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3. 17:26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누가 '영혼 없는 경찰'을 만드는가?
기사입력 2009-02-18 오전 6:19:56
사오정의 시대 손오공과 사오정이 함께 면접을 보러 갔다. 오공이 먼저 들어갔다. 면접관이 물었다. "좋아하는 축구 선수가 누구지요?" 오공이 대답했다. "전에는 차범근이었는데 지금은 이동국입니다." 면접관이 물었다. "코소보가 어디인가요?" 오공이 대답했다. "발칸반도의 중앙부에 있는 산악지대입니다." 면접관이 또 물었다. "초능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오공이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과학적으로 입증은 안됐지만 그럴싸한 사실이라 생각합니다." 합격하고 나온 오공에게 오정이 요령을 물었다. 오공은 상세하게 가르쳐줬다. 잠시 후 오정의 차례가 되어 면접실에 들어갔다. 면접관이 물었다. "이름이 뭐지요?" 오정의 준비된 대답. "전에는 차범근이었는데 지금은 이동국입니다." 면접관이 놀라서 물었다. "뭐야? 당신 어디서 왔어?" 오정은 늠름하게 대답했다. "발칸반도의 중앙부에 있는 산악지대입니다." 면접관이 기가 막혀 "이 사람 바보 아냐?" 하자 오정은 자신 있게 대꾸했다. "과학적으로 입증은 안됐지만 그럴싸한 사실이라 생각합니다." 말귀를 철저하게 못 알아듣는 사오정이 사회에서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이유가 뭘까. 우리가 현실에서 답답하게 느끼는 현상을 희화화해서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알아들을 만한 메시지를 받고도 시치미 떼는 누군가를 떠올려주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오정을 재미있어 한다. 몇 해 전에는 덩달이 시리즈가 유행했다. 이야기의 맥락은 살피지 않고 글자에만 집착하는 것이 덩달이의 장기였다. 그 역시 숲을 볼 생각은 않고 나무만 보려 드는 누군가를 떠올려줬기에 인기를 끌었을 것이다. 덩달이와 사오정의 모델은 누구일까. 그 시절이나 이 시절이나 사회의 기대를 모으고, 또 그 기대를 어그러뜨려 사회의 비난을 모은 것은 정치권이다. 다른 모델이 누가 있겠는가. 정치권 안에서 누가 누구보다 더 모델로 적확하다고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짓일 것이다. 덩달이는 글자에라도 집착했다. 사오정은 아예 신경도 안 쓴다. 국민의 개혁 요구를 빙자해 사정의 칼날을 자의적으로 휘두르던 시절이 덩달이의 시대였다면, 여야가 바뀌기 전에 자기네가 하던 주장은 까맣게 잊어먹고 상대당의 약점 잡기에만 골몰하는 지금이 사오정의 시대일까. 사오정 다음에는 어떤 캐릭터가 정치권을 그려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
▲ 지난 1월 30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강연하는 한승수.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최고의 엘리트 관료인 그가 국회에서 '메일' 갖고 말장난하는 모습을 보면 '엘리트'가 '영혼 없는'과 같은 뜻이던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그렇다. 영혼 없는 공무원도 있을 수 있다. 영혼 없는 대통령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영혼 없는 주권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공무원을 영혼 없는 공무원이 되라고 몰아붙여서야 되겠는가? ⓒ뉴시스 |
10년 전에 쓴 이 글을 꺼내 보며 글쓰기가 참 조심스러운 일이란 생각을 새삼 한다. 어떤 자들을 보고 사오정을 떠올렸던 것인지 지금 잘 생각도 나지 않지만, 무조건 미안하다. 요즘 한국 정부를 대표한다는 사람들 몇몇이 보여주는 사오정스러움에 비길 만한 일은 그 시절이고 그 전이고 단연코 없었다. 당시로서는 뭔가 답답한 꼴을 보며 울화통을 터뜨린 것이었겠지만, 내가 사오정을 너무 우습게 봤었다. 사오정에게 정말 미안하다.
일국의 총리란 사람이, 그것도 유엔총회 의장까지 지내봤다는 사람이 국회 답변에서 '메일'의 의미를 축소하기 위해 한다는 소리 좀 들어보라. "제가 영어를 좀 한다. 외국에선 메일 그러면 편지를 얘기한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
청와대가 용산 참사에 대한 비판 여론을 호도하려고 획책한 사실을 덮을 수 있는 데까지 덮어주려는 한승수의 '충정'은 알겠다. 그런데 그 충정을 관철하기 위해 고작 할 수 있는 일이 자기가 영어 좀 한다는 사실을 내세우고 낱말풀이 해주는 것뿐이라니,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것이었을까? "미국인들은 편지를 메일이라 한다. 따라서 한국인들도 편지 아닌 것을 메일이라 하면 안 된다. 청와대에서 경찰로 메일을 보냈다고 하는데, 보낸 것이 편지가 아니었다면 그것을 메일이라고 해선 안 된다?" 그 정도 영어가 몇 점짜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논리는 낙제점이고 정치력은 빵점이다.
한승수의 경력을 나는 잘 모른다. 허나 국회에 답변하는 총리 입장에서 자기 말의 신뢰성을 높이겠다고 "제가 영어를 좀 한다" 하는 말을 앞세우는 것을 보면 일을 어떤 식으로 하는 사람인지 짐작이 간다. 자기 일을 찾아서 할 줄은 모르고, 일 시켜줄 사람 찾아 "내가 뭐는 좀 하니까" 시켜달라고 매달리는 사람. 시킨 일 하는 데 중치 이상은 갔기에 오늘의 위치에 이르렀겠지. 그런데 지금 'mail' 단어 하나 붙잡고 늘어져 덩달이 노릇을 하고 있는 게 중치 이상 가는 짓일까? 이런 사람이 이런 꼴 보이는 건 그 사람 자신보다 그 사람에게 누가 어떤 일을 시켰는가에 문제가 있다.
총리에게 일을 시키는 건 대통령이다. 대통령이 총리에게 어떤 일을 어떻게 시키는 지 세세한 내용은 몰라도, 대통령이 원하는 일을 대통령이 익숙한 방식으로 하라는 압박감이 있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대통령에게 익숙한 방식은 어떤 것인가?
지난 월말의 TV '원탁 대화'에서 이명박은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경제 정책의 오류를 지적하는 질문에 "모든 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모든 것"이라니! 듣기 싫은 소리가 모두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원리주의 종교의 '무류성(無謬性)' 수준이다. 남북 관계 악화에 대해선 "60년 분단 중 한 1년 정상화를 위해 경색된 것은 있을 만한 일"이라고 한다. 60년 분단만 보이고 긴장 완화 노력의 10년은 보이지 않는가보다. 용산 참사에 대해선 "모든 것을 폭력, 힘으로 하면 되지 않는다."고 한다. 폭력과 힘을 앞세운 '속도전'은 누가 주문한 것인가?
이 정도라도 사오정이 자리 뺏길까봐 불안해질 만한데, 여기서 그친 것도 아니다. '회전문 인사' 얘기에 "어떤 분이 그러냐?"고 반문을 하는 데는 그야말로 할 말이 없다. 용산의 특공대 투입 문제가 나오자 "완전히 일방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면서 자기의 일방적인 이야기만 한다. 사오정도 두 손 들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끔찍한 얘기는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를 용산 참사 책임으로부터 감싸며 "경찰이 잘못하다간 우리만 당한다고 생각한다면 누가 일하겠느냐"고 따지는 것이다. 공권력 남용으로 국민을 죽이는 결과가 나타나도 자기 뜻에 따라 뛰어주기만 하면 지켜주겠다는 것이다. "이번 문제도 앞뒤를 가리지 않고 한다면 공직자가 누가 일하겠느냐"고도 한다. 일을 열심히 한다면 결과가 잘못되어도 책임을 묻지 않아야 일할 의욕이 살아난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에게는 자기 사회를 아끼는 마음이 있다. 공무원도 마찬가지다. 보수를 비롯해 적절한 조건을 마련해주면 당장 드러나지 않아도 자기 업무를 충실히 수행해 나름대로의 양심도 지키면서 역할도 인정받고자 하는 것이 제대로 된 공직 사회다. 그런데 사람의 본성을 다르게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공무원을 '영혼 없는 존재'로 규정한다. 그래야 그 이기심을 자극함으로써 자기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찰과 공무원의 양심을 마비시키고 이기심에 따라서만 움직이게 만들면 권력을 사유화할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 있다. 국가를 하나의 폭력 조직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자들이다. 물론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 시도가 좌절되기까지 이 사회가,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을 것이다. 용산의 희생자들은 그 시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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