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조선임시위원단이 결국 굴복하기까지

 

1948510일 총선거로 대한민국 건국과정이 본궤도에 들어섰다. 19471114일 유엔총회 의결은 남북 총선거를 규정했는데, 이북 지역에는 시행할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1948226일 유엔소총회에서 남조선에만 선거를 실시하고 남조선에 조선 전체를 위한 정부를 수립할것을 결의했다. 상급기구인 총회의 결정 일부를 바꾸는 이 결의에는 재석 3분의 2 찬성이 필요했다. 뒤이어 유엔임시조선위원단이 소총회 결의에 따를 것을 결정한 후 510일 총선거가 계획, 추진되었다.

이 선거로 뽑힌 의원들로 구성된 국회가 헌법과 정부조직법 등 기본 법령을 제정하고 대통령과 부통령을 선출함으로써 건국과정이 진행되도록 되어 있었다. 총선거 다음의 수순은 국회 개원이었다. 미군정 기구인 국회선거위원회가 “510일에 선거된 국회의원의 최초의 집회를 단기 4281531일 상오 10시에 국회의사당에서행할 것을 525일에 공고했다.

미군정은 군정기간이 3년을 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가을의 유엔총회에서 새 정부의 인준을 받기 위해 815일까지 정권 이양을 끝낼 목표를 세웠다. 그래서 국회 개원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여기에 유엔위원단과 관련된 문제가 있었다. 위원단은 선거 직후 상하이로 가서 총선거에 대한 평가를 한 다음 66일에 돌아올 예정이었다.

미국은 소련이 동의하지 않는 건국과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유엔의 권위를 빌리고 있었다. 유엔위원단은 선거가 제대로 시행되었는지 여부에 대한 의견을 총회에 제출할 책임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위원단이 보고서를 아직 작성하지 않은 시점에서 서둘러 국회를 개원한 데는 국회의 존재를 기정사실로 만들어 위원단의 부정적 평가를 어렵게 만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원단이 67일 서울에 돌아온 뒤에도 오랫동안 선거 평가에 관해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625일에야 선거의 정당성을 인정한다는 발표를 했다. 보름 넘게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것은 부정적 의견이 우세하다는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이승만이 621일 미국인 심복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위원단의 부정적 분위기를 걱정하고 있었다.

중국, 필리핀과 엘살바도르에 대한 신뢰는 이 편지에서도 확고했다. 미국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따를 나라들이었다. 시리아,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프랑스의 네 나라는 미국의 대 조선 정책에 대해 회의적이거나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 일이 있었다. 이승만이 가장 걱정한 것은 인도였다. 분단건국 방침을 지지해주던 인도가 태도를 바꿨다는 것이었다. 로비 약발이 다했던 것일까, 아니면 5-10선거 분위기가 정말 너무 심했던 것일까?

위원단 대표들은 자기네가 서울에 없는 동안 미군정이 일방적으로 국회를 개원한 것이 불쾌했을 것이다. 선거 분위기에 대한 부정적 의견도 많았다. 그러나 막상 부결 판결을 내리는 데는 큰 부담이 따랐다. 5-10선거의 정당성을 부결하고 나면 그 뒤에 어떤 조치를 위원단이 취할 수 있는가? 상황을 바꿀 만한 뾰족한 대책 없이 이미 치른 선거를 무효로 돌린다면, 만족할 만한 재선거를 치를 방도가 무엇이 있는가?

5-10선거에 불만을 가진 대표들에게 대안으로 생각할 만한 길은 남북협상뿐이었다. 협상을 통해 남북총선거를 시행할 수 있다면 훨씬 더 만족스러운 결과를 바라볼 수 있었다. 5-10선거에 대한 판결을 몇 주일 동안 늦춘 것은 남북협상의 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포기하자 주어진 현실조건 위에서는 5-10선거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이남 단독선거에 완강하게 반대해 온 오스트레일리아대표 잭슨은 공식발표 며칠 전 기자에게 이렇게 심경을 밝혔다.

 

본인이 조선에 와서 제2분과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각계의 조선인과 협의한 결과 소총회에서의 제1대안 즉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가 조선인을 위하여 현명한 것이라고는 인정할 수 없었으므로 호주는 제2대안 즉 협의체를 위한 대안을 제출하여 이 제1대안에 반대하였으며 캐나다 역시 반대하였고 시리아는 기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제1대안이 소총회에서 채택이 되고 또한 이것을 위원단도 채택하였던 것이다.

본인도 그간 선거준비의 경위를 관찰한 결과 선거를 감시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 전의 상태를 고려치 않고 단지 5·10선거 그것만을 볼 때 그 선거는 비교적 잘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유엔위원단의 승인이 떨어지자 국회의 건국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헌법 제정이 우선 가장 큰 일이었다. 의원 30명으로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가 구성된 것이 63일의 일이었는데 보름 남짓 짧은 기간에 초안을 작성할 수 있었던 것은 준비작업이 많이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전문위원으로 위촉된 유진오를 중심으로 준비되어 있던 헌법안에 약간의 수정을 가한 초안이 기초위원회에서 채택되었다.

 

한민당을 야당으로 만든 이승만의 권력독점욕

 

기초위원회의 초안 심의과정에서 세력 간 역학관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당시 국회에는 세 개의 큰 세력이 있었다. 하나는 이승만에 대한 충성을 앞세우는 독촉 계열. 충성경쟁에 나선 인물들의 느슨한 집합체였다. 또 하나는 한민당. 이 두 세력이 남한 단독건국 내지 분단건국 추진에 힘을 합쳐 왔다.

또 하나의 세력이 무소속구락부를 이룬다. 200명 의원 중 80여 명이 무소속출마자였고 그중 60명가량이 무소속구락부에 참여하게 된다. 한독당과 중도우익 정당들이 5-10선거를 보이콧했기 때문에 이승만 반대세력이 국회에 많이 진출하지 못했는데, 무소속구락부 의원들은 이승만에게 동조하지 않는 경향을 보였다.

이승만과 한민당의 협력이 계속되는 한 국회 내에서는 아무런 장애도 없게 되었다. 그런데 공동의 적을 따돌리고 나자 두 세력 사이에 지분싸움이 시작되었다. 헌법초안 심의과정에서 이승만의 대통령책임제 고집으로 인해 본격적인 첫 갈등이 드러났다.

내각책임제로 되어 있던 유진오의 초안에 대해 기초위원회에서도 이론이 없었다. 그런데 심의가 끝나가는 615일 이승만이 참가 자격 없는 기초위원회에 임석해서 대통령책임제를 역설했다. 그런데도 기초위원회가 초안 수정을 거부한 것은 한민당의 당론 때문이었다. 이승만과의 권력 분점을 제도적으로 분명히 하고 싶었던 한민당이 권력을 독점하려는 이승만과 충돌한 것이니, 이것이 대한민국 제1야당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기초위원회는 본회의에 제출할 헌법 초안을 619일에 완성했다. 21일 본회의에 제출할 예정이었으나 이승만이 의장 직권을 이용해 제출을 이틀 늦췄다. 23일 제출된 헌법초안은 대통령책임제로 수정되어 있었다. 며칠 사이에 이승만이 한민당을 회유하기 위해 어떤 수단을 썼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이북에서도 헌법 제정과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남에 비해 훨씬 차분한 진행이었다. 194711월 유엔총회의 조선 결의안 채택 직후 인민회의 제3차 회의에서 헌법 제정 방침을 정하고 31인의 헌법제정위원회를 설치했다. 제정위원회가 준비한 초안에 19482월 인민회의 제4차 회의에 제출되자 초안 형태로 공표되고, ‘전 인민 토의를 통해 수정한 헌법안이 429일 인민회의 특별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710일 인민회의 제5차 회의에서 헌법을 공포하고 825일 이 헌법에 의거한 총선거를 치른 다음 이 선거로 구성된 최고인민회의가 98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을 다시 공포하기에 이른다.

이남의 헌법 제정과정에서 아쉬운 대목의 하나가 626일 국회 본회의에서 33인 의원이 헌법 채택에 3분의 2 찬성을 요건으로 하도록 내놓은 동의안이 부결된 일이다. 대통령-부통령 선출은 3분의 2 찬성을 요건으로 하면서 헌법 채택을 단순과반수로 한 것은 헌법의 권위를 스스로 부정한 셈이다. 더구나 정원 3백 석의 국회에 2백 명만 채워놓고 단순과반수로 통과시켰다는 데는 법리적으로도 의문이 남는다. 이북의 경우 429일 인민회의에서 헌법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된 것은 준비과정이 충실했기 때문이다. 아직 훗날과 같은 공포분위기가 자리 잡기 전이었다. 아무도 감히 반대하지 못한 것은 두 달 간의 전 인민 토의를 통해 수렴된 인민의 총의를 거스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헌법안의 빠른 통과를 위해 의장 직권을 마구 휘둘렀다. 대통령책임제 하나를 확보해놓은 이상 다른 조항은 아무래도 좋다는 식이었다. 치밀한 심의를 주장하는 의원들을 건국 작업을 방해하는 비애국자로 비난하기도 했다. 이북에 비해 이남의 헌법이 잦은 개정을 보게 되는 일차적 원인은 정치의 불안정에 있는 것이거니와, 제정과정의 졸속성에도 얼마간의 이유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부결될 국무총리 후보를 이승만이 내놓은 까닭

 

717일 헌법이 공포된 후 정부 조직에 들어가 첫 번째 일은 720일 대통령과 부통령의 선출이었다. 이승만이 대통령 되는 것은 이미 정해진 일이었다. 독촉은 물론이고 한민당도 이승만 대통령을 원했으니 국회의 3분의 2를 확보한 이승만에게 경쟁자가 있을 수 없었다. 얼마 전 서재필을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찻잔 속의 태풍에 그쳤다.

헌법과 함께 준비된 정부조직법에는 부통령의 권한이 아주 작게 되어 있었다. 이승만은 부통령으로 임시정부 원로 이시영을 밀었다. 대한제국 고관을 지내고 형제들과 함께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키워낸 이시영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독립운동의 큰 공로자였다. 그런 인물의 참여는 새 정부의 위신에 큰 보탬인데, 담백한 성품과 고령(80) 때문에 이승만의 권력에 도전할 위험이 없는 사람이었다.

부통령 선거는 1차 투표에서 3분의 2 득표에 미달했기 때문에 2차 투표까지 갔다. 정부 불참여의 뜻을 밝힌 김구가 1차에서 65, 2차에서 62표를 받았다. 무소속 의원들이 김구에게 투표한 것은 이시영을 반대해서가 아니라 이승만을 견제할 필요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민당은 대통령-부통령까지는 이승만의 구상에 따랐다. 그 대신 한민당이 바란 것은 국무총리 자리였다. 막강한 자금력을 가진 한민당은 국회를 자기네 권력의 거점으로 삼으려 했다. 헌법 심의과정에서 대통령의 국무총리 임명에 국회의 동의가 필요하도록 초안을 수정하는 데 한민당이 힘을 쏟은 것은 국무총리 자리를 통해 자기네 입지를 확보하려는 뜻이었다.

이승만과 한민당 사이의 갈등은 대통령중심제로의 초안 수정과정에서 드러난 바 있다. 그때는 한민당이 물러섰는데, 국무총리 자리를 놓고는 갈등이 고착되고 한민당이 야당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국무총리 임명 동의안을 처리하기로 예정된 727일까지 이승만은 후보를 밝히지 않았다. 세간에서는 국회의 3개 정파가 미는 3명의 인물이 유력 후보로 거론되고 있었다. 그중 독촉의 신익희는 이승만이 비운 국회의장 자리를 물려받을 참이었으므로 무소속이 미는 조소앙과 한민당이 미는 김성수 사이의 선택으로 보였다. 어느 쪽을 지명하든 3개 정파 중 2개의 지지를 받을 것이므로 국회 동의가 무난할 것이었다. 김성수를 택한다면 한민당과 이승만의 합작이 계속되고 조소앙을 택한다면 새 정부가 민족주의 성격을 분명히 하는 갈림길이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엉뚱한 인물을 지명했고, 화가 난 의원들은 토론도 생략하고 바로 표결에 부쳐 간단히 부결시켜버렸다. 이승만이 지명한 이윤영은 평안도에서 월남한 기독교 목사로 조선민주당 부당수라는 타이틀을 가졌을 뿐, 정치적 기반이 전혀 없는 인물이었다. 5-10선거에서 김성수가 월남민에 대한 상징적 배려로 지역구를 양보하고 한민당의 힘으로 지원해서 당선시켜준 사람인데, 이제 김성수를 앉히기를 한민당이 바라는 국무총리 자리에 그를 지명한다니 완전히 한민당을 약 올리는 선택이었다.

이승만의 두 번째 지명은 이범석이었고, 그가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가 된다. 만약 이범석이 첫째 지명자였다면 국회 동의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광복군 간부였던 이범석은 귀국 후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조선민족청년단을 키워왔다. 정치권 밖에서 독자세력을 만들어온 그에 대해 한민당도 무소속 의원들도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두 번째 지명까지 부결시킨다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한민당이 적극적 반대에 나서지 못했고, 초대 국무총리가 된 이범석의 족청세력은 이승만의 초기 독재체제 구축을 도와주게 된다.

이승만은 이윤영을 지명할 때 독촉 계열에도 미리 알리지 않았다. 일부러 부결을 유도한 것으로 보인다. 왜 그런 무리수를 뒀을까? 그 뒤의 일을 보면 국무총리직 자체를 왜소하게 만들려는 뜻으로 해석된다. 대통령과 협력하는 국무총리가 아니라 대통령을 받드는 국무총리를 그는 원한 것이다. 이승만 독재체제를 완성한 195411월의 ‘45입 개헌에서 이승만은 국무총리 자리를 없애버린다.

 

경찰국가의 내무부장관 자리를 향한 각축전

 

대통령, 부통령, 국무총리가 결정된 이제 남은 것은 내각 구성을 위한 장관 임명이었다. 여기서 초점이 된 문제는 누가 경찰을 장악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미군정 3년 동안 권력의 근거로서 경찰의 역할이 엄청나게 커졌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하는데, 남조선에서 총을 휘두른 가장 큰 조직이 경찰이었고, 이승만의 정권도 경찰에 의지할 것이 분명했다.

정부조직법 제정 과정에서 경찰을 독립된 정부 부서로 만들자는 주장도 있었지만 결국 내무부 밑의 치안국이 경찰을 관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내무부장관 자리가 주목을 끌게 되었다.

미군정 하의 경찰 총수는 조병옥이었는데, 그에 버금가는 장악력을 확보한 인물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이 있었다. 미군정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충성을 보인 두 사람 중 하나를 이승만이 확보할 수 있다면 경찰력 활용에 좋은 조건이 될 수 있었다.

단독건국 작업이 궤도에 오르면서 조병옥과 장택상 사이에 암투가 시작된다. 6월 중순 장택상의 고위 심복 두 사람이 비리 혐의로 조병옥 휘하 경무부 수사국의 조사를 받으면서 갈등이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장택상은 기자회견에서 조병옥에 대한 인신공격성비판을 포함한 격앙된 반응을 보였고, 수사국 부국장이 장택상의 회견 내용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조병옥의 장택상에 대한 진짜 공격은 한 달 후에 터져 나왔다. 장택상의 핵심 심복들이 반년 전 피의자를 고문살해하고 시체를 유기한 일을 726일에 수사국에서 공표한 것이다.

사건 당시에는 일 저지른 수도청 간부들이 경무부 간부들에게까지 이 일을 감추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했을 것 같다.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조-장 두 사람이 경쟁관계에 놓이게 되면서 조병옥이 장택상에게 타격을 가하기 위해 터뜨린 것으로 생각된다. 이 폭로의 시점이 조각 인선이 진행되고 있던 시점이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82일 이범석이 국회에서 총리 인준을 받은 직후 조각 내용이 발표되었다. 내무부장관에는 윤치영이 기용되었고 장택상은 외무부장관으로 낙점 받았다. 이승만의 개인비서로 지목바던 윤치영이 원래 바란 자리는 외무부였는데, 고문치사 사건 때문에 장택상을 도저히 내무부에 앉힐 수가 없어서 맞바꾼 것으로 보인다. 조병옥보다 장택상을 선택한 이승만의 뜻은 분명히 나타났다. 한민당을 배경으로 가진 조병옥보다 자신에게 전적으로 의지할 장택상이 이승만에게는 편리했던 것이다.

84일자 <경향신문>만약 이 대통령이 부통령의 의사를 무시하고 기어코 장모 씨로 내무장관을 임명하게 될 때는 이 부통령은 사임이라도 할 강경한 태도로 나아갈 것으로 관측된다는 기사가 나왔다. 이 관측은 바로 그 날 저녁에 현실로 나타났다. 저녁 무렵 이승만이 이시영 저택으로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한 것이다. 이시영은 그때 수원에 가 있었다.

이시영은 89일 서울로 돌아와 기자들에게 휴식을 위해 시골에 갔을 뿐, “내 언동으로 돕지는 못하나마 파괴 같은 것은 하여서는 안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사임을 심각하게 고려했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했다. 그가 수원에 있는 동안 대법원장 김병로, 체신부장관 윤석구, 국회의장 신익희가 그를 찾아갔고 국무총리 이범석도 비서를 보내 이시영 곁에서 자고 오게 했다.

정부조직법에 장관 선임은 대통령이 국무총리와 의논하게 되어 있다. 부통령의 역할은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정부를 함께 이끄는 부통령이 이 사람은 도저히 안 된다고 하는 경우는 대통령이 존중해줘야 할 것 아닌가. 84일 이승만의 이시영 저택 방문 시도는 함께 당선된 후 처음이었다. 이시영의 결의가 굳은 것을 알고야 황급히 쫓아간 것이다.

내무부장관에 임명된 윤치영이 경찰 지휘권 이양을 둘러싸고 조병옥과 갈등을 빚고 국무회의에서 민족반역자로 지탄해 소동을 일으키기까지 한 데는 조병옥에 대한 이승만의 적대적 태도가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 사람은 타협했다. 812일 신문에 조병옥이 구미 방면 대통령 특사로 임명된 사실과 경무부 수사국 국장과 부국장의 사표를 수리한 사실이 나란히 보도된 것이다.

지휘권 이양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최고위 간부들의 사표를 받고 새 정부의 위신을 손상케 한 데 대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진사(陳謝)’까지 했다니 특사자리가 얼마나 큰 떡이었기에? 미군정을 지내는 동안 조병옥은 미국의 힘을 누구보다 깊이 실감했을 것이다. 그 시점에서의 특사 자격 미국 방문이 큰 정치적 자산이 될 것이라고 그는 내다보았을 것이고, 그 전망은 적중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당시 여론도 대한민국 첫 조각 내용을 놓고 비서내각이니 비서정치니 조롱이 들끓었다. 조선이 망국에 이르는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진 문제였던 권력의 사유화’. 대한민국은 이승만의 권력 사유화 의지에 떠밀리면서 세상에 나서고 있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