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9. 23. 15:55

몇 주일 동안 책을 만들어주는 너머북스 분들과 서먹하게 지냈다. 교정지도 택배로 오고가고, 얼굴을 한 달도 넘게 안 보고 지냈다. 며칠 전 책이 곧 나올 것이란 소식을 듣고 아내가 제안했다. 고마운 뜻을 표하기 위해 음식을 준비할 테니 집으로 청하라고.

가까이서 늘 도와주고 격려해주는 분들을 함께 청하니, 아내 빼고 자리에 앉은 사람만 열 명이다. 너머의 상미님 재민님 두 분 외에 서해문집의 아그네스님과 선정님이 와줬고, 이웃에 사는 호박님과 노을님, 그리고 서울에서 연식님과 동범님이 나와줬다. 그리고 마침 영진이도 왔다.

못 온 분들께 미안해서 음식이 무엇무엇이었는지는 밝히지 못하겠고, 앉은 자리에서 백주 아홉 병을 비웠다는 사실만 밝힌다. 술을 원천봉쇄한 아그네스님을 빼고 아홉 명이 한 병씩 비운 셈이다. 꽤 고르게 비웠다. 많이 마신 분도 한 병 반은 넘지 않은 것 같고, 적게 마신 분도 반 병은 비운 것 같다. 백주 한 병이면 소주 세 병이 넘는 알콜인데, 음주라는 목적에 매우 충실한 모임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재미있는 사실 하나가 눈에 띄어 잠깐 함께 웃었다. 사람 열에 출판사가 다섯이었던 것이다. 두 분씩 온 서해와 너머 외에 호박님, 연식님, 동범님이 1인 출판사니까. 해방공간에서 사람이 열 모이면 정당이 다섯 개였다더니...

그런데 술이 돌기 시작할 무렵 누군가가 나를 보고 패를 까라고 한다. 이렇게 집으로 청한 데 무슨 깊은 뜻이 있는 거냐고. 책이 나와서 기쁘고 고마운 마음으로 청한 거라고 설명해도 쉬 곧이들으려 하지 않는다. 말이 나오자 모두들 동조하고 나선다. 책 나오는 정도의 '일상적'인 일로 이렇게 판을 벌일 리가 없다, 마침 영진이 와 있는 걸 보니 영진이 장가라도 보내는 거 아니냐고 한참을 보챈다.

그러고 보니 한국 사회에서 친구 사이에 집으로 몰려다니는 일이 참 줄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더러 집으로 청할 때가 있다. 어쩌다 내가 낼 일이 있으면 집으로 청할 생각을 꼭 해본다. 주부에게 힘든 일이지만, 한국 돈 무서워하는 아내에겐 힘든 게 별 문제 아니다. 어제 정도 먹고 마시려면 우리 수준에 맞는 허름한 집이라도 30만원 넘게 들었을 것 아닌가. 그리고 아내는 우리를 아껴주는 이들에게 음식이라도 만들어 먹이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래서 1년에 두어 번은 집에 술상을 차린다.

우리 집 풍속을 꽤 아는 친구들에게도 잘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무슨 껀수냐고 그렇게 없는 껀수를 찾지. 그러고 보면 무관하게 지내는 친구들에게도 집으로 초대받는 일이 좀체 없다. 사실 나도 누구 집으로 초대받는다면 부인 애쓰는 것이 꽤 신경 쓰일 거다. 하지만 집으로 청하는 풍속이 이렇게까지 깨끗이 증발해 버린 데는 좀 생각할 문제가 있지 않을까?

집으로 오고가는 풍속이 남아 있는 연변에서 온 아내에게는 퍽 이상했던 모양이다. 한국 와서 1, 2년 지내도록 초대가 없는 것을 보고 "그 친구들 진짜 당신 친구 맞아요?" 의아해 하기도 했다. 지금은 한국 풍속을 알 만큼 알게 되었지만, 그 풍속을 따라가고 싶은 생각은 잘 들지 않는 것 같다. 아내의 그런 취향이 나는 고마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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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