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외상회담의 한국 신탁통치 결정에 대한 국내의 반응을 살핌에 있어서 반응 내용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반응 시점이다. 정확한 결정 내용은 12월 28일 밤에 들어왔다. 그 전에는 <동아일보> 27일자 허위 기사가 민심에 큰 자극을 주었다. 정보의 입력 상태를 바탕으로 반응의 성격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신탁통치 결정에 관한 두 가지 ‘오해’가 반응 내용에 영향을 끼쳤다. 그 하나는 신탁통치를 ‘제2의 국치’로 보는 감정적 시각이었다. 애초 한국의 신탁통치를 미국의 필리핀 통치 수준으로 본 루스벨트의 입장은 이 시각에 맞는 것이다. 그러나 1945년 말의 상황에서는 그런 입장이 통할 수 없게 되어 있어서, 미국의 제안도 한국인의 입장을 존중하는 쪽으로 많이 조정되어 있었고, 그것이 다시 소련의 주장과 절충되어 더욱 완화된 것이 모스크바 회담의 결과였다. 이에 대한 원천적 부정과 총체적 거부는 비합리적인 독단이었다.


또 하나의 오해는 <동아일보> 허위 기사가 제기한 ‘소련 책임론’이었다. 이것은 반소-반공 분위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지어낸 아무 근거 없는 거짓말이었다. 이 기사가 나오기 전에 그 방향에 맞춘 논설이 나온 것은 이승만의 26일 방송뿐이었다. <동아일보>와 이승만 사이에 같은 거짓말을 위한 ‘입 맞추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 28일자에는 이 기사에 대한 여러 사람의 반응이 실려 있다.


◊ 趙[소앙] 임정 외무부장 談

조선 문제에 있어서 國際公管 신탁관리 탁치 운운은 지금 새삼스러운 문제가 아니라 해외에 있을 때에 누차 목도하여 싸워 온 문제다. (...) 전문컨대 桑港회담에서 식민지를 많이 소유한 영국이 자국의 불리를 염려하여 조선의 탁치를 발언하였을 때에 강렬히 조선 독립을 주장한 우방 소련에서 탁치를 주장하였다 하니 의아하는 바이며 意外之事다. 余는 약소민족 해방을 위하여 노력하여 온 소련을 위하여 이 보도가 虛報가 되고 풍설로 사라져서 前功의 可惜치 않기를 바란다.


◊ 趙琬九 재무부장 談

국제정세에 정확한 파악이 없고 한민족을 알지 못하는 일부의 착각이다. (...) 3천만 우리민족 전체 중 누가 신탁관리를 원하는 자 있으며 此에 누가 희생적 혈투를 아끼겠는가. 절대로 만부당한 말이다. 단연코 실현되지 못할 정의에 벗어난 일이며 간과치 못할 바라고 생각한다.


◊ 韓國民主黨 궐기

韓國民主黨에서는 27일 오후 3시 동당 회의실에서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하고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 소련이 조선의 신탁통치를 주장하였다는 설에 대하여 절대 배격한다는 左의 결의를 하였다.

“조선의 독립은 카이로선언과 포츠담선언에 의하여 국제적으로 약속된 바로 동아평화의 절대적 요건이 되는 것이다. 이제 모스크바의 3국 외상회의에서 엄연히 조선 신탁안이 제의되는 것은 국제신의를 무시하며 조선의 생명적 발전을 저해하며 동아의 평화를 파괴하는 것이다. 본당은 생명을 걸고 이 제안을 배격하는 동시에 독립관철에 매진하기를 결의함.”


◊ 人民黨 玄又玄 談

아직 확실한 보도가 없으니 무어라고 말할 수 없다. 정확한 정보가 있는대로 당으로서 태도를 결정하겠다. 그러나 소련으로서 그러한 주장을 하였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단호히 이에 반대하지 않으면 안된다.


◊ 國民黨 대소 결의:

목하 모스크바에서 개최중인 3상회의에서 조선 독립문제가 표면화하여 미소 간 의견 대립함을 전한다. 즉 미국은 카이로선언에 의하여 조선에 즉시 독립을 허여할 것과 국민투표로서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주장하는데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일국신탁통치를 주장하여 38도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 운운 카이로선언 이래 국제공약이 炳乎하여 변할 수 없는 바이어늘 소련의 신탁통치 주장은 불가해의 태도로서 국제신의에도 배치되는 바이다. 신탁통치의 기타 피예속의 형태로서 우리에게 임하는 데 대하여는 어떠한 국가임을 묻지 않고 우리는 3천만의 총력을 모아 최후까지 반대할 것이다.


◊ 共産黨 鄭泰植 談

아직 확실한 정보가 없으니 지금 발표할 수 없다. 정식 발표가 있은 후에 당으로서 태도를 표명하겠다.


◊ 白南雲 談

외상회의 종료 후에 정식으로 발표가 있기 전에는 아직 무어라도 판단하기 어렵다. 우리 조선민족이 자주독립국가로 되는 것을 바란다는 것은 중언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정식발표가 있은 후에 엄정한 비판과 강렬한 민족적 요구로서 당당히 자주독립을 주장해야 한다.


◊ 李克魯 談

신탁이란 말부터 나는 불유쾌하다. 어린애나 불구자나 정신이상자가 자기생활을 관리할 능력이 없으니 신탁관리를 한다는 말이다. 어떠한 나라를 물론하고 이러한 것을 주장하는 나라는 우리 3천만 민족이 유일한 적으로 취급하고 최후의 일인까지 혈투할 각오를 해야 한다.

<동아일보> 1945년 12월 28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당시의 신문기사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중 “자료대한민국사”에 일차적으로 의거해 검토하고 있다. 모든 기사가 실려 있지는 않지만, 주요 기사를 뽑아놓았기 때문에 신문 보도의 윤곽을 살펴보기에 편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12월 28일의 사건 보도를 훑어보면 이런 반탁운동 기사들이 보인다.


(1) 서울에 반탁삐라 붙고 산발적인 민중 반탁시위 시작

(2) 경북인민위원회와 독립촉진회, 탁치반대 결의

(3)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 등 42개 단체 대표자회의, 반탁 결의

(4) 조선독립촉성종교단체연합회, 탁치반대 성명

(5) 보성전문 학생회, 탁치반대를 결의

(6) 신한민족당 吳夏英, 탁치반대 결의를 표명.

(7) 조선혁명당, 탁치반대 결의

(8) 임정 구미위원부장 林炳稷, 신탁반대 성명서 발표

(9) 임정, 긴급국무회의 열고 반탁결의문 채택

(10)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가 설치


(1)의 삐라 공세는 조직과 자금을 가진 세력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세력이 누구인지 짐작이 가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겠다. (3), (4)는 ‘독립촉성’이란 말에서 바로 누군가를 떠올리게 되는데, (3)의 내용에서 맥락이 뚜렷하게 이어져 보이는 점을 12월 28일에 적은 바 있다. 반면 (2), (6), (7)은 산발적이고 자생적인 반응으로 보인다. 한편 (5)는 학생층의 움직임에서 김성수의 보성전문이 앞장선 점이 눈에 띈다. ‘반탁학련의 맹장’ 이철승이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8), (9), (10)은 임정 측 반응인데 (8)은 한 개인의 자연스러운 반응이고, 오후 4시 열린 국무회의에서 나온 (9)도 자연스러운 수동적 반응이다. 그런데 몇 시간 후 열린 ‘총동원위원회’ 모임에서는(10) 지방조직 설치를 비롯한 적극적 대응책이 쏟아져 나왔다. 반탁운동을 기획해 온 한민당과 이승만 측이 이 모임의 주도권을 쥔 것으로 보인다.


신탁통치안이 공식적으로 알려진 29일에는 신탁통치 관계 기사가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30개나 나타난다. 반탁운동 기획자들의 의지가 작용한 것으로 보이는 움직임도 몇 개 있지만, 대부분은 자연스러운 수동적 반응이고 그중에는 좌익 측 인사들의 반응도 있다. 공산당 대변인 정태식과 중앙인민위원회 한 인사의 반응, 그리고 박헌영의 당시 태도에 대한 소련영사관 직원의 회고를 소개한 바 있는데, 그밖에도 ‘범 좌익’의 범주로 볼 수 있는 백남운과 홍명희의 반응이 보도되어 있다.


30일 이후로는 관련기사 수가 절반 정도로 줄어들고 기획된 반탁운동의 보도 비중이 상대적으로 늘어났다. 좌익 측의 반응은 내용에서도 빈도에서도 신중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러다가 1월 1일 공산당이 공식 담화문을 비로소 내놓았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는 1일 오후 2시부터 기자단과 회견하고 탁치문제의 해결은 민족통일전선 결성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탁치안을 절대 배격할 투쟁방침을 선명하여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우리 당은 과거에도 그러했고 현재에도 자주독립을 위하여 싸우고 있다. 민족전체의 절대적 希願이고 카이로·포츠담선언에서도 약속한 바임에도 불구하고 신탁제가 나오게 됨에 이에 대하여 무계획적 흥분적 행동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조선을 싸고도는 현 국제정세를 가장 냉정하게 비판 인식하여 이 문제에 대응하여야 한다. 이 문제를 을사조약 운위하여 철시, 파업등 방법으로 민중을 선동 지도하는 것은 시민의 생명을 질식화하는 것이며 더욱이 근로대중의 생활을 파멸시키는 것이다. 다만 이 해결방법은 오직 민주주의적인 민족통일전선을 공고히 결성하는데서만 가능하다고 본다.”

<조선일보> 1946년 01월 01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수동적 반응이다. 우익 측이 몰고 가는 과격한 반탁운동에 의구심을 품으면서도 반탁의 명분에는 동의하는 것이다. 우익의 주도권에 대항할 뾰족한 대책은 없어도 해를 넘긴 시점에서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 없어서 마지못해 입을 뗀 형국이다. 그런데 공산당은 이 태도를 바로 다음날 뒤집어야 했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는 2일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의에 대한 동당의 태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모스크바삼상회담의 결정을 신중히 검토한 결과 이번 회담은 세계 민주주의발전에 있어서 또 한 걸음 진보이다. (...) 이번 결정의 책임을 의식적으로 3국에 돌리고 이것을 정면으로 반대 배격함에 열중하고 3국의 우호적 원조와 협력신탁은 흡사 제국주의적 위임통치제라고 왜곡하고 연합국을 적대방면으로 대중을 기만하는 정책을 쓰고자 하는 金九 일파의 소위 반신탁운동은 조선을 위하여 극히 위험천만한 결과를 나타낼 것은 필연이다. (...) 그러므로 우리의 할 일은 무엇보다도 먼저 통일의 실현에 있다. 민족의 통일 이것이 우리의 가장 급선무임을 깨닫고 하루 속히 민주주의 원칙(친일파 민족반역자 국수주의자를 제외한)을 내세우고 이것을 중심으로 조선민족통일전선을 완성함에 여력을 집중하여야 한다.”

<중앙일보> 1946년 01월 03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같은 날 인공 중앙인민위원회도 같은 취지의 결정서를 4개 연합국으로 보냈다. 하룻밤 사이 공산당의 돌변도 대중의 공감을 얻기 힘든 어이없는 일이었고, 인공은 이에 보조를 똑같이 맞춤으로써 공산당의 꼭두각시라는 인식이 굳어져 지지자들에게도 권위를 잃게 되었다. 공산당의 건준 장악으로 출범한 인공은 공산당의 경직된 장악 속에서 생명력이 약화되어 온 끝에 1월 2일을 고비로 그 실질적 역할이 사라져버렸다. 2월에 좌익 통합조직으로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이 결성되는 것은 인공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서였다.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에서는 2일 삼상회의에 대한 결정에 基하여 美·蘇·中·英 4개국에 다음과 같은 결정서의 전문을 보내었다.

◊ 삼상회담결정에 대한 중앙인민위원회의 결정서

모스크바삼상회담의 조선에 대한 결정을 토의하고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위원회는 아래와 같이 인정함.

1) 8월 15일을 계기로 한 조선해방은 우리의 힘이 아니고 세계민주주의연합국의 용감한 군대의 힘으로 된 것이며 조선을 자주독립국가로써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 위대한 역사적 단계였고

2) 삼상회담의 결정은 조선민족해방을 확보하는 진보적 결정일 뿐 아니라 민주주의정권 수립과 조선의 민주주의적 발달을 원조하여 조선의 완전독립을 발전적으로 완성하여 세계 문명국가의 지위에 나아가게 하는 것이며 8월 15일 해방으로부터의 위대한 일보전진이다.

3) 이 결정은 현하 국제정세일 뿐 아니라 조선 국내정세에 비추어 조선민족의 이익을 존중하는 가장 적절한 국제적 국내적 해결이며 세계의 평화유지와 인류의 민주주의화에 최적한 결정이라고 확신하여 본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결정한다.

(1) 모스크바 삼상회담의 진보적 결정을 전면적으로 지지하고 민주주의연합국과 같이 조선의 민주주의정부 결정의 실행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민주주의 제국의 원조와 협력에 의하여 우리 조국을 민주주의적 문명국가의 수준에 도달시키기 위하여 투쟁함을 약속함.

(2) 전 조선인민 及 각 민주주의정당과 사회단체는 모스크바회담 결정의 완전한 실천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투쟁하여야 하며 본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굳게 단결하여 조선인민공화국 깃발 아래에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함으로써 우리 조국을 위한 정치, 경제, 문화 등의 급속한 발전을 위하여 돌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각 인민위원회와 제 민주주의 정당 及 사회단체는 본 결정을 민족대중에게 이해 보급시키며 나라를 사랑하는 전인민은 본 결정을 깊이 인식하고 민주주의연합국의 호의와 원조에 반대하며 경거망동함으로써 민족통일전선을 분열하려고 책동하는 일파를 단호 배격하라.

1946년 1월 2일

朝鮮人民共和國 中央人民委員會

<조선일보> 1946년 01월 04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공산당의 입장 변화를 설명하려다가 미진한 채로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 내일로 미뤄야겠다. 다만 1월 4일에 있었던 눈에 띄는 일 두 가지를 표시만 해 둔다.


서울 시내 8개 경찰서장이 집단으로 사직했다.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고 12월 30일 한 정치인이 초청한 자리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경기도 경찰부장(미국인)이 사표를 요구한 것이다. 그리고 최경진을 경무국장 대리에 임명했다는 기사가 있다. 1월 1일에 조병옥이 경무국장에 임명되었었는데, 8개 서장과 마찬가지 이유로 해임된 것 같다. 조병옥은 이틀 후인 1월 6일에 복직되었고 8개 서장의 복직 기사는 보이지 않지만 모두 복직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김구가 통일정권 수립을 위한 3대 과제를 밝힌 성명을 발표했다. (1) 비상정치회의 설치, (2) 임정의 확대 강화, (3) 국민대표대회 소집을 제시한 것이다. 반탁운동 출발점에서 실질적 정부 역할을 맡을 총동원위원회를 야심적으로 기획했다가 미군정의 반발로 좌절된 후 보다 현실적인 노선을 모색한 것으로 보인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