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통일’보다 ‘평화’를 먼저 생각해야
‘통일’보다 ‘평화’를 앞세워 추구하자는 제안이 우선 반갑다. 세상 어떤 일이나 그렇듯 통일에도 어려운 면이 따르기 마련인데, 남북의 주민이 함께 통일을 원하는 상황이 되어야 그 어려운 면도 소화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며, 평화가 확보되면 그런 상황이 꼭 올 것을 확신한다고 한다.
뭐니 뭐니 해도 통일은, 우리 국민과 북한 주민 모두가 함께 통일을 원하는 시점에 이뤄지는 게 가장 바람직한 모습이지 않을까요. 북한이 개혁개방을 이루고 정상국가로 나아가는 과정을 거친 후 경제나 정치 등이 우리와 거의 비슷한 수준에 이르렀을 때 남과 북 서로가 통일을 열망하는 그날이 오리라 확신하고 있어요. 그때는 우리 국민과 북 주민들이 통일 비용에 대한 부담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할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 저의 관심사는 그런 통일의 여건을 얼마나, 어떻게 성숙시키느냐 하는 데 집중되어 있어요.(102쪽)
통일, 즉 민족의 정치적 장래에 대한 생각은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고 특히 세대에 따라 차이가 크다. 30년 전 문익환 선생은 민족 통일에 다른 어떤 가치보다 더 큰 가치가 있다고 외쳤다. 그분 세대에게는 자연스러운 정서였다. 그 아래의 우리 세대도 이에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더 젊은 세대에게는 납득이 잘 되지 않는 감상적 주장으로 들리기 쉽다.
분단 당시 청년이던 문 선생 세대에게 민족 분단은 마른하늘에 벼락과 같은, 있을 수 없는 괴변이었다.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청년이든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청년이든 민족 분단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통일을 위해서라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평화’보다 ‘통일’이 앞서는 사회 분위기였다. 그런 분위기를 배경으로 동족상잔의 전쟁까지 벌어졌다.
70년 전 분단은 민족사회의 뼈를 부러트리고 살을 찢어내는 무참한 폭력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직접 피해를 입었다. 심한 경우는 고향을 등지거나 가족을 잃고, 덜한 경우에도 아끼던 친지들과 생이별을 겪어야 했다. 참혹한 전쟁도 분단 과정의 일부분이었다. 그런데 무심한 세월이 70년이나 흐른 이제 상처는 대충 아물어져 있다. 이런저런 기형적인 문제들을 품고는 있지만 그런대로 안정된 상태에 이르러 있다. 분단 후에 태어난 세대는 분단 상태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져 있다.
70년 전 민족사회가 요구한 통일은 단순한 물리적 통일이었다. 일부 반역자들이 외세를 등에 업고 획책한 분단 상태를 깨트리기만 하면 오랜 세월 축적된 복원력으로 민족국가가 회복될 것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70년이 지난 지금 그런 물리적 통일은 그럭저럭 봉합되어 있는 상처를 도로 터뜨리는 또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다.
지금 상황에서 바라보는 민족문제 해결은 물리적 통일에 그치지 않는 화학적 결합, 나아가 생물학적 조화여야 한다. 분단의 나쁜 점보다 통일의 좋은 점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늘어나야 한다. 익숙해져 있는 기형적 문제들이 어떤 질곡으로 작용해 왔는지 깨달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생각과 깨달음을 가로막아 온 ‘대결’ 상태에서 우선 벗어날 필요가 있다. 1990년의 독일 통일이 아니라 그 이전 시기의 동-서독 관계가 지금의 우리에게 당면 모델이다. 통일은 정치적 통합이다. 경제적-문화적-사회적 통합을 제쳐놓고 정치적 통합에만 매달린다면 감당할 수 없이 많은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2. 미국의 주도권은 불변의 상수일까?
이 책의 큰 가치 하나는 그 국제적 시각에 있다. 한반도 평화와 나아가 민족문제 해결이 내부조건에만 걸려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외부조건에 맞춰 풀어나갈 과제라는 사실을 직시한 것이다.
(...) 최대 현안인 북한 핵문제의 본질을 분석하고 국제적 시각에서 접근하고자 이 책을 썼다. 즉 북핵문제를 미국이 주도하는 NPT체제와 국제 질서의 차원에서 이해함으로써, 관념적이고 감성적인 접근이 아닌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하려는 것, 그것이 이 책의 중요한 의도다. 한반도 핵문제를 야기한 남북 대결이 근본적으로 강대국 간의 냉전 구조에서 비롯된 것임을 기억한다면, 비핵화라는 역사적 과제는 분단에 관여하고 개입한 관련 당사자국들과 함께 풀 수밖에 없다. (9쪽)
70년 전의 세계에서는 한반도가 분단되든 말든 한반도 밖에서는 신경 쓰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지금은 다르다.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북핵 문제가 어떻게 해소될 것인가? 한반도 긴장 완화에 따른 한민족국가의 성격 변화가 세계 질서와 지역 질서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북한을 둘러싼 장벽이 사라질 때 산업과 교역의 판도가 어떻게 바뀔 것인가? 그에 따른 각국의 득실은 어떠할까? 등등... 세계인의 관심을 끌 많은 문제들이 한반도 평화에 걸려 있다. 한반도 평화를 더 많은 세계인이 좋아하도록, 그리고 싫어하는 사람들의 저항을 피해 가거나 이겨낼 수 있도록 방향을 잡는 것이 평화의 성취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저자의 국제정세 파악과 해석은 매우 뛰어나다. 다년간의 국제 활동과 언론사 경영을 통해 확보한 경험과 정보 수준부터 탁월하거니와, 그 경험과 정보를 독자들이 안심하고 공유할 수 있도록 현실주의 기준으로 정리해 낸 냉철함이 돋보인다.
그러나 나는 저자의 해석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의 현실주의 기준으로 파악된 ‘현실’ 중에는 ‘현상’에 불과한 것도 섞여 있는 것 같아서다. 무엇보다, 세계질서에서 미국의 주도적 위상을 불변의 상수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불만스럽다. 미국의 주도적 위상은 제1차 대전을 계기로 형성되기 시작해서 제2차 대전으로 완성된 것인데, 21세기에 들어와서는 쇠퇴의 조짐이 완연하다. “미국의 세기(American Century)”는 끝나 가고 있는 것 아닐까.
3. 한반도 평화를 미국이 원치 않는 이유
나는 2010~2013년간의 <해방일기>(10권, 너머북스, 2011-2015) 작업에서 한반도 분단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밝히는 데 힘썼다. 그 책임이 통상 공범으로 여겨지던 소련의 책임과도 차원이 다른 압도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냉전 이후>(서해문집, 2016) 작업에서는 1990년대 공산권 붕괴에 이은 북한의 개방 노력을 미국이 적극적으로 틀어막은 사실을 밝혀내고자 했다. 당시 미국은 ‘북핵’을 봉쇄의 빌미로 삼았지만, 현실적 의미가 아직 없던 경미한 부스럼을 열심히 긁어 온 세계의 걱정거리로 키워낸 것이 미국의 역할이었다.
70년 전에 한반도 분단을 초래한 미국이 20년 전에도 긴장 해소의 길을 가로막았다고 나는 본다. 미국은 왜 그런 나쁜 짓을 한 것일까? 미국이 특별히 나쁜 나라라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반도의 분단을 좋아하고 평화를 싫어하는 합리적으로 이해할 만한 이유가 미국에게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분단건국 당시를 돌아본다. 제2차 대전이 끝날 때 강대국 중 유일하게 파괴를 면한 미국은 막강한 경제력을 갖고 있었다. 십여 년 동안 미국의 산업생산은 전 세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원자폭탄이라는 비대칭 전력을 독점하고 있었다. 세계패권 추구에 유일한 잠재적 경쟁자인 소련의 영향력을 봉쇄하기 위해 트루먼독트린으로 냉전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당시 미국의 세계전략이었다.
공산권 봉쇄의 장벽 중 가장 큰 차질을 일으킨 것이 예상하지 못했던 중국 공산화였다. 그 틈새를 메우기 위해 한반도에 특별히 강고한 장벽을 미국이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일본 제국주의를 통해 자본주의를 맛본 한국인은 자본주의체제를 원하지 않았다. (1946년 8월 미 군정청이 시행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70%가 사회주의를, 14%가 자본주의를, 7%가 공산주의를 원한다고 응답했다.) 민심을 순조롭게 끌어들일 수 없는 곳에 교두보를 만들려니 무리한 술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가 분단건국이었다.
1990년대 상황은 어떠했는가? 당시 미국은 체제경쟁의 승리자처럼 보였지만 이제 돌아보면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한계점에 와 있었다. 소련과 동유럽공산권을 자본주의체제에 추가함으로써 한계를 겨우겨우 연장하고 있었지만 미국 자체의 경제적 동력이 바닥난 것은 월러스틴 등 세계체제론자들의 진단대로였다. 금융경제의 거품에 억지로 매달려 있다가 결국 2008년 바닥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1990년대 미국의 ‘세계경찰’ 주장은 경제력의 약점을 군사력의 강점으로 때우려는 술책이었다. ‘정의’와 ‘인권’으로 여론을 호도할 수 있는 한 분쟁을 더 많이 일으키고 더 크게 키움으로써 국제관계가 경제력보다 군사력에 더 많이 좌우되도록 일로매진했다. 무기 수출은 미국의 재정과 무역 적자를 억제하는 중요한 사업이 되었고 그를 위해서는 온 세계에 평화보다 긴장이 넘쳐나기 바라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 되었다.
다른 어느 곳보다 미국이 긴장 유지를 바라는 곳이 중동지역과 동북아시아다. 세계 석유의 중심지 중동지역과 세계경제 변화의 초점인 동북아시아의 긴장 유지가 미국 국익의 중요한 관건이다. 미국의 대 중동 정책이 그 지역의 긴장 고조를 위해 꾸준히 작용해 온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 국익의 이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북한에 대한 무리한 압박 정책도 마찬가지다. 1990년대 중엽에 북한 개방이 이뤄졌다면 북한 주민이 ‘고난의 행군’을 겪는 대신 이 지역 경제 발전에 공헌함으로써 미국의 경제적 위상을 상대적으로 더욱 위축시켰을 것이다.
미국 국익의 이 측면이 지금도 엄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 긴장 해소에 따른 경제적 이득은 미국보다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하는 이 지역 국가들에게 훨씬 더 클 것이다. 일본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도 크게 줄어들 것이다. 미국이 금년 들어 북한과 대화에 나선 것은 원해서가 아니라 부득이해서다. 지금도 미국의 ‘주류’ 정치세력은 트럼프 수준의 대화조차 못마땅해 하고 있지 않은가. 한반도 평화는 미국의 선의에 의지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견제에 불구하고 이뤄내야 하는 것이라고 나는 본다.
4. ‘북핵’, 북한이 만든 것인가, 미국이 만든 것인가?
무엇이 미국으로 하여금 원치 않는 대화에 나서게 했는가. 한 마디로 ‘북핵’이다. 마이클 셰리는 <In the Shadow of War>(1995)에서 전쟁을 한편으로 좋아하면서 동시에 극히 두려워하는 미국인의 일반적 특성이 오랫동안 본토에서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조건에서 나오는 것으로 설명한다. 제2차 대전 참전을 꺼리던 미국이 하루아침에 열렬한 참전 분위기로 바뀐 것은 일본의 진주만 공격 때문이었다. 2001년에는 9-11 테러가 미국의 국가 분위기를 어떻게 바꿔 놓는지 보았다. 미국인은 미국 땅이 절대적으로 안전한 요새이기를 바라고 그에 대해 불안을 느낄 때는 집단 히스테리 증세를 보인다.
미국 본토에 핵미사일이 날아올 위험이 대다수 미국인에게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상황은 미국 정치가들에게 상상하기도 끔찍한 일이다. 미국에 핵미사일을 쏘아 보낼 능력이 있는 나라들과의 관계를 안전하게 관리하는 것은 미국 정부의 첫 번째 임무다. 그런데 1년 전 상황을 되돌아보자. 64년 전에 끝난 전쟁의 마무리까지 거부하며 고압적으로 적대해 온 나라의 ICBM이 완성되었다! 미국 정부가 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해 고작 할 수 있는 일은 이 미사일의 재진입 기술이 아직 불완전할 것이라는 추측을 선전하는 것뿐이었다. 북한이 미국 본토 상공에 핵폭탄을 쏘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은 감출 길이 없었다. 로스앤젤레스를 노리고 쏴도 샌프란시스코밖에 맞출 수 없다고 흠을 잡는다 해서 안심이 되겠는가.
1990년대 북한 입장을 생각해 보자. 소련 해체와 공산권 붕괴로 경제가 총체적 난국에 빠졌다. 핵발전소 건설은 참혹한 ‘고난의 행군’을 완화하기 위해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당장의 에너지원 확보에 급급한 상황에서 핵무기 연료 추출은 북한이 집착할 과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핵무기 개발 포기의 대가로 경수로를 제공받는 제네바합의(1994)에 동의했다.
미국이 이 합의를 왜 파기했을까. “독재정권의 연명을 도와주는” 정책을 중단하면 독재정권이 경제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무너질 것을 기대했을 것으로 흔히 추측한다. 그러나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북한이 순조롭게 국제사회에 진입할 경우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군사적 역할을 보장하는 지렛대가 사라질 것을 미국의 ‘주류’ 세력이 싫어한 데 더 큰 원인이 있었을 것 같다.
당시의 ‘북핵’은 실체가 없는 그림자뿐이었다. 제네바합의 무렵부터 북한이 이미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으리라는 추측이 미국의 대북 강경파 사이에 떠돌았지만 실제 핵실험은 10여 년 후인 2006년에야 이뤄진다. 북한 지도부는 1990년대의 ‘북핵 위기’를 통해 핵무기의 가치를 절감했을 것이다. 그림자만 갖고도 이렇게 난리인데, 실체를 갖는다면 얼마나 위력이 크겠는가?
2006년 10월의 핵실험 이후에도 미국이 “전략적 인내”를 계속한 데는 동맹국 한국과 일본에 대한 ‘배신’의 의미가 있다. 북핵의 위협이 한국과 일본에만 미치고 미국까지 미치지 않는 상황에서 위험 해소의 노력을 외면한 것이다. 그 후 북한은 미사일 기술에 주력했고, 10여 년이 지나 미국 본토까지 위협하게 되었다.
핵무기와 같은 전략무기의 특성은 실제 사용이 아니라 사용 위협만으로도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데 있다. 북한이 미국에 대한 위협의 표현에 극히 조심스러운 것도 그 까닭이다. 북한의 명시적 위협 중 가장 강력한 것이 괌도의 동서남북에 미사일을 쏘아 무력 과시를 하겠다는 것이었는데, 그에 대한 미국의 반응이 얼마나 요란했는가. 위협 표현의 절제에서 북한의 대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ICBM의 존재 자체가 미국을 대화의 장으로 데려올 것을 기다릴 뿐, 필요 이상 상대방을 격앙시키지 않겠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5. 트럼프의 등 뒤를 바라봐야 한다.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의 실마리는 금년 들어 남-북, 북-미 정상회담을 중심으로 풀려 왔다. 이 회담의 당사자인 문재인-김정은-트럼프 세 정상의 개성이 대화 전개에 적합한 점을 들어 기대감을 품는 이들이 많다. 저자도 서문에서 세 사람의 “황금 조합” 등장을 절묘한 것이라 했다. 과연 이들의 역할에 한반도 평화를 위해 바람직한 면이 많고 이들의 동반 등장에 행운이 작용한 것일까?
김정은에 관해서는 아직도 정보가 많지 않다. 인상적인 점 하나는 지난 판문점회담 때 유시민 작가가 지적한 것인데, 숫자 “7”을 김정은이 “ ” 모양으로 쓰는 것이다. 그 쓰기는 유럽 풍속인데 김정은이 유럽문화를 깊이 체화한 징표로 보인다며 그의 개방적 태도에 기대감을 표했다. 나 또한 김정은의 포옹(허깅) 방법을 눈여겨보았다. 고개를 왼쪽으로 엇갈렸다가 오른쪽으로 엇갈리는 포옹, 익숙하지 않은 상대라도(문재인은 익숙지 않아 보였다.) 자연스럽게 끌어들이는 그 포옹 방법에서도 유럽문화의 깊은 체화를 읽을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화 발전을 위해 박근혜 같으면 도저히 맡을 수 없었을 역할을 해내고 있다. 참으로 행운이다. 그러나 북한 입장에서는 단순한 행운이 아니라 어느 정도 예견했던 조건이 아닐까? 탄핵사태가 아니었다면 2017년 말에 대통령선거가 있었을 텐데, 북한의 태도 전환은 2018년 초에 나타났다. 2017년 봄의 문재인 정부 출범 후에도 북한의 도발적 태도는 반년 넘어 계속되었다. 2017년 말의 대통령선거를 통해 박근혜 정부보다는 말이 통할만한 정부가 남한에 들어설 것을 북한 지도부가 예상하고 2018년 초를 전환점으로 기획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판문점에서 문재인과 김정은이 서로 죽을 맞춰주는 모습은 기막힐 정도였다. 두 사람 사이의 상호 이해에는 아쉬운 점이 없을 것 같다. 트럼프는 어떨까?
많은 사람들이 트럼프의 역할에도 기대를 거는 것은 그의 파격적 스타일 때문이다. 나는 그 스타일이 상황의 순조로운 전개에 도움이 되기보다 혼란을 많이 일으킬 것으로 걱정한다. 그가 미국 정치계의 주류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미국 정치계 주류는 지금 북한과의 대화에 인색한 기색을 많이 보이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미국의 주류가 바뀐 현실을 인정하고 북한에 대한 태도를 조정해야 당사자 모두가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2018년에 맞춘 북한의 ‘개방 전환점’이 기획된 것은 2016년의 미국 대통령선거보다 훨씬 전일 것이다. 힐러리 클린턴이나 그 비슷한 주류 후보의 당선을 전제로 기획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클린턴이 백악관을 차지한 상황에서 북한의 작년 도발과 금년 평화공세를 맞았다면 그 반응은 트럼프의 백악관과 어떻게 달랐을까? 극에서 극으로 치닫는 널뛰기가 덜한 외에는 큰 차이가 없었을 것 같다. 북한의 ICBM 완성은 엄연한 사실이고, 미국 본토에 핵무기를 쏘아 보낼 수 있는 세력과의 대화를 미국 대통령이 거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화의 시작 단계에서는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일단 대화가 시작된 뒤에는 더 안정된 진행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트럼프의 스타일이 투자가(investor) 스타일보다 투기꾼(speculator) 스타일이라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투자의 목적이 기본 가치의 창출에 있는 반면 투기의 목적은 시장 가치의 획득에 있다. 정치의 장마당은 선거다. 선거의 유불리에 따라 무슨 말,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과의 대화에는 큰 의미가 있을 수 없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설득해야 할 대상은 트럼프가 아니라 미국의 주류 정치계다.
북한에 대한 미국의 적대적 봉쇄정책은 70년 동안 계속되어 왔다. 그중 공산권 붕괴 후의 30년 동안은 미국의 봉쇄가 북한의 존립을 심각하게 위협해 왔다. 북한은 핵-미사일 개발이 그 조건을 이겨내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고 해명하며 이제부터라도 그 조건이 해소되면 “악의 축” 아닌 보통국가가 되어 온 세계의 이웃들과 함께 잘 살기 위해 애쓸 것이라고 호소하고 있다. 그 호소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미국 ‘주류’의 시각은 동북아시아에서 긴장의 쐐기가 사라지지 않기 바라는 집착으로 편향된 것이 아닐까?
임동원 전 장관이 트럼프 당선 시점에 "한국은 트럼프의 등장을 위기로 볼 것이 아니라 기회로 포착, 활용해야 한다."고 말한 일이 있다. '개입에 의한 국제주의'에 집착해 온 주류의 패퇴가 '팍스 아메리카나'의 퇴조를 말해준다는 것이었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45294) 합당한 관점이라고 생각되지만 “팍스 아메리카나의 퇴조”는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트럼프의 등장은 ‘팍스 아메리카나’의 안정된 대안이 아니라 하나의 과도적 현상일 뿐이다. 그의 등장이 북-미 대화의 시작을 조금 더 쉽게 만들어주는 면이 있더라도 미국의 주류를 설득해 안정된 결과를 얻어내는 길은 더 멀게 만들었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6. 미국보다 중국이 중요한 이유
북한이 ‘2018 전환점’을 기획하면서 자기네 개방 노력을 미국이 선의로 받아들여 줄 것을 기대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란 핵협정을 동맹국들조차 납득하지 못하는 일방적 방식으로 파기하는 미국에게 어찌 그런 기대를 할 수 있겠는가. 북한이 CVID를 완료한 후에야 무슨 보상이라도 해줄 것처럼 압박을 하다가, 나중엔 무슨 딴소리를 할지 모르는 상대라고 미국을 볼 것이다. 제네바협정 파기로 이미 겪어본 일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무엇을 믿고 지금 판을 벌이고 있는 것일까? 중국과 러시아, 특히 중국의 적극적 도움에 대한 기대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6자회담 참여국 중 한반도 평화가 가져올 혜택을 크게 누릴 순서를 나는 이렇게 본다. 1. 북한. 2. 남한. 3. 중국. 4. 일본. 5. 러시아. 6. 미국. 일본의 입장은 미일동맹에 묶여있지만 중국과 러시아에게는 한반도 평화를 원할 강한 동기가 있다. 미국이 무리한 태도로 나온다면 중국과 러시아가 역할을 맡고 나설 것이다. 북한이 금년 들어 국제사회에 보여준 태도를 견지하고 미국이 이에 충분히 화답하지 않는 채로 몇 달 더 지난다면 유엔에서 제재 해제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는 장면이 예상된다.
저자도 지금 국면에서 중국의 역할을 의식하고 있다.
게다가 현재 미국과 중국이 동북아 국제 질서의 주도권을 놓고 다투고 있다는 점도 유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존 패권국인 미국과 떠오르는 패권 도전국인 중국 사이에서 전개되는 패권 경쟁이 심각한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고 보는 거죠. (133쪽)
그런데 저자는 중국을 위협의 대상으로 여기고 그에 대한 견제를 미국에 기대한다.
앞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중국은 점점 노골적으로 ‘줄 세우기’를 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상당 기간 동북아에서 중국에 대한 견제 세력으로서의 역할을 미국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예부터 내려오는 외교의 원칙으로 먼 나라와 친교를 맺고 이웃 나라를 공략한다는 ‘원교근공(遠交近攻)’과 오랑캐로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가 있습니다. 이런 말들만 생각해봐도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분명해지지 않을까요.
이러한 현실에서 볼 때, 만일 동북아에서 미국이라는 견제의 축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봅시다. 참으로 난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과 북은 물론 일본조차도 경제적 측면에서나 안보적 측면에서 중국의 영향권에 흡수되리라 전망하는 사람들이 많은 현실입니다. (135-6쪽)
미국의 견제가 줄어들 경우 한반도와 일본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질 것은 당연히 예상되는 일이다. 그런데 미국보다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이 꼭 나쁜 일일까? 저자는 중국이 “리버럴 데모크라시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인권문제나 언론자유 문제, 법의 지배라는 문제에서는 발전적 방향으로” 나갈 것을 기대했지만 “시진핑 중국의 모습을 보면 아직은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135쪽) 중국이 그리 좋은 나라가 못 되기 때문에 그 영향력의 증대를 꺼린다는 뜻이 읽힌다.
자유민주주의를 비롯한 서방 기준으로 보면 중국이 뒤쳐진 것처럼 보이더라도 국가가 국민의 복리를 위해 작동한다는 정치의 본질적 기준으로는 높이 평가할 측면이 크다고 하는 대니얼 벨의 주장에 (<차이나 모델>, 서해문집 2017) 나는 깊이 공감한다. 그래서 그 책을 번역까지 했고, 우리가 어려서부터 익숙해진 서방식 가치기준에 재고할 점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위 인용문 중 “원교근공”을 “예부터 내려오는 외교의 원칙”으로 본 대목에는 이의를 제기해야겠다. 범수(范睢)의 원교근공책을 진나라 소양왕(307-251 BC)이 채택한 것은 기원전 270년경, 시황제의 천하통일을 40여 년 앞둔 시점이었다. 이 정책은 전쟁의 대형화를 통해 진나라의 6국 병탄에 활용된 것으로서 중국사에서는 하나의 예외적 현상이었다. 나는 원교근공책을 냉전 시대의 원리로 본다.
냉전의 시대가 바로 원교근공책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나라들끼리 같은 진영에 속한다고 하여 밀착된 관계를 가지는 한편 이웃한 나라, 심지어는 동족집단 사이에도 이념이 다르다 하여 원수처럼 지내던 시기였다. 동유럽 국가들은 중서부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 소련의 패권에 유린당했고, 미국은 라틴아메리카를 철권으로 다스렸다. 천하통일의 이념이 진나라의 패권을 정당화한 것처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미국과 소련의 패권을 위해 복무했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44832)
내가 중국사를 공부한 사람이어서 친중파의 경향을 갖고 저자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그쪽에서 활동을 많이 해온 사람이어서 친미파의 경향을 가진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중국을 좋게 보든 나쁘게 보든 중국과의 관계를 더 중시할 필요가 있다는 점은 저자와 내가 함께 공부하던 물리학의 ‘제곱 반비례 법칙(inverse square law)’에 입각해서 강조하고 싶다. 에너지 복사현상에서 복사에너지의 강도(intensity)는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법칙이다.
나는 한민족의 역사를 관통하는 원리로서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중시한다. 강대한 이웃나라 중국으로부터 선진문물을 꾸준히 수입하되 그에 매몰되지 않고 고유문화와 배합함으로써 안보와 발전을 함께 성취한 역사다. 중국의 존재는 긴 역사를 통해 한민족의 역사에 손해보다 이득을 많이 끼쳤으며 19세기 중엽 이후 중국의 침체가 비극과 좌절의 우리 근현대사에 배경이 된 것으로 본다. 중국의 부활은 한민족에게 유리한 세계정세를 형성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중국의 부활이 한반도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어준 일은 14세기 말 명나라와 조선의 출범 때도 있었던 것으로 해석한다. 중국이 몽골 지배에서 벗어나던 그 시점에서 조선 지도자들은 유교 원리에 투철한 사회경제 체제를 국내에 확립하면서 중국과의 관계 역시 유교적 사대-자소(事大-字小) 원리에 따라 재정립했다.
이 단계에서 특히 유의할 점은 패도 성향을 가진 명나라 홍무제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데도 조선 지도자들이 꾸준히 요청해서 새로운 관계를 결국 이뤄냈다는 것이다. 지금도 부활하는 중국에서 더러 패권적 경향이 나타나고 있지만 그런 경향은 이웃나라들과의 관계를 통해 조정될 여지가 크다. 미국보다 중국의 변화 방향을 한민족사회가 원하는 방향으로 바꾸기가 쉬운 것 또한 ‘제곱 반비례 법칙’대로다.
7. 남-남 갈등을 넘는 길
저자는 작년에 낸 책 <한반도 평화 만들기>에 이어 이번 책에서도 남-남 갈등 극복의 필요성을 중시했다. 그는 지난 달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남북갈등보다 풀기 어려운 문제가 남남갈등이다. 분단체제 문제를 이야기하면 남남갈등이 더 격화된다. 통일은 되어야 하지만 지금은 체제문제로 얘기할 때는 아니다. 동서독이 싸우지 않은 나라였던 것과 달리 남북은 전쟁을 한 나라다. 따라서 대북 문제에서 하나의 목소리를 이루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 독일의 동방정책은 빌리 브란트의 진보 정부가 만들어서 헬무트 슈미트로, 보수 정부의 헬무트 콜로 연결된 과정이었다. 일관된 정책을 만들어 가는 작업을 우리도 해야 한다. 통일을 앞세워서 분단체제에 직접적으로 접근하면 남남갈등이 심해진다. (214-5쪽)
남-남 갈등 극복의 노력은 저자의 말보다 행동에서 더 분명히 나타난다. 최장집 교수는 저자가 작년에 낸 책 <한반도 평화 만들기>의 서평에 이렇게 썼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65232)
흥미롭기도 하고, 놀랍기도 한 것은 보수적 범주에 속할 수 있는 사람이 그런 정형화된 사고의 틀을 뛰어넘어 전혀 다른 차원에서 평화의 문제와 가치를 본격적으로 제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저자가 오래전부터 한반도포럼을 통해 남북한 간 관계를 탈냉전 상황에 부응할 수 있는 방향으로 평화 만들기를 실천해왔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보수적 범주”에 속하는 사람은 “정형화된 사고의 틀”에 갇히기 쉽다는 생각이 깔려있는 말이다. ‘보수’를 표방하는 자유한국당은 미국이 보장해 주는 자유시장 경제 체제를 지키려 하고 북한과의 관계도 이 체제를 확장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기만을 바란다. 그 사고의 틀을 대표하는 “통일은 대박”이라는 말은 남한의 이익이 관철되기 바라는 대립지향적인 뜻을 품은 것이다.
여기서 ‘보수’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나는 십여 년 전부터 보수주의자를 자처해 왔는데, 내가 생각하는 보수의 기본 의미는 역사적 경험을 뛰어넘는 인간사회의 발전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역사적 경험만 잘 새겨도 잘 살 길을 충분히 찾을 수 있는데, 허황한 욕심 때문에 그를 소홀히 해서 불필요한 혼란과 고통을 겪는 데 많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혁명’을 싫어한다. 혁명을 피하는 길을 찾는 것이 보수주의자의 과업이라고 생각한다.
혁명을 피하기 위해서는 변화를 순조롭게 받아들여야 한다. 변화를 무작정 거부하는 것은 ‘보수’가 아니라 ‘수구’다. 수구적 행태가 만연하면 혁명을 피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보수주의자의 가장 큰 적이 수구세력이라 할 수 있다.
한반도의 긴장을 해소하고 평화를 가져오는 것은 진보, 보수와 관계없이 공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두 원하는 일이다. 이 과제 앞에서 남-남 갈등이란 보수-진보 간의 갈등이 아니라 (공익도 추구하는) 공익 추구세력과 (사익만 추구하는) 사익 추구세력 사이의 갈등이다.
한국 정치계에서 ‘보수’를 표방하는 가장 큰 세력인 자유한국당은 ‘보수’의 탈을 쓴 수구세력에게 많이 이용당해 온 정당이다. 지금 남북관계의 급격한 전개 앞에 “딴나라당” 노릇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다분히 관성 때문이다. 금년 초 이래 긴장 완화의 단계 하나하나를 거칠 때마다 평화의 가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계속 자라나고 있고 수구세력의 선전은 효과를 잃어가고 있다. 수구세력이 일으키는 남-남 갈등은 상황 전개에 따라 제풀에 사그러들 것으로 기대한다.
남-남 갈등의 더 오래 갈 측면은 미국과 중국의 역할에 관한 의견 차이다. 저자가 북한에게 ‘프런트-로딩’으로 먼저 화끈하게 벗도록 권하는 것은 미국의 선의가 한반도 평화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고 북한의 태도에 따라 미국이 선의를 일으킬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의 선의에 한계가 있으며, 그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도움에 의해 한반도 평화가 가능하다고 본다. ‘한반도 평화’라는 새로운 상황에는 관계세력 모두의 적응 노력이 필요하고, 특히 미국의 큰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는 내 관점에서는 미국이 ‘북핵 위기’를 초래한 종래의 자기네 패권주의를 반성할 때이지, 뒷짐 지고 ‘프런트-로딩’을 받을 계제가 아니라고 보인다.
서로 다른 관점이지만 현실 속에서 상호보완적 효용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삼전도 항복을 앞두고 척화파 김상헌이 작성된 항서를 찢어발길 때 주화파 최명길이 찢어진 항서를 주워 모으며 “찢는 대감도 필요하지만 줍는 나도 필요하다”고 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지금 미국에 대해서도 그렇다. 속으로는 미국의 쇠퇴를 헤아리더라도 미국의 주도권을 존중해주는 자세가 순조로운 진행을 위해 바람직한 한편 미국의 주도권을 존중해주는 다테마에(建前) 뒤에서 미국 패권 쇠퇴의 추세를 짚어줌으로써 미국의 신중한 자세를 유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친미’와 ‘친중’의 대립으로 볼 수 있는 의견 차이가 현실 속에서 보완성을 갖기 위해서는 각자의 타당성이 성립하는 영역을 서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저자의 현실 파악이 정역학(statics) 차원에서 타당성을 가진다고 본다. 지금까지 존재해 온 상황을 정리한 것이다. 나는 그에 비해 지금 진행되고 있는 변화의 추세를 적극적으로 감안해서 동역학(dynamics) 차원의 현실 파악에 치중한다.
내 관점에 희망적 사고(wishful thinking)가 끼어들 위험을 인정하면서 홍석현의 정역학적 관점을 고려해야 하고, 홍석현의 관점이 한계에 부딪칠 때를 (미국이 완벽한 CVID가 이뤄지기 전에 어떤 상응조치도 취할 것을 거부할 때) 대비해서 나와 같은 동역학적 관점을 키워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과 중국 어느 쪽의 역할을 더 중심에 놓고 보든, 한반도 평화가 왜 필요한 것이고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저자와 내가 많은 생각을 함께한다. 함께하는 생각의 크고 중요함을 충분히 인식할 때 현실 파악의 관점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우리의 가는 길을 가로막기보다 도와주는 생산적 갈등이 될 수 있다. 남-남 갈등의 많은 부분을 극복하는 길을 이런 자세에서 찾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저자 같은 이들과 열심히 생각을 나누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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