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의 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존재해왔으며 소련 붕괴 후 더 부각되었고, 지금의 부시 정권이 들어선 후 더욱 무겁게 느껴지고 있는 짐이다. 미국인에게만 무거운 것이 아니다. 미국 밖의 많은 사람들에게 더 부담이 되고 있는 짐이다. 우리도 지난 가을 이후의 이른바 북핵 위기 속에서 그 무게를 크게 느끼기 시작한 짐이다.


지금 사람들의 관심은 ‘세계 경찰’을 자임하며 ‘예방전쟁’을 주창하는 미국의 ‘전쟁광’ 측면에 모여 있다. 그러나 다른 모든 면에서 멀쩡한 나라가 전쟁 하나에만 광분하는 증세를 보일 수 있을까? 미국이라는 나라의 병리적 현상은 포괄적 고찰을 필요로 한다.


미국은 문명 발전의 모든 측면에서 세계를 이끌어가고 있다. 좋은 측면이든 나쁜 측면이든. 이것이 바로 ‘미국인의 짐’이다. 미국이 개발하는 기술과 제도, 그리고 미국이 겪는 병리적 현상, 양쪽 다 얼마간의 시차를 두고 다른 나라들에 전파된다. 그 시차는 전체적으로 계속 짧아지고 있으며, 우리나라는 전파 시차가 그중 짧은 나라의 하나다.


깊이 따져보면 좋은 측면과 나쁜 측면이 별개의 것일 수도 없다. 양쪽 다 하나의 문명 발전 방향에서 파생되는 것일 뿐이다. 좋은 것만 배우고 나쁜 것은 버린다는 취사선택에는 근본적 한계가 있는 것이다.


미국이 보이는 병리적 현상은 미국만의 것이 아니라 온 세계가 걸려가고 있는 질병을 앞장서서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 비판과 평화운동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문명의 진행 방향을 총체적으로 반성할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미국인의 짐’에 감사해야겠다.


(...) ‘미국인의 짐’은 미국인이 앞장서서 지고 있는 것일 뿐, 지금의 문명세계 전체에 얹혀 있는 짐이다. 미국을 지지한다고 해서 이 짐이 행복의 보따리가 되는 것도 아니고, 미국을 반대한다고 해서 이 짐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 짐이 왜 생긴 것인지 철저하게 따져보아, 피할 수 없는 짐이 확실하다면 가능한 한 나도 괴로움을 덜 겪고 남에게도 덜 끼치면서 함께 지고 갈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문명의 진행 방향을 바꿔 이 짐을 아주 없앨 수는 없을까? 다른 방향을 잡더라도 그에 따른 짐이 어떤 것이든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1백여 년 전에 비해서는 대안을 생각할 수 있는 폭이 크게 넓어졌다. ‘문명의 짐’으로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 ‘더 나은 세상’을 찾는 길에서 핵심이 되는 질문일 것이다.


9년 전 <미국인의 짐> 서문에 썼던 이 글을 끄집어낸 것은 어제 본 박동천의 글 때문이다. 그는 내가 서중석의 <6월 항쟁> 리뷰에서 미국의 역할을 더 크게 봐야 한다고 주장한 데 대해 “‘미국은 강대국’이라는 이미지에만 매몰된 탓에 공정성을 상실하게” 된 것으로 본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리고 자신이 보는 미국의 특성 네 가지를 내가 간과했다고 지적했다. 그 네 가지 특성은 이런 것이다.


(1) 미국은 다원적인 국가다.

(2) 미국에는 폐쇄적 보수주의자만이 아니라 개방적 자유주의자도 많이 있다.

(3) 미국에게 한국은 그리 중요한 나라가 아니고, 한국에 대한 장기계획 같은 것도 없다.

(4) 미국 정치제도가 다원주의적-절차주의적인 것이고 실용주의-공리주의 정치의식이 높아서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적으로 정책이 결정될 때가 많다.


(1)과 (2)에 대해서는 6월 항쟁에 관련된 얘기가 국가 대 국가의 관계가 아니라 정부 대 정부의 관계에 관한 것임을 일깨워줘야겠다. 미국의 대한 정책에 일상적 관심을 갖는 미국 시민은 많지 않다. 정부가 정부 입장에서 자기네 득실과 편의에 따라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다. 광주 사태 같은 자극적인 상황이라면 미국 정부가 자기네 책임 없는 일이라고 시민들에게 해명할 필요를 느끼지만, 대부분의 일은 정부 내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3)의 얘기에는 의아한 생각이 든다. “아니, 냉전 때 이 사람 화성에 가 있었나?” 미국이 ‘맹방’ 관리를 위해 얼마나 무리한 짓을 많이 했는지 소문 하나 들은 게 없단 말인가?


한국은 냉전기를 통해 인구와 경제 규모에 비해 훨씬 큰 중요성을 미국에게 가진 나라였다. 냉전이 끝난 후 중요성이 좀 줄어들었지만 아직도 나라 크기에 비해서는 중요성이 크다. 같은 크기의 거래를 하는 상대라도 한국처럼 자기네에게 의존도가 높은 고객은 거래의 영양가가 높다. 미국은 아직도 한국 국내 상황에 상당히 큰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4)는 미국을 너무 단순화해서 보지 않도록 유의해야 할 점이 틀림없다. 내가 미국을 너무 단순화해서 본다고 박동천은 생각하는 모양인데, 과연 그런가? 너무 피해의식에 사로잡히지 말고 미국도 좀 쿨~하게 보자는 게 박동천의 입장 같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나도 내 딴엔 쿨~하게 보려고 애쓰는 거다.


<6월 항쟁> 리뷰에서 나는 1945~1987년간의 한미관계를 ‘신식민지 체제’로 본다는 이야기도 했다. 박동천에게는 그것이 유치한 선동 구호처럼 들려서 몹시 거슬렸을 텐데, 그 얘기를 꺼내지 않은 것은 동업자 간에 너무 혹독한 말이 나올까봐 참아준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신식민지 체제 얘기에는 서중석도 무척 놀랐다. 그래도 그는 내가 선동 구호 같은 걸 얼마나 싫어하는 사람인지 잘 아니까 오해는 하지 않고 내게 설명을 부탁했다. 설명을 간단히 하기 위해 양차 대전 사이 영국의 인도 지배가 1945년 이후 미국의 한국 지배와 비교할 만한 수준의 통제가 아니었을까 하는 인상을 갖고 있다고 했더니, 그도 생각해 볼만한 문제라고 끄덕이며 정말 그렇다면 비교하는 글을 하나 쓰면 좋겠다고 권했다. 내 생각에도 하나 쓰면 좋겠다. 틈날 때 쓰리라고 마음속의 숙제로 남겨놓았다.


‘신식민지’란 1940~50년대에 전 세계적 추세에 따라 독립 준비가 안 된 나라들이 독립한 후 형식상으로는 독립국이면서 원래의 지배국에 대한 의존이 계속된 것을 말한다. 나는 <해방일기> 작업 중 미국이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력을 그대로 넘겨받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살피며 거듭거듭 놀라고 있다. 그 지배력은 군정 3년이 끝났다고 해서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일제 말기의 친일파와 지금의 친미파를 비교해 보라. 일본 가서 공부한 사람들, 일본 권력과 줄 닿은 사람들이 당시 득세한 수준보다 미국 가서 공부한 사람들, 미국 권력과(자본권력 포함) 줄 닿은 사람들이 지금 부리는 위세가 더하지 않은가? 그때 조선 민중의 고통에 눈감고 일본제국의 승리에 목매달던 사람들보다 지금 민족을 돌아보지 않고 미국 중심 세계체제에 몸 바치는 사람들의 극성이 더하지 않은가?


식민지건 신식민지건 지배관계의 형식과 겉모습만 봐서는 그 진짜 의미를 포착할 수 없다. 지배받으면서 의존하려는 마음가짐에서 이 나라의 정책이 결정된다면 이 나라는 독립된 나라가 아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