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공위의 파탄을 향한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음을 8월 8일자 일기에서 지적했다. ‘불합의’ 사항에 대한 미국 대표의 일방적 발표가 7월 16일에 나오자 소련 대표의 반박이 닷새 후에 나왔다. 그런데 8월 1일 미국 대표의 재차 발표에 대해서는 바로 다음날 소련 대표의 반박이 나왔다. 그리고 8월 8일 ‘임협 서한’에 관한 미국 대표의 성명이 나오자 이튿날 소련 대표의 반박 성명이 나오고, 미국 대표의 성명이 또 하나 나왔다.
‘임협 서한’이란 임정수립대책위원회가 미-소 대표 앞으로 7월 28일 보낸 편지다. 임협은 반탁진영 중 미소공위 참가를 신청한 정당-단체들의 연합회였다. 한민당 등 15개 단체 연명의 이 편지의 핵심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반탁투쟁위원회는 6월 초순에 산하단체의 공위 참가여부 문제를 토의하기 위하여 대표자대회를 개최하였는데 그 문제에 대한 단체 간의 합의를 보지 못할 것이 분명하여지매 공위 협의여부는 산하 각 단체의 자유결정에 일임하기로 하는 동시에 참가단체와 불참가단체 간에 적극반대가 있어서는 아니될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공위협의에 참가한 단체는 소위 6월 23일 시위행렬에 하등 관여한 사실이 없습니다. 반탁투쟁위원회의 회원인 동시에 공위협의에 참가한 단체는 공위 제1단계의 업무인 임시정부 수립에 있어서 또한 임정 수립 후 그 제2단계의 업무인 원조안의 토의에 있어서 단체 각자의 정직한 의견을 발표함으로써 그리고 어떠한 방안이든지 만일 그 방안이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거나 또는 한국의 내정을 간섭하는 경우에는 정직한 반대의 의견을 표시함으로써 미소공동위원회와 협력하여야 한다는 의견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권리의 보류 이외에 우리 제 단체는 공위의 업무에 대하여 적극적 반대를 선동하는 일도 없고 장래에 선동할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공위와의 협의에 참가하는 각 단체 자신의 정책과 위반되는 까닭입니다.” (<동아일보> 1947년 8월 9일)
8월 5일 미소공위 회담에서 소련 대표는 편지를 보낸 임협 대표들을 회의장에 불러 면담할 것을 주장했고, 미국 대표는 이에 반대했다. 소련 대표는 편지 내용과 서명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었는데, 미국 대표는 구두협의 외에 조사를 위해 참가신청단체 대표를 부를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8월 9일 스티코프 소련 대표가 발표한 성명서는 앞부분에서 이 문제를 지적했다.
“15개의 정당 사회단체의 서한을 검토함에서 소련 측 대표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되었다. 그러므로 8월 5일 공위 회의에서 소련 측 대표는 반탁투쟁위원회에 가맹하고 이상에 지적한 서한에 서명한 15개의 정당 단체의 대표들을 1947년 8월 7일 공위 회의에 초청하여 그 서한을 검토함에서 발생되는 주요한 제 문제들의 해답을 듣자는 의견을 제의하였다. 이와 함께 지적한 제 정당 단체의 대표들을 共委 회의에 초청함으로써 만 1개월 동안 공위 회의에서 해결하지 못한 미정확한 문제등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소련 측 대표는 지적하였다. 그러나 미국 측 대표는 여사한 제 정당 단체의 대표에게 할 질문을 다만 그들이 공위 구두협의에 참가할 시에 할 수 있다고 언명하면서 소련대표의 의견을 거부하였다. 미국대표가 반탁투쟁위원회에 가맹하고 공위협의에 청원서를 제출한 제 정당 사회단체의 대표들을 공위 회의에 초청하려는 소련 측 대표의 제의를 강경히 거부함에 대하여 소련 측 대표는 이상하게 생각한다. 소련 측 대표의 의견은 결국 제 정당 사회단체의 명부작성에 관하여 해결하지 못한 중요문제들을 해결하려 함에서 제기된 것이다.”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7년 8월 10일)
성명서 뒷부분에서는 협의대상 단체 명부가 완성되기 전이라도 임시정부의 성격과 형태를 토론하는 공위 업무를 계속해 나가자는 소련 측 제안을 미국 측이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이후의 미국 측 성명에서 이 점에 대한 반박이 없는 것을 보아 이 지적은 사실로 보인다. 반탁투위 소속 단체 등 협의대상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 상황을 빌미로 미국 측이 회의 진전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브라운 미국 대표의 8월 9일 성명서는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이남 극우단체의 반탁운동이 미소공위 참가의 결격 사유가 아니라는 주장을 되풀이한 것이었다. 제2차 미소공위의 배경이 된 마셜-몰로토프 서한에 대해서는 “협의대상 청원서에 서명한 정당 및 사회단체의 대표자는 모스크바결의 혹은 미소 양국 중 1국에 대하여 적극적 반대를 조장 선동치 않는 이상 모스크바결의와 장래 정부수립 및 그 양자에 포함된 여하한 언구 사상에 관하여서도 공적으로 혹은 사적으로 자유로 의견을 발표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성명의 핵심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미국 측 위원은 어떠한 정당 혹은 사회단체가 반탁위원회 혹은 동 성질의 기관에 소속한 것이 공위 협의대상이 못되는 이유로는 보지 않는다. 정당 및 사회단체가 위원회를 조직하여 장래의 원조후원의 문제를 토의 검토하여 그 기관을 반탁위원회 혹은 유사한 명칭으로 부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위원회가 그 활동을 자유의사 발표에 국한하고 적극적 반대를 조장 선동하지 않는 한 그러한 위원회는 미소 양외상의 협정에 의하여 반대의견을 표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사실상 모스크바결의 제3항은 조선 민주임시정부와 조선 민주제기관과 협동하여 조선민족의 정치 경제 급 사회발전을 원조후원(신탁)하며 또한 민주 자주정부를 발달시키어 조선의 국가독립을 달성하는 방안을 강구하는 업무를 공동위원회에 위촉하였다. 모스크바결의 제3항의 요구에 의하여 공동위원회가 중대한 책임을 결정하며 해결할 때에 제하여 조선사람이 이 중대한 문제에 관하여 침묵을 지킨다면 어찌 공위에 대하여 원조가 되리라고 공위가 기대할 수 있겠느냐?”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7년 8월 10일)
과연 6월 23일의 반탁시위가 “모스크바결의 혹은 미소 양국 중 1국에 대하여 적극적 반대를 조장 선동”하지 않은 것이라고 브라운은 진심으로 믿고 있었을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태도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소련 측과의 대화를 단절하라는 확고한 지침에 따르는 것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억지를 쓸 수 있을까? 소련 측 주장은 참가를 신청한 단체가 반탁투위를 탈퇴하면 자격을 문제 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반탁운동 경력이 있는 단체를 원천적으로 거부하던 1년 전 자세에서 크게 물러선 것이었다. 이 점에서는 미소공위에 대한 미국 측의 무성의가 더할 수 없이 분명했다.
8월 12일 마셜 국무장관이 몰로토프 외상에게 보낸 편지가 오랫동안 이어지던 미국 대표단의 석연치 않은 태도를 석연하게 풀어준다.
“친애하는 몰로토프 씨, 귀하의 1947년 4월 19일부 서한에 ‘조선에 대한 모스크바협정 엄정실행을 기본’하여 서울에서 5월 20일에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할 것과 그 위원회의 성과를 1947년 7월이나 8월에 미소 양정부에 제출하여 심사케 하자는 것을 제안하셨습니다. 공동위원회 미국 측 대표의 보고에 의하면 양국 대표간의 합의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월여를 두고 모인 회의에 하등 물적 변화가 없으나 미국정부로서는 여기에 대하여 막대한 관심을 아니 가질 수 없습니다.
본관이 5월 2일부 서한에 귀하의 진술한 모스크바협정 엄정 실행을 기본하여 공동위원회는 과무를 수행하여야 하겠다는 데 대하여 본관은 앞으로 오해가 없게 하기 위하여 그 구절에 대한 해석을 명백히 한 바 있었음을 귀하는 기억하실 것입니다.
본관은 ‘조선 민주주의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자들은 공동위원회와 협조할 용의가 있는 한 자기네 국가의 앞으로 세워질 정부에 대한 과거에 가졌던 정견이나 의사발표로 말미암아 공동위원과의 협의에서 제외될 수가 없다는 미국정부의 초지일관하고 뚜렷한 방침을 적발 표시했습니다. 귀하의 5월 7일부 회신에도 이 미국방침에 대하여 예외를 삼지 않았습니다. 이 미국방침에 합치된 하지 중장의 1946년 12월 24일부 치스챠코프 장군에게 보낸 서한에 기하여 공동위원회를 개최하자고 귀하가 승낙한 바 있습니다.
이 미국의 방침을 수행하는데 있어 공동위원회 미국 측 대표는 조선 민주주의 정당과 사회단체의 최대범위의 협의와 그 협의에 참가할 때에는 전조선 국민의 의견 의사 자유발표에 아무러한 제한도 없어야 할 것을 주장해 왔습니다. 공동업무를 촉진시키기 위하여 미 측 대표는 구두협의는 1,000명 이하의 회원을 가진 정당과 단체가, 또는 소 측 대표로 가합한다는 수자를 제시하면 그런 정당과 단체만을 구두협의하자는 제안을 했으나 이 안 역시 소 측 대표가 거부한 것입니다.
조선독립에 대한 희망이 그렇게도 오래 천연된 이때에 조선국민에게 대한 정의감으로라도 미국정부는 이보다 더 천연할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본 정부는 1947년 8월 21일까지에 공동위원회가 그 회에서 진행된 성과를 보고하도록 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미소 각 정부는 독립 통일된 조선을 건설하여 열국의 일원으로 정당한 자리를 취하게 하자는 모스크바협정의 목적을 즉시 달성시킬 일층의 방도를 강구하자는 것입니다. 본관은 이 서한의 부본을 영국·중국정부에 제출합니다.” (<동아일보> 1947년 8월 15일)
지금까지 미-소 대표 사이의 논쟁은 미소공위 재개를 앞두고 양국 외무장관 사이의 합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문제에 매달려 있었다. 그런데 합의 당사자인 마셜이 소련 측이 합의를 어겼다고 손가락질하며 나선 것이다. 지난 봄 합의의 핵심은 참가 단체들이 기왕에 벌인 행동은 문제 삼지 않되, 참가 신청 이후의 미소공위 반대 활동을 삼가게 하는 데 있었다고 나는 기억한다. 그런데 마셜은 다르게 기억하는 모양이다. 본인이 아니라고 하는 데야 더 뭐라고 하겠는가.
편지를 보내면서 불과 9일 후까지 미소공위의 보고를 요구했고, 편지의 부본을 다른 연합국인 영국과 중국에도 보낸다고 했다. 1945년 12월의 3상회담 결정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겠다는 태세다. 전쟁 직후의 3상회담에서는 전쟁 수행의 주역으로서 소련의 역할이 존중받고 있었지만, 이제 다시 4개 연합국 외상이 모인다면 영국과 중국은 20개월 전에 비해 소련 입장을 많이 존중해줄 것 같지 않은 상황이 되어 있다.
이 편지가 미국 측에서는 최후통첩인 셈이었던 모양이다. 8월 14일 브라운은 기자회견에서 회담을 완전히 포기한 태도를 보였다.
공위 미측 수석대표 브라운 소장은 소측 수석대표 쉬티코프 대장에게 마 씨 서한에 의하여 공위가 5월 21일 재개 이후 현재까지 이르는 사이에 있어서의 공위 토의석상에서 제시되었던 제안 및 반제안의 총체를 종합한 공동보고안 작성 준비에 관하여 14일부터 협의를 개시할 것을 정식으로 요구하였다고 신문기자단 회견석상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미소 양측이 공동보고를 제출함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만약 우리가 이 합의를 보지 못한다면 단독 보고를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보고는 엄비(嚴秘)로 제출될 것이며 그 공개책임은 양 정부에 있다. 한편 공위는 통일조선정부 수립의 모든 노력을 계속할 것이다.”
그런데 브라운 소장은 이상 마 씨 서한에 대한 언명 중에서 공위 재개 이후 처음으로 정돈상태란 말을 사용하였는데 현재까지 정돈상태라는 말은 너무 강하다 하여 단지 불합의라는 말만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문) 공위 진행상황을 각기 본국에 보고한 후에도 회의는 계속 진행하는가?
(답) 서한내용에 중지하라는 내용이 없는 이상 회의는 계속한다.
(문) 앞으로의 공위사업진행을 어떻게 예측하는가?
(답) 나도 알 수 없다.
(문) 금후 공위의 난관을 극복 불가능으로 보는가?
(답) 모르겠다.
(문) 공위가 결렬되면 조선문제가 UN에서 해결될 줄 아는가?
(답) 그는 개인의 의견으로서는 추단키 어려우나 지금의 난관은 양국 외상 간에서 해결할 지시를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조선일보> 1947년 8월 15일)
미소공위 회담은 8월 14일 이후 열리지 않고 있다가 마셜이 보고서 제출 시한으로 지정한 21일을 하루 앞두고 열렸다. 그러나 소련 대표단은 보고서 제출에 관한 몰로토프 외상의 지시를 받은 바 없다며 보고서 작성에 응하지 않았다. 브라운은 20일 회의 후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쉬티코프 장군에 대하여 소련대표의 동의 유무에 불구하고 일방적 보고를 작성하여 제출하고 있으며 이는 지시된 8월 21일까지 미 국무성에 도착할 것이다. 나는 8월 12일 이후 14일 및 그 후에도 공위 회의 개최를 요구하였으나 소련 측에서 종시 이에 불응하였다. 소 대표가 마샬 장관의 몰로토프외상에 보낸 서한에 관한 통지를 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이 서한의 사본을 쉬 장군에게 전달하였다.” (<동아일보> 1947년 8월 22일)
몰로토프는 마셜에게 8월 22일에 답장을 보냈고, 이 편지는 8월 25일 스티코프에 의해 공개되었다. 마셜이 일방적으로 제안한 보고 제출일을 하루 넘긴 뒤에 답장을 보낸 것이다. 외교 서신에 대한 답장을 편지 받은 지 열흘 만에 하는 것은 관례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다. 이 편지에서 몰로토프는 남조선의 좌익 검거 선풍을 문제 삼았다. 그 얘기는 다음 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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