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초반 조선인의 생활조건은 식민지상태에 전쟁 상황이 겹쳐져 매우 열악했다. 해방으로 두 가지 문제가 모두 해소되었으니 생활조건이 향상되어야 할 텐데, 반년이 지나도록 그러지 못한 것은 다른 두 가지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행정의 혼란이고 또 하나는 38선 장벽이었다.
일본의 식민지배는 억압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기능적인 면에서는 효율성과 안정성을 꽤 갖춘 체제였다. 이 체제가 사라진 공백을 메울 효과적 대안이 나타나고 자리 잡는 데 시간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38선 남북을 막론하고 큰 혼란이 일어났다. 특히 이남의 문제가 심각했다. 이북에서는 주민의 자생적 질서를 점령군이 존중했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혼란이 극복되어 갈 수 있었는데, 이남의 점령군은 일본 지배의 효율성은 물려받지 않고 억압성만 물려받았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혼란이 더욱 심해졌다.
대표적인 문제가 미곡, 즉 식량 정책이었다. 여운형이 해방의 날 건준을 출범시킬 때 질서 유지에 협조하는 조건으로 총독부에 요구한 5개항 중 하나가 3개월 치 식량의 확보였다. 큰 변화에 임해 식량 문제가 질서의 필요조건이므로 총독부와 일본군의 비축미와 군량미를 넘겨받아 추수 때까지 견딜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조선에서는 1943년 8월 이래 식량배급제가 실시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군정은 들어선 지 한 달이 안 된 10월 5일에 미곡의 자유시장화를 선언했다. 작황이 좋아서 시장 상황을 낙관한 것이라 하는데, 아무리 좋게 얘기해도 경솔한 조치였다. 미곡시장이 투기화되고 도시민들은 겨우내 식량 부족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지주층의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한민당 측의 획책이라는 의심이 나돌았다.
군정청과 경찰은 일본으로의 쌀 밀수를 계속 문제 삼았다. 일본의 쌀값이 한국보다 열 배나 비싸서 밀수가 성행했다는 이야기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설령 밀수가 있다 하더라도 그 분량이 얼마나 되었겠는가. 잘못된 식량정책의 지엽적 결과일 뿐이다. 정책의 잘못을 그런 식으로 개인의 도덕심과 애국심 문제로 호도하다가 결국 1월 25일 자유시장화를 포기하는 미곡수집령을 군정청 법령 제45호로 내놓았다.
38선의 존재가 경제 사정의 어려움을 더했다. 38선만이 아니라 일본제국의 일부로 자리 잡고 있던 조선 경제는 일본, 만주 등 외부와의 단절로 큰 제약을 받았다. 제조업의 상당 부분이 원료와 시장 문제로 마비되지 않을 수 없었다. 38선은 그 제약을 더 심하게 했다. 양쪽 점령군은 38선을 통해 물자가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았으므로 조선 경제는 국제적 분업만이 아니라 남북 간의 분업까지 가로막힌 것이다.
남북 간 분업의 가장 대표적인 품목이 식량과 에너지였다. 공업화 수준이 낮은 이남 지역은 일본제국 안에서 중요한 미곡 생산지였다. 한편 이북 지역은 식량 생산이 적은 반면 석탄과 전력 생산이 많았다. 전력의 이남 공급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석탄 공급이 끊겼다. 이북에서는 석탄 대신 쌀을 들여오고 싶었는데, 이남의 미곡 시장 혼란으로 쌀을 보내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2월 1일 이남에서는 석탄 부족 때문에 열차 운행을 줄이기에 이르렀다. 경부선-경인선 열차가 하루 겨우 1회 왕복하는 상황이었다.
1월 16일부터 2월 5일까지 서울에서 열린 미소군 대표회담은 미소공위의 예비회담 성격도 가진 것이었으나 기본적으로는 당장의 현실적 문제의 해결에 목적을 둔 것이었다. 남북 간의 물자 교류 방안이 의논되었는데, 이북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쌀을 이남에서 내놓을 수 없었다. 소련군이 이남으로의 석탄 반출을 거부하기에 이른 것은 미군이 이북 상황 악화를 위해 일부러 쌀 반출을 회피한 것으로 의심한 결과일 수도 있다. 소련군이 남한으로 반출할 물자 8,900만원 어치를 제안한 데 반해 미군이 북한으로 반출할 물자 제안이 겨우 1,035만원 어치였다는 사실을 보면, 미군이 물자 교류에 소극적 내지 부정적이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커밍스,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40쪽) 미군이 소련군에 비해 38선으로 인한 민생 문제 해결에 열의가 적었음을 알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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