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작년 9월 22일에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라는 글을 발표하셨죠. 원고지 2백 매 가량, 길지 않은 글이지만 많은 내용을 담으셨더군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신 중에 그런 글까지 쓰신 것을 보고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해방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이뤄나갈 독립의 과업에 이념적 지표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정말 있는 힘을 다해 쓰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글의 4개장이 (1) ‘국제적 개관과 신민족주의’, (2) ‘조선 정치철학과 신민족주의’, (3) ‘결론으로서의 신민족주의’, (4) ‘신민주주의 건국이념’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목에는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를 나란히 놓았는데, 내용에서는 신민족주의를 3개장에 걸쳐 논한 뒤에 신민주주의 한 장을 붙여놓은 모양새입니다. 이런 불균형의 이유가 무엇인지, 두 주의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설명해주십시오.
안: 일본의 패망을 내다보면서부터 이런 글의 필요를 생각하고 준비해 왔습니다. 그런데 해방 전 몇 달 동안 신변의 위협 때문에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지낸 데다 해방이 예상 외로 빨랐기 때문에 준비를 제대로 못 했습니다. 해방이 되고는 건준 일로 정신없이 바쁘다가 8월 말 건준에서 물러난 뒤 몇 주일 동안 만사 제쳐놓고 이 글에 매달렸죠.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해 사람들이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해방이 닥치니까 나 같은 독서인까지도 행동에 쫓겨 생각에 잠길 생각을 많이 가지기 힘듭니다. 사람들의 생각에 도움이 될 글을 어서 내놓기 위해 서둘러 작성했습니다.
내 공부가 사회과학보다 역사에 치중한 것이기 때문에 민주주의보다 민족주의에 이야기가 쏠리기도 한 것이지만, 실제로 신민족주의 쪽 얘기 필요가 더 큽니다. 신민주주의 노선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꽤 정리되어 있고, 상당한 합의가 은연중에 이뤄져 있어요. 민주주의 본산인 영국에서 시작해 ‘자유민주주의’라고도 불리는 자본적 민주주의가 있는데, 산업화가 안 된 조선 같은 나라에서는 형식을 중시하는 자본적 민주주의보다 내용을 중시하는 인민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합의입니다.
나는 조선인이 추구하는 민족주의와 민주주의가 별개의 사상이 아니라 하나의 이념이 가진 두 측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신(新)’ 자를 붙였지만, 우리 역사와 전통에 품겨 있는 정신을 되살리는 것입니다. 신민족주의의 내용을 밝히는 것이 신민주주의의 의미를 분명히 하는 길이기도 하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김: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국제협력의 필요성이 크게 부각되었고, 특히 제2차 대전 동안 추축국의 국수주의 풍조가 격렬한 비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민족주의가 세계평화의 걸림돌로 지탄받는 마당에 민족주의를 강조한다는 것이 바람직한 일일까요?
안: 민족주의라 하면 흔히 근대자본주의 시대의 산물로 생각합니다. 그런 통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차원의 민족주의를 생각하자는 뜻에서 ‘신’ 자를 붙인 것이죠.
민족과 민족의식은 옛날부터 있던 것입니다. 서양의 자본주의 시대를 맞아 전부터 있던 민족의식이 ‘민족주의’로 모습을 나타낸 것이 서양식, 근대식, 자본주의식 민족주의입니다. 이 근대식 민족주의가 배타적 투쟁성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제국주의 문제를 일으킨 것이고, 우리 조선인은 이와 다른 민족주의를 일으켜야 합니다.
근대세계의 발전에 낙오하지 않기 위해서는 근대적 문화와 제도를 발전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회든 그 문화와 제도가 자기 체질에 맞는 것이라야 진정한 발전이 가능합니다. 체질에 맞지 않는 방향으로는 발전을 이루기 어렵고, 억지로 발전을 이룬다면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결과가 되기 쉽습니다. 일본이 겉보기로는 눈부신 발전을 이루는 것 같으면서 그 본질이 망가진 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김: 일본의 실패는 대단히 극적인 것이기도 하고, 또 조선인들이 함께 겪어온 것이기도 합니다. 그 실패의 경험에서 조선인들도 많은 교훈을 얻어야 하겠죠. 일본의 실패가 어떤 것이었는지 선생님 생각을 말씀해 주십시오.
안: 서양의 근대식 민족주의는 원래 배타적 투쟁성이라는 문제를 가진 것입니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그 문제가 극심하게 나타났지만, 연합국인 영국, 프랑스, 러시아도 제국주의 단계에서 그 문제를 보여 왔습니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그 문제가 특히 심했던 까닭을 생각하면, 두 나라가 근세까지 민족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편협한 지역주의가 강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민족의식이 민족주의로 비교적 순탄하게 발전해 나온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극단적인 배타성을 띠게 된 것이지요. 일본이 섬나라로서 대외교섭 경험이 적었다는 점이 비슷한 조건이 되었습니다. 서양에서 받아들인 배타적 민족주의를 더욱 편협하게 키워냈지요.
일본이 자기 역사와 전통을 스스로 아끼는 자세를 지켰다면 이토록 엄청난 파국에 이르는 길을 피할 수 있었을 겁니다. 메이지시대의 개혁까지는 좋았습니다. 혁신으로서의 복고(復古)와 발전으로서의 서양문명 수입이 잘 어울린 것은 ‘지양회통(止揚會通)’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이쇼시대 이후 모방과 나열, 확대와 방만의 풍조에 휩쓸려 자기반성의 자세를 잃는 바람에 파멸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입에 걸고 살던 ‘대화혼(大和魂)’을 생각해 보세요. 민족의 발전을 위해 좋은 영감을 일으켜줄 수 있는 훌륭한 전통입니다. 그러나 쇼와시대의 대화혼은 일본의 전통적 정신이 아니라 서양에서 배워온 투쟁성을 극단화시킨 이름일 뿐이었습니다. 전통의 왜곡이었죠.
김: 선생님 글을 요즘 사람이 볼 때 추상적 용어들이 많이 나와서 관념적이라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지금도 ‘지양회통’이란 말을 쓰셨는데, 이런 말을 무슨 뜻으로 쓰시는 건지 저도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지양’은 독일철학의 변증법을 들여오면서 일본에서 만든 말이고, ‘회통’은 불가에서 중시해 온 개념인데요. 배경이 다른 두 말을 합쳐서 쓰시는 것이 어리둥절합니다. 선생님 글에서 핵심적 용어로 보이는데 어떤 뜻인지 좀 풀어서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안: ‘지양’은 무엇을 받아들이든 겉보기만 받아들이지 말고 본질을 파악한다는 뜻이고, ‘회통’은 서로 다르게 보이는 것들이 공유하는 본질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독일철학과 불교의 용어를 나란히 놓은 것이 김 선생 눈에는 혼란스럽게 보이는 모양인데, 이런 혼란이 바로 문화적 생산력의 바탕이 됩니다. 출신이 다른 개념이라도 ‘지양’이나 ‘회통’ 같은 한자어로 포착될 때, 한자문화를 키워주면서 그 안에서 새로운 맥락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지양회통’ 같은 말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곧 한자문화의 성장 과정입니다.
‘지양회통’은 한 사회의 문화적 성장 원리일 뿐 아니라 한 생명체의 생장 원리이기도 한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 변화를 겪되 원래의 내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고 변증법적, 유기적 변화 과정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예전에 동양인들이 말하던 ‘동도서기’, ‘중체서용’, ‘화혼양재’가 모두 이 원리를 가리킨 것인데, 이 원리의 구체적 성격을 더 분명히 보여주는 말로 ‘지양회통’을 쓴 것입니다.
김: 60여 년 후의 독자들이 읽기 힘든 또 한 가지 문제가 어원에 대한 선생님의 집착에 있습니다. 숫자, 계절 이름 등 우리말 기본 어휘에 담긴 의미를 통해 우리 전통철학의 요점을 밝힌다는 것인데, 언어학적 근거가 든든한 것인지 미심쩍은 대목이 더러 있습니다. ‘하나’에서 ‘하늘’을, ‘셋’에서 ‘씨앗’을 찾아내는 데서는 저절로 무릎을 치게 되지만, ‘둘’에서 ‘들’을 통해 ‘땅’으로, ‘넷’에서 ‘나다(出生)’를 통해 ‘나’와 ‘나라’로 이어진다는 말씀은 그리 석연치 않습니다.
그런데 읽다가 깜짝 놀란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성숙한 여성의 생식기를 ‘씨입(種口)’으로 풀이한 대목인데요, 1945년 시점에서 선생님 같은 분이 그런 말을 이런 글에 올린다는 것이 너무 뜻밖이에요. 선생님의 어원 탐구가 가벼운 말장난이 아니라 얼마나 진지한 작업인지 이런 대목에서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1980년대에 제 어머니께서 어원 연구에 몰두하실 동안(이남덕, <한국어 어원 연구>, 4책, 이화여대 출판부 펴냄) 얼굴만 뵈면 어원 이야기를 들으며 지냈습니다. 그래서 어휘 변화의 음운학적 조건을 조금 이해하기 때문에 선생님의 어원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대목도 꽤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선생님 세대에서 우리말 어원에 많은 관심을 쏟던 데 비해 지금은 그 관심이 줄어든 것이 전통에 대한 신뢰와 애착이 줄어든 세태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서글픈 생각도 듭니다.
안: 어원 탐구에 음운학 같은 과학적 방법까지 활용하게 되었다니 반갑군요. 그러나 어원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줄어들었다니 안타깝습니다. 언어는 민족문화의 본체(本體)입니다. 민족문화의 본질을 가장 분명히 찾아볼 수 있는 길의 하나가 어원 탐구입니다.
육당(최남선)을 친일파로 비난하는 데 내가 동의하지 않는 까닭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의 활동 가운데 친일적인 것은 잔가지일 뿐이고, 몸통은 민족문화 연구였습니다. 어원 탐구만 하더라도 그의 업적은 민족문화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기에 족한 것입니다.
김: 종래의 민족주의와 선생님 말씀하시는 ‘신’민족주의의 다른 점을 간단히 설명해 주시지요.
안: 한 마디로 투쟁적 배타성을 벗어나자는 겁니다. 한 개인이 자존심을 갖고 당당하게 살아가려면 남들과 다른 자신의 특성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남들의 특성을 꼭 모두 깔봐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과 나의 ‘다름’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평화로우면서도 떳떳한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민족과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인들이 이웃 민족들을 깎아내림으로써 자존심을 세우려 했기 때문에 이웃들을 괴롭혀 왔고, 이제 그 업보가 자기네에게 돌아왔습니다. 이기고 있을 때는 그들 마음이 통쾌했을지 몰라도 영원한 승리란 없습니다. 평화를 등지는 민족주의는 이웃을 괴롭히고 결국 자기 자신이 고통을 겪게 되는 길입니다.
내게 민족주의를 가르쳐준 단재(신채호) 선생이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규정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일본 하나만을 ‘비아’로 인식하던 식민지시대의 역사 인식이라고 나는 봅니다. 수천 년 중국과의 관계를 훑어보면 투쟁도 있었지만 협력도 있었습니다. 한 개인이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과 싸우기도 하지만 돕기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의 지배를 벗어나 여러 연합국의 도움을 받게 된 이제, ‘비아’와의 투쟁만이 아니라 협력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김: 연합국의 도움은 지금의 조선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이 중요한 것입니다. 해방 자체도 우리 독립운동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연합국의 힘에 대한 일본의 항복으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합니다. 일본 지배가 끝난 기쁨의 이면에는 지금까지 조선 사회를 지탱해 온 체제가 무너져 식량 문제, 산업 문제부터 시작해 벅찬 과제들이 쌓여 있습니다. 연합국의 도움 없이는 당장의 민생부터 엄청난 고통이 예상됩니다.
그런데 과연 연합국으로부터 어떤 도움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솔직히 말해서 그들이 조선인의 행복을 위해 일본을 항복시킨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자기네 권리를 지키고 이익을 키우기 위해 전쟁을 한 것이고, 조선의 해방은 부수적으로 일어난 일 아닙니까?
일본을 항복시켜서 큰 문제를 해결해 놓은 이제 그들이 자기네 이익을 도외시해 가면서 조선인을 도와줄 것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자기네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이북에서는 소련군의 약탈이 개인적 악행을 넘어 기계류의 조직적 반출까지 소문이 들리고 있고, 이남의 미군도 착한 마음을 보여주는 일이 많지 않습니다.
“미국을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자”는 동요가 나오고 있습니다. 소련과 미국이 일본에게서 조선을 빼앗아 일본 대신 지배하겠다는 욕심이 아닌가, 의심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카이로선언 등 조선을 독립시킨다는 약속은 일본을 약화시키기 위한 전술적 선전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독일 항복 후 런던에 있던 폴란드 망명정부가 소련군 때문에 귀국하지 못했고, 미군은 일본에도 실시하지 않는 군정을 조선 남반부에 시행하고 있습니다.
쓸 데 없는 의심을 삼가고 상대방의 선의를 최대한 믿어줌으로써 선의를 더 북돋워줄 수 있다는 것은 압니다. 그러나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過猶不及)”는 말처럼 지나친 믿음에도 믿음의 부족과 다르지 않은 문제가 있습니다. 선생님은 연합국, 특히 미국과 소련에게 어떤 근거로 어떤 도움을 기대하는지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안: 1882년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제1조에 조선과 제3국 사이의 갈등이 있을 때 미국이 거중 조정한다고 했습니다. 1905년 포츠머스강화조약 때 미국은 이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이 위약이 당시로서는 부득이한 일이었고, 카이로선언 이래 미국은 뒤늦게나마 그 약속의 정신을 되살리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소련은 조선에 대해 제국주의적 야심을 보였던 러시아를 이어받은 나라이지만, 1917년 혁명 후 피압박 민족의 해방을 제창해 왔습니다. 폴란드 사정을 전해 듣고 나도 의아한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억압체제 철폐를 국시(國是)로 지켜온 소련이 어느 연합국보다도 공명정대한 자세로 조선 문제에 임할 것을 나는 기대합니다.
각국이 자기 이익을 앞세우는 풍조가 세계대전 종결을 계기로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친 이기주의가 어떤 참극을 불러오는지 세계대전은 큰 교훈을 남겼습니다. 평화와 공영을 받드는 풍조가 크게 일어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조선의 역사를 보면 조선의 평화가 한반도만이 아니라 주변 지역의 평화를 위해서도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여실히 알아볼 수 있습니다. 조선이 몽골군에게 짓밟힐 때 일본이 침략의 위협에 떨었고, 풍신수길이 조선을 침략했을 때 중국이 전화에 휘말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이 식민지가 되었을 때 동양 전체가 평화를 잃었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든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은 조선의 독립을 도와주고 싶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인도 소련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각국의 정책이 이런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더 많이 결정되도록 우리가 노력할 일이 있습니다. 독립 조선이 세계평화에 이바지하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전 세계인의 마음에 심어주는 것입니다.
김: 이번에는 신민주주의에 관한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절차를 중시하는 자본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인민의 복리라는 목적에 충실한 인민민주주의가 신민주주의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원리와 통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선생님은 좌익을 지지하는 것입니까?
안: 장기적 관점에서는 나도 사회주의를 지지합니다. 자본적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라고 흔히 부르는데, 자유가 민주주의의 중요한 본질이기는 하지만 자유의 가치를 절대화하는 데는 문제가 있습니다. 자유에는 강자의 힘을 더 키워주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지나친 자유는 사회의 불평등을 늘리고 안정을 해칩니다. 어느 사회에나 약자가 강자보다 다수인 만큼, 약자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회주의가 장기적으로 자본주의보다 좋습니다.
미국 같은 나라는 자본적 민주주의를 시행할 수 있습니다. 자원이 풍부해서 아무리 약자라도 생존의 벼랑 끝에 내몰리지 않도록 최소한의 보호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나라에서는 힘의 집중을 국제관계에서 유리한 조건으로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처럼 가난한 나라에 자본적 민주주의를 시행한다는 것은 뱁새가 황새 따라가겠다는 격입니다.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를 지지하지만, 그 원리를 즉각 실현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다고 봅니다. 민생 안정을 위한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이 확보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사회주의 원리가 사치일 수 있습니다. 지금의 조선에서는 자본과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우대받아야 합니다. 민생이 안정된 뒤에라야 사회주의 원리를 향한 민심이 자라날 겁니다.
그리고 공산주의 계급투쟁은 조선에 필요 없습니다. 온 민족이 계급-계층 구분 없이 통째로 일제 마수에 떨어졌다가, 또 계급-계층 구분 없이 함께 해방을 맞았습니다. 해방의 기쁨을 함께 나누며 민족의 장래를 위해 힘을 합쳐도 벅찬 과제가 널려 있는데, 왜 일부러 내 편 네 편 갈라 싸울 궁리부터 해야 되겠습니까?
김: 계급투쟁을 피할 수 있다면야 좋겠지요. 그러나 조선의 경제사회 구조가 일본 지배 35년 동안 큰 변화를 겪지 않았습니까? 농지 소유구조만 하더라도 조선시대에 비해 집중도가 높아져서 소작농의 비율이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광공업 분야의 노동자도 많이 생겼습니다. 계급 모순도 지금의 조선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자본과 기술의 보유자들이 우대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지금 큰 재산과 높은 학력을 가진 사람들은 대개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한 사람들 아닙니까? 선생님 주변을 둘러보세요. 식민 지배에 저항한 사람들은 재산이 꽤 있던 사람들도 재산을 잃었고, 능력 있는 사람들도 능력을 펴지 못하고 지냈습니다. 그 자제들은 고등교육 받기가 힘들었습니다. 자본과 기술에 대한 우대는 바로 친일파의 옹호가 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안: 두 가지 다 일리 있는 지적입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더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35년 동안 조선에서도 계급 모순이 상당히 자라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모순의 대부분은 이민족 지배에 기인한 것입니다. 농지 문제만 하더라도 조선인 사이의 모순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농지의 20%를 일본인과 일본 회사들이 탈취한 것이 문제의 몸통입니다. 그들의 농지만 몰수해서 영세농에게 분배해도 문제는 충분히 해결됩니다. 조선인 지주의 경우, 극소수 악질 친일파 외에는 건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협력’ 문제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해방 전에 관리를 지낸 사람들, 사업해서 재산 모은 사람들을 모두 친일파로 몰아붙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처럼 미련하게 살아온 사람까지 그 시대에 신문사 사장 해먹었다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유불급’이란 말이 여기에도 적용됩니다. 기준을 너무 넓게 잡아 그 시대에 숨 쉬고 산 것까지 친일로 몰아붙이면 비판의 실질적 의미가 사라집니다. 기준을 좁혀 아주 악질적인 경우만 철저히 처단함으로써 ‘일벌백계(一罰百戒)’의 효과를 얻어야 합니다.
‘보통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좋은 정치가 아닙니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자기 가족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약간 찜찜한 채로 시키는 짓 한 것을 너무 엄하게 다스릴 필요 없습니다. 지나친 욕심을 가지고 시키지도 않는 짓을 찾아 저지른 놈들만 잡아내도 혼낼 놈들 얼마든지 많습니다.
탁월한 도덕가도 아니고 형편없는 패륜아도 아닌 보통사람들, 심지가 약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을 포용해 주면 과거의 행적에서 반성할 점은 반성하며 더 훌륭한 역할을 맡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견디기 힘든 비판에 직면하면 이를 악물고 눈을 흘기며 더 나쁜 길로 찾아갈 수 있습니다. 내 도덕적 기준을 남에게 강요하기보다 이 사회를 위해 어떤 기준이 바람직한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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