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230년에 한(韓)나라를 합병하고부터 BC 221년에 제(齊)나라를 멸망시키기까지 진(秦)나라는 불과 10년 동안에 6국을 무너뜨리고 천하를 통일했다. BC 333년에 소진(蘇秦)의 합종책(合從策)이 성립한 때로부터 백여 년간 지속되던 진나라와 6국의 대립이 끝내 기울기 시작하자 숨 돌릴 틈도 없이 6국의 연이은 패망으로 종결된 것이다.
  
  통일을 이룩한 진나라는 폭넓은 통일정책을 시행했다. 정치적, 군사적 통일은 말할 것도 없고, 도량형과 화폐를 통일하는 경제적 통일에서 문자의 통일과 분서갱유로 상징되는 문화적 통일에 이르기까지 진나라의 통일정책은 가히 완벽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강고한 통일제국의 붕괴는 그 성립보다도 더 신속한 것이었다. 통일을 이룬 지 11년만에(BC 210) 시황(始皇)이 죽자 바로 그 이듬해에 반란이 터져나오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3년만에(BC 206) 시황의 손자가 유방(劉邦)의 군대에 항복함으로써 진나라의 명운이 끝나고 말았다.
  
  그로부터 70여 년 후 서악(徐樂)이라는 선비가 한(漢) 무제(武帝)에게 글을 올려 진나라의 멸망을 토붕(土崩)의 형세로 논했다. 이런 글이었다.
  
  “어떠한 것을 토붕이라 하느냐 하면 진나라의 말세가 그러한 경우입니다. (첫 반란을 일으킨) 진섭(陳涉)은 천승(千乘) 제후의 높은 신분도 아니었고 조그만 땅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 그런 그가 궁벽한 동네에서 몸을 일으켜 창을 휘두르고 소매를 내저으며 크게 외치자 사람들이 바람에 휩쓸리듯 하였습니다.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백성이 괴로운데 임금이 살피지 않고, 아랫사람이 원망하는데 윗사람이 이를 모르며, 풍속이 어지러워지는데 정치가 이를 바로잡지 못했으니, 이 세 가지가 진섭에게 힘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사회의 기반이 무너지는 총체적 난국을 서악은 토붕이라 불렀던 것이다. 이와 대비해 와해(瓦解)라는 것은 유력자들이 이해득실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것으로, 제후들의 반란이 겉보기에는 천하가 뒤집히듯 요란하지만, 사회의 기반이 무너지지 않는 한 쉽게 극복되는 것이라 논하며 기본에 충실한 정치를 황제에게 권했다.
  
  다시 멸망을 앞둔 진나라로 돌아가 보자. 시황이 죽을 무렵 진나라의 위세는 어떠한 도전도 용납하지 않는 완벽한 것이었다. 아이러니컬한 사실은 이 완벽한 위세가 바로 급속한 붕괴를 향한 결정적 조건이 되었다는 데 있다.
  
  시황의 입 노릇을 하던 환관 조고(趙高)가 시황의 죽음을 비밀로 한 채 승상 이사(李斯)를 설득해 시황의 큰 아들 부소(扶蘇)를 죽이고 작은 아들 호해(胡亥)를 2세 황제로 앉혔다. 진나라의 위세에 불안한 점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이사가 이런 정변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일로도 진나라의 위세가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권세를 지키고 키우기 위해 정변에 참여하라는 조고의 설득에 넘어갔을 것이다.
  
  2세 황제 즉위 후 조고와 이사는 철저한 공포정치를 행했다. 황제 즉위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 제기를 원천봉쇄하려는 것이었다. 종실과 대신을 마구잡이로 죽이고 그 집안까지 도륙내니 종실 한 사람은 집안을 몰살하지 말아 달라는 청원과 함께 자살을 허락해 달라고 빌기까지 했다. 이를 보고 조고는 황제에게 “신하들이 죽을까 두려워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는데, 어찌 변란을 꾀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치하했다 한다.
  
  토붕의 형세를 낳은 것은 자만심이었다. 당근을 쓸 필요 없이 채찍만으로 천하를 언제까지나 휘어잡을 수 있다고 진나라 권력자들은 믿었다. 그러자 반란의 싹은 더 잃을 것이 없는 하층민들로부터 터져나왔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는 대들어 보기나 하고 죽자는 것이 진섭의 반란이었다.
  
  한 번 반란의 싹이 터져나오자 그야말로 흙이 무너지는 것 같은 토붕의 형세가 드러났다. 진나라 체제의 빈틈을 본 각지의 호걸들이 꼬리를 물고 봉기했고, 이에 대항하던 진나라 관리와 장수들은 진나라에 돌아가도 처벌을 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앞을 다투어 반란군에 투항했다. 도둑은 늘어나고 막을 사람은 사라지는 형국이었으니 진나라의 붕괴는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반란이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 나가는 것을 본 이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정치를 수습하려 하였으나 조고의 모함에 빠져 멸족의 화를 입었다. 2세 황제를 추대한 불과 2년 후의 일이었다. 맹목적 권세욕에 빠진 조고는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일화를 남기고 이듬해 2세 황제까지 죽여 최고의 권력을 쥐었지만 이미 껍데기뿐인 권력이었다. 조고가 세운 다음 왕 자영(子嬰)은 곧 조고를 죽이고 불과 두 달 후 유방의 군에 항복했다.
  
  첩보소설의 대가 존 르 카레가 “미국은 미쳤다”며 미국의 호전적 대외정책에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것을 보며 진나라의 ‘토붕’이 생각난다. 당시의 진나라처럼 지금의 미국은 일체의 군사적 도전을 허용하지 않는 압도적 위세를 누리고 있다. 이 압도적 위세를 믿는 자만심 때문에 공포정치의 유혹을 받는다면 마찬가지 토붕의 형세가 걱정된다.
  
  유럽에서 20% 지지도 못 받는 이라크 공격이 미국에서는 80% 이상의 지지를 받는 것이 어떻게 된 일일까? 르 카레가 얘기하는 것처럼 부시 정부가 미국민을 심리적 공황사태로 몰고가고 있는 것일까?
  
  조고가 아무리 불칙한 마음을 품고 있어도 이사를 설득하지 못했다면 그만큼 뜻을 펴지 못했을 것이다. 평생 쌓아 온 천하통일의 공업을 무위로 돌릴 뿐 아니라 자신의 몸에 멸문의 화를 불러올 길로 이사를 몰아넣은 것은 어떤 욕심이고 어떤 두려움이었을까.
  
  백성이 괴로운데 임금이 살피지 않는 것, 아랫사람이 원망하는데 윗사람이 이를 모르는 것, 풍속이 어지러워지는데 정치가 이를 바로잡지 못하는 것이 토붕의 조건이라고 서악은 지적했다. 지금 세계경제가 불안한데도 미국은 전쟁만 바라보고 있으며, 맹방들이 납득하지 못하는데도 이라크 공격을 강행하려 하고 있으며, 테러리즘의 위협이 자라나는데도 더 큰 테러리즘을 일으킬 생각만 하고 있다.
  
  힘없는 자는 힘있는 자에게 의지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힘있는 자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남을 괴롭히는 일에만 그 힘을 쓰려 한다면 사람들은 믿고 의지할 데가 없게 된다. 믿고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들은 세상이 바뀌는 것밖에 바라지 않게 된다. 그것이 토붕의 원리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