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먼저 좀 정리를 해봐야겠다.


(1) 11월 4일. 서중석의 <6월 항쟁> 리뷰를 올렸다. 참 좋은 책이라는 내 생각을 독자들에게 잘 전하려고 애쓴 글인데, 한 가지 이견을 덧붙였다. 1987년 6월에 전두환이 군대를 동원하지 않은 결정적 이유를 미국 쪽에서 찾아야 하지 않나 하는 게 내 생각이다. 근거는 두 가지. 첫째, 전두환 정권은 군사정권이었으므로 위기 대응을 위해 말리는 사람 없으면 군대 동원부터 생각했으리라는 것. 둘째, 군대를 동원하려는 전두환 정권의 의지를 억누를 수 있는 힘은 미국에만 있었다는 것.


(2) 11월 8일. 박동천이 “박동천 칼럼”에 위의 리뷰에 대한 불만을 표시했다. 지금 다시 읽어봐도 그의 불만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겠다. 글머리에 “열혈 반미주의자”란 말이 나오고 이어 무슨 풍토병 얘기가 나온다. 지식인들이 고쳐줘야 할 병인데 오히려 퍼뜨리고 악화시키는 지식인들이 있단다. 나를 꼭 짚어서 “바로 이 사람입니다.” 얘기는 않았지만 맥락으로 봐서 그런 눈치다.


(3) 11월 9일. “김기협의 페리스코프”에 글 (2)에 대한 답글을 올렸다. 적당한 글 하나 전에 쓴 것이 마침 있어서 붙여 올렸다. 9년 전부터 일관된 관점을 갖고 있다면 설령 환자라도 가벼운 유행병 환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확인되리라고 생각했다. 한미관계에 대한 내 생각이 기분에 휩쓸린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폭과 깊이를 가진 것임을 알려주고 싶었다.


(4) 11월 19일. 북섹션의 “나는 반론한다.” 코너에 글 (3)에 대한 박동천의 논평이 올라왔다. 내 글 (2)가 불만스럽다는 이야기다.


왜 박동천이 내게 “대답”을 요구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간다. 각자의 글은 각자의 생각을 독자에게 내놓는 것이다. 이웃사람의 글을 보다가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논평을 적어 내놓을 수 있다. 그것은 그 이웃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아니라 독자를 상대하는 일이다. 독자에게 꼭 보일 필요가 없는 내용을 묻고 싶은 게 있다면 개인적으로 연락을 취하겠다.


나는 글 (1)에서 내 생각을 말했다. 그런데 글 (2)를 보니 나와 다른 자기 생각을 얘기하는데, 그에 곁들여 내가 무슨 이상한 병에 걸린 게 아닌가 걱정해 주는 기색이 보였다. 글 (1)의 표현이 충분치 않아 무슨 오해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해서 글 (3)을 올렸다.


나는 내가 미국의 국가 성격에 관해 한국인으로는 가장 많이 생각해 온 사람의 하나라고 자부한다. 2003년 초에 낸 첫 책이 <미국인의 짐>이었고, 일부를 글 (3)에 붙여 올린 그 책 서문이 내 생각을 최대한 압축한 것이다. 미국이 한국인만이 아니라 온 인류의 걱정거리라고 하는 생각이다.


그 서문은 많이 읽히지 못했다. 책이 많이 안 팔렸으니까. 그래서 글 (2)를 보고는 반가웠다. 독자들에게 더 읽히고 싶은 글을 끄집어낼 기회가 생겼으니까. 그리고 글 (1)에 대한 논평이 나온 이상 오해의 여지가 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설명을 부연하는 것이 박동천에 대해서가 아니라 독자들에 대한 예의에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글 (4)를 보고는 답답하다. 내 “반응”이 자기 “질문”에 대한 “답”이 되지 못한다는 말로 시작한다. 이 양반 질문이 뭐였지? 글 (2)를 다시 꺼내본다.


찾아보니 의문문 몇 개가 보이기는 한다.


"미국"의 국력이 "한국"보다 엄청나게 더 센가? "미국"이 심술이 나서 "한국"을 응징하고자 한다면, 경제든 군사든 "한국" 정도는 한 방에 날아가고 말 것인가? "미국"과 "한국"이 대등한 조건으로 국제 시장이나 국제 재판에서 붙으면 도저히 상대조차 안 되므로 결과는 미리 정해져 있는가?


그런데 이 뒤를 잇는 박동천의 말은 이 의문문들이 수사적인(rhetorical) 질문이라고 일러준다.


이런 질문들을 (따옴표 달지 않고) 이렇게 양자택일로 물었을 때, 답변 자체를 거부하지 않는 한, "한국"이 "미국"과 한판 붙어볼 수 있다는 대답보다는 "미국"에게 상대가 안 된다는 대답이 훨씬 더 많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위에 쓴 의문문에서 내가 달아놓은 따옴표에 주목해 보자. 특히 그토록 강하고, 보기에 따라서는 "악"하기까지 하다는, "미국"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요는 “미국”을 너무 관념화해서 보지 말자는 얘기 아닌가. ‘강한 나라 미국’, 내지는 ‘악의 축 미국’이란 관념에 매이지 말고 미국의 실체를 보자는 얘기 아닌가.


<미국인의 짐>을 낼 때까지 10년 가까이 ‘미국’은 내 공부의 중심 화두였다. 역사 공부를 배경으로 시사칼럼을 쓰면서 20세기 세계에서 미국이 맡은 역할에 관심이 집중되었고, 과학사를 전공했던 나는 문명의 흐름 속에서 미국의 국가 성격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나라가 20세기 후반을 통해 늘 대단히 강한 모습을 보이고 때로 대단히 악한 모습을 보이게 된 까닭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강한 나라 미국’, ‘악의 축 미국’은 단순한 관념이 아니다. 현실이다. 현실의 전부는 물론 아니지만.


그런 나의 생각을 밝히도록 글 (3)에서 노력했다. 이게 자기 “질문”에 대한 “답”이 안 된다고 박동천은 불평하는데, 나도 “답”이라고 내놓은 게 아니다. 내 생각을 내놓은 것일 뿐이다. 마음에 안 들어도 할 수 없다. 그는 그의 생각을, 나는 나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내놓는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도 독자들에게 내놓는 의미가 조금이라도 담긴 글을 짜내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박동천에게 배려가 충분치 못해서 허수아비 댓글로 보이더라도 그가 너무 서운해 하지 않기 바란다.


글 (1)에서 문제된 대목을 다시 살펴본다. “서중석의 미국 역할 경시는 균형을 벗어난 것이라고 나는 본다”고 했다. 그리고 “민주화가 자체 원리에 의해 발전해 나온 측면을 크게 보는 그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 점이 많지만, 그런 측면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의 설득 덕분에 더 깊이 인식하게 된다”고도 했다.


1987년 6월 계엄령이 나오지 않은 유일한 이유가 미국의 결정이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함의가 큰 정치적 결정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얽혀서 함께 작용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중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요인을 지목함으로써 효과적 설명을 시도할 수는 있다.


나는 미국의 결정을 1차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승만의 하야를 결정하는 자리에 누가 있었나? 외무부장관(유고시 승계권자)에 막 임명된 허정, 육군참모총장 송요찬, 그리고 주한미국대사 매카너기였다. 1945년 이래 한미관계의 흐름을 생각하면 1987년 6월 미국의 역할을 경시하는 이들에게 입증의 책임이 있다. 상식적으로 봐서 미국의 역할이 작을 수가 없었다.


6월 19일 전달된 레이건 친서에 군대 동원을 말리는 내용이 있었으리라는 사실은 누구도 의심치 않는다. 전두환 한 사람 보라고 써 보낸 편지였을 리도 없다. 그 시점에서 한국의 계엄령을 원치 않았다면 전두환 한 사람의 판단에 맡기지 않았을 것이다. “군대를 동원한다면 우리는 당신을 더 이상 지지하지 않을 것이요.” 하는 친서 내용이 요직에 있던 여러 사람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지만 미국 역할을 경시하는 서중석의 관점에서도 나는 배우는 것이 많다. 그가 제시하는 다른 여러 가지 요인들도 다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 시점에서 ‘제한적인’ 역할을 맡은 요인이라도 그 이후에 의미를 더 키워 왔기 때문에 열심히 배우고 공부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의미들 때문에 미국의 역할을 흑백론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