한 혐오감을 배경으로 미군정이 정당 활동 규제에 나선 것을 반가워하지 않았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제55호 법령의 문제점은 무엇보다 그 발포 시점에서 드러난다. 하지는 1945년 9월 11일 입국 후 첫 기자회견에서 “나는 통일된 의견과 방책을 듣고자 12일 오후 2시 반에 부민관에서 각계 각 조직체의 대표 2인씩을 만나 나의 일에 협조할 것을 희원하고자 한다.” 하였고, 그런 자리를 가졌다. 이것이 “정당이여, 오라!” 하는 뜻으로 받아들여져 정당의 난립을 초래했다. 그리고 이제까지 정당에 대한 규제는커녕 최소한의 관리도 하지 않고 있었다.


2월 20일의 제55호 법령 발포는 미소공위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미군정이 원하는 방법으로 이남 지역 민의를 대표할 통로로 민주의원을 만들어놓았다. 그러나 민주의원은 대표성이 극히 박약했고, 가장 두드러진 문제가 좌익 배제였다. 민주의원을 앞세워 미소공위에 임하려면 좌익의 항의와 반대가 불을 보듯 빤한 일이었다. 좌익의 조직적 활동을 억압하는 데 이 법령의 목적이 있었다는 것은 감출 수 없는 사실이었고, 이후 사태의 진행에서도 그 사실은 그대로 드러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