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공산권의 붕괴와 소련의 해체가 북한에 심각한 위기를 가져왔다는 사실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당연한 일이었다. 이 위기에는 군사적 측면과 경제적 측면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동맹국들이 사라지거나 극도로 위축되어 있는 상황에서 수십 년간 계속되어 온 미국과 남한의 위협 앞에 아무 보호막 없이 노출되었다. 그리고 미국과 남한이 전반적 위기를 이용해서 군사적 위협을 더 늘릴 위험도 있었다.
군사 위기보다 더 크고 다급한 위기가 경제 위기였다. 군사 위기가 현실화하는 데는 적대국의 의지도 필요하고 도발의 계기도 필요했다. 반면 경제 위기는 내재해 있는 것이었다. 공산권 내의 협력체제가 사라져버린 이제, 북한경제는 누가 건드리지 않아도 저절로 무너질 위험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이 주도하는 봉쇄정책이 구원의 손길조차 가로막고 있었다. 중국이 거의 유일한 북한의 교역 상대였지만 이 무렵에는 중국도 아직 힘이 약한데다가 1989년 톈안먼 사태 이후 위축된 상태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위기의 존재 때문에 정보의 봉쇄가 더욱 심했다. 위기 상황이 미국과 남한에 알려질 경우 이를 이용해 북한의 붕괴를 촉진하는 정책에 유혹을 받을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일부 세력과 남한의 김영삼 정권이 추구한 노선을 보면 타당한 두려움이었다. 그 때문에 북한의 실제 상황을 파악하기 힘든 사정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지만, 그 동안 벌어진 일들을 놓고 1990년대 북한의 상황을 당시보다는 넓고 깊게 살펴볼 수 있다.
예컨대 1991년 이후 북한의 개방정책 지향이 생존을 위한 절박한 필요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이 지금까지는 분명해졌다. 그 절박한 수준으로 볼 때 핵사업을 진심으로 억제할 방침이었다는 사실도 충분히 짐작이 간다. 북한의 개방정책에 제동을 건 것은 미국의 부시 정권이었고, 클린턴 정권은 북한의 개방을 유도하는 쪽으로 정책을 펼쳤지만 공화당의 반대와 남한의 비협조로 인해 정책의 효과를 빨리 거둘 수 없었다.
김영삼이 집권한 1993~1997년 5년간 북한을 둘러싼 국제정세 중 가장 두드러진 사실은 남한의 역할이 극히 작았다는 것이다. 그 앞 노태우 정권의 ‘북방정책’은 철학적 근거가 충실하지 못한 아쉬움은 있어도 전략적 타당성은 갖춘 것이었다. 그래서 북한을 둘러싼 정세 변화를 주도적으로 이끌지는 않았더라도 변화에 적응하는 데는 모자람이 없었다. 반면 김영삼 정권 동안 남한은 변화를 가로막는 역할을 맡았다. 남한의 경제 발전에도 평화 증진에도 불리한 결과를 자초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전략 차원에서도 평가를 받을 가치가 없다.
1998년 초 김대중의 집권은 남북관계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계기였다. 변화의 출발점은 5년 전의 상황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기본합의서를 이끌어낸 고위급회담의 최고급 실무담당자라 할 수 있는 임동원의 외교안보수석 기용은 남북대화 재개 의지를 북쪽에 알리는 신호였다.
이 신호를 북쪽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당시 북한의 상황부터 더듬어본다.
1990년대 중반에 북한이 겪은 가장 큰 변화 두 가지는 경제난과 김일성 사망이었다. 건국 이래 최악의 경제난이 1998년 시점에 어떤 상황에 와 있었는지는 아직도 정확한 판단이 어렵다. 아직 위기상황을 아주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급한 불은 꺼놓은 상태가 아니었을까 막연히 추측해본다.
경제난보다 더 절박한 것이 리더십 문제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북한 건국을 주도하고 한국전쟁 후 40년간 절대권력을 구사하며 유일지도체계를 이끌어온 김일성의 부재가 어떤 문제를 일으켰을까? 절대적 지도자가 사라질 때 집단지도체제가 일시적으로라도 나타나는 것이 보통인데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유일지도체계를 이어받았다. 30대 초반에 후계자로 지목되어 20년간 준비를 해온 김정일이 온몸으로 북한을 대표하던 김일성이 비운 자리를 채울 수 있었을까?
김일성 사망 후 3년 반이 지난 1998년 초까지 북한의 권력승계는 파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백학순은 이 과정에서 김정일이 “일종의 여유를 부린 것”으로 관찰하기까지 했다.
김일성 사망 당시 북한은 소련 등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어 있었고, 북핵문제와 미사일문제로 미국, 남한 등과 생사를 건 싸움 중에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는 전대미문의 식량난을 겪는 등 총체적인 위기에 처해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아, 이러한 위기상황은 권력교체와 권력승계에서 불안정성을 확대할 수 있는 요소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 사망 후 김정일은 후대 수령으로서 큰 어려움 없이 예정대로 권력 승계를 마쳤다. 이는 현실적으로 ‘수령제’의 권력이양과 권력승계의 ‘안정성’을 증명했다. 더구나 형식적으로 김정일은 김일성 사후 즉시 당 총비서를 승계하지 않고 3년상을 치른 다음에야 총비서가 되고, 또 헌법 개정을 한 후에야 국방위원장에 취임했다. 전대미문의 위기의 상황에서 일종의 여유를 부린 것이다. 수령제가 유일체제로서 유연성과 융통성이 부족한 수직적 위계질서의 권력구조를 갖고 있었지만, 대내외적 위기 속에서 권력승계를 하는 데 ‘정치적 안정성’을 담보하는 데는 유리한 점이 있었고 또 성공했던 것이다.(<북한 권력의 역사>(한울 펴냄) 683-684쪽)
정말로 여유를 부릴 여지야 있었겠는가. 수직적 위계질서에 생래적으로 부족하게 마련인 유연성과 융통성을 늘리기 위해 애를 쓴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당을 장악하는 총비서 자리를 2년간 방치했을 뿐 아니라 1998년의 헌법 개정에서도 ‘수령’ 자리를 “영원한 수령” 김일성에게 안겨 보내고 김정일 자신은 취하지 않았다. 김일성이 평생을 통해 키워놓은 자리를 그대로 물려받아 그 큰 자리를 억지로 채우려고 안간힘을 쓰기보다, 최고지도자로서 최소한의 자리만을 우선 물려받은 다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업적으로써 덩치를 키워나간다는 실용주의적 방법을 취한 것으로 이해된다.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할 일이 많은데, 너무 큰 감투를 너무 일찍 쓰고 앉았으면 하기 어려운 일도 많았을 것이다. 예컨대 1994년에서 1997년 사이에 김정일은 노동당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종종 쏟아냈다. 당 총비서를 맡고 있는 입장이라면 그런 표현은 어려웠을 것이다. 당과 행정부는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놓고 자신은 국방위원장, 총사령관으로서 군대만을 확고히 장악한 입장에서 ‘객관적’ 비판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1996년 12월 7일 김정일이 김일성종합대학 개교 50주년 기념식에서 행한 연설 원고를 황장엽이 후에 갖고 와서 <월간조선>에 공개한 일이 있다. 자신의 책임 범위를 제한적으로 본 김정일의 관점을 담은 이 연설에 대해 돈 오버도퍼는 이렇게 말했다.
김정일은 그 연설에서 “현재 제일 긴급하게 풀어야할 과제는 식량문제다. 그로 인해 무정부 상태가 조성되고 있다.”고 말하면서 북한이 직면한 어려움을 어느 정도 시인했다. 또한 김정일은 “도처에서 ‘가슴 아픈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만 거리에 나와 식료품을 팔고 행상을 하는 사람들의 행동은 크게 잘못된 것”이라며 맹렬히 비난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이렇게 농민 시장과 장사꾼이 번성하게 되면 사람들 속에 이기주의가 조장돼 당의 계급진지가 무너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당이 대중적 기반을 잃고 녹아날 수 있다. 이것은 그전에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이 잘 말해주고 있다.”
김정일은 북한의 경제난을 자신의 책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경제 지도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던 김일성이 그에게 “경제 사업에 말려들면 당 사업도 못하고 군대 사업도 할 수 없다고 여러 번 당부했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자신의 과업이 너무 중대하기 때문에 경제 문제를 돌볼 수만은 없다는 뜻이다. “내가 경제 실무 사업까지 맡아보면 혁명과 건설에 돌이킬 수 없는 후과를 미칠 수 있다. (...) 인민들이 현재 당 중앙위원회 명령을 무조건 따르고 있는 것은 나의 권위 때문이지 당 조직과 일꾼들이 사업을 잘 해서가 아니다. (...) 나를 똑똑히 도와주는 일꾼이 없다. 나는 단신으로 일하고 있다.” (<두 개의 한국> 571-572쪽)
극한적인 경제난 앞에서 경제 사업을 돌아보지 못할 만큼 중요한 김정일의 과업이 무엇이었나? 체제의 뼈대를 지키는 일이었다. 수백만 인민이 굶어죽거나 국경을 넘어가는 상황을 남에게 미루면서 최고지도자가 다른 일에 매달려야 한다니, 북한의 싹수를 가급적 좋게 해석하려고 애쓰는 나로서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이 입장은 김정일 혼자의 판단으로 취한 것이 아니라 김일성이 당부한 것이라 하니, 김정일의 성격 문제보다는 북한체제의 성격 문제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만사 제쳐놓고 지켜야 할 체제의 뼈대가 과연 무엇이었던가? 이것이 ‘군대’였다는 사실에서 북한 지도부의 위기의식이 극도로 심각했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인민 전체를 제대로 돌볼 여유가 없는 위기상황이라면 지켜야 할 뼈대로 당을 챙기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당도 아니고 군대만 붙잡고 있었다니, 문자 그대로 ‘뼈대’만 지킨 셈이다. 굳이 비유한다면 인민은 살집이고 당은 근육이다. 살집만이 아니라 근육까지 놔두고 뼈대만 지킨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군(先軍)정치’는 후계과정의 보장에 필요한 장치였다.
김정일도 1990년에서 1992년에 걸쳐 노동당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는 사실을 백학순이 지적했다.
김정일은 1990년 10월에 “조선로동당은 우리 인민의 모든 승리의 조직자이며 향도자이다”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혁명과 건설에 대한 당의 영도적 역할”을 강조했다. 1991년 5월에는 전국당세포비서 강습회 참가자들에게 “당세포를 강화하자”는 서한을 보내 “모든 당세포를 충성의 세포로 만들자!”라는 혁명적 구호를 제시했다. 또 1992년 10월 10일 조선로동당 창건 47주년에 즈음하여 “혁명적 당건설의 근본문제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김정일은 “당의 령도가 곧 사회주의 위업의 생명선”이며 “혁명적 건설과 성패는 당을 얼마나 튼튼히 꾸리고 당의 령도적 역할을 어떻게 높이는가 하는 데 달려” 있음을 강조했다.(<북한 권력의 역사> 687쪽)
그러나 이 무렵 후계가 임박한 김정일에게는 군을 통솔하고 지휘하는 권한이 집중적으로 넘겨졌다. 1991년 12월 인민군 최고사령관이 되었고 이듬해 4월 ‘원수’로 승진했다. 그리고 1993년 4월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었다. 개방정책 추진이 여의치 않게 되어 극한적 위기상황을 내다보면서 체제 장악력을 최소한의 범위에 집중시킨 것으로 해석된다.
선군정치의 공식 출범은 1995년 1월 1일로 선전되어 왔다. 김일성 사후 첫 정초인 이 날 금수산기념궁전(김일성 묘소) 참배 후 다박솔중대 지도방문 중 “선군의 기치를 높이 추켜들고 총대에 의거하여 주체의 사회주의 위업을 끝까지 완성”하겠다는 ‘말씀’이 있었다는 것이다. (같은 책 691쪽)
그런데 김정일의 ‘선군혁명’ 영도가 1969년 1월 조선로동당 인민군당위원회 제4기 4차 전원회의 확대회의에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2009년 1월 조선로동당 력사연구소가 펴낸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선군혁명사>라는 책자도 김정일의 후계준비 기간을 인민군 당위원회 제4기 4차 전원회의 확대회의가 개최된 1969년 1월부터 김일성이 사망한 1994년 7월까지로 구분했다. 이 출판을 보도한 <조선중앙통신>은 김일성 일대기가 “선군혁명영도의 역사라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우리 당의 선군정치의 뿌리가 얼마나 깊고 억센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조선중앙통신>은 이 책이 총 8개 장 44개 절로 이뤄져 있는데, 제1, 2장에서는 1926년 6월부터 1945년 8월까지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서술했으며, 이 기간에 김일성이 “선군혁명 위업을 개척하고 총대에 의거하여 항일혁명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설명했다. 1969년 1월부터 1994년 7월까지를 다룬 제7, 8장에서는 김일성이 “선군위업 계승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했다고 서술하면서, 그가 “전당, 전군, 전민의 한결같은 염원과 일치한 의사를 헤아리고 조선의 군대와 인민이 경애하는 김정일동지를 주체혁명 위업의 후계자로 추대하는 역사적 위업을 훌륭히 이룩하도록 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같은 책 692쪽)
1969년 1월의 회의는 인민군에서 군벌주의를 청산하고 유일사상체계를 확립한 회의였고 김정일이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1995년 선군정치 출범 이후 ‘선군’ 이념의 연원이 깊고 김정일의 후계자 입장이 확고했음을 강조하기 위해 이런 이야기가 부각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김정일의 후계 과정은 1998년 중에 일단락된 것으로 보인다. 당 총비서에 취임하고, 헌법을 개정하고, 강성대국을 선포하는 일이 이어졌다. 후계 과정이 일단락되었다는 것은 ‘고난의 행군’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1998년 남한의 대북관계에 대한 태도 변화에 임해 북한도 이에 호응할 태세가 안정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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