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지 30년이 지난 박정희의 공과에 대한 논란이 근래 꽤 열을 올리는 것은 양쪽으로 치우친 의견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지나친 찬양-미화에 영웅 숭배 풍조나 승리지상주의 경향이 조심스러운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나친 폄하에도 비현실적인 기준이 많이 작용하는 것이 아닌지 불안하다.


어린아이로나마 1950년대를 살아본 나로서는 박정희의 쿠데타를 통해 대한민국 사회에 최소한의 질서가 세워진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아주 훌륭한 질서는 아니었다. 그러나 1950년대와 비교하면 정말 ‘최소한’의 질서였다.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 초등학생의 기억으로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식민지시대는 살아보지 않았어도 상당히 강력한 폭력적 질서가 있었으리라고 추정된다. 해방 후 일어난 일들을 더듬어보면 폭력만 남기고 질서는 사라져 간다. 식민지시대 헌병과 경찰의 흉악무도한 짓을 우리는 즐겨 이야기해 왔지만, 1940년대 말에서 1950년대에 걸쳐 경찰과 군대가 저지른 짓과 대놓고 비교하면 별로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박정희의 쿠데타는 식민지시대 말기의 질서를 회복한 것으로 나는 평가한다.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4-19 이후의 무질서를 들먹이는 것은 너무 편협한 시각이다. 4-19 이전에도 질서다운 질서는 없었다. 자칭 공권력의 폭력만이 있었을 뿐이다. 1년간의 무질서가 아니라 16년간의 무질서를 극복했다고 보는 것이 5-16의 질서 회복 역할에 대한 온당한 평가일 것이다.


미군정 3년은 조선사회의 질서가 여러 층위에서 무너져가고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을 대신하는 새로운 폭력이 자라난 시기로 볼 수 있다. 1946년 여름에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끈 한 회사에서 벌어진 일을 통해 당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는지 들여다보았다. 1946년 8월 7일자 <동아일보>의 한 기사에서 시작했다. (이 기사는 제2면에 실렸는데, “한국근현대신문자료”에 제1면만 나와서 “자료대한민국사”에 게재된 내용을 옮겨놓는다.)


“「東紡쌀」은 종업원용 - 검사당국의 조사로 판명”

동방창고 쌀 사건에 대하여 검사국에서는 인천과 영등포 창고의 재고미를 조사하는 일방 그 구입방법과 동회사의 당초 목적인 종업원에의 배급 상황 또는 사건의 처리 등에 대한 조사를 하여 오는 중인데 검사국에서 말하는 그 진상은 다음과 같다.

검사국에서 조사한 영등포와 인천창고의 쌀은 전부 4천2백13 가마로 이것은 군정청공업국 방직과장의 허가로써 종업원과 그 가족에 배급하기로 하고 동 방직회사에서 생산되는 광목과 교환한 것인데 지난 4월부터 영등포 공장의 쌀을 종업원 한 사람에 4홉 또 그 가족에 3홉씩을 배급하여 준 사실이 있다는데 현재의 재고미로 종업원 한 사람에 3홉씩 (그 가족에는 배급하지 않기로 결정)을 금년 11월 15일 즉 신곡이 나올 때까지 배급케 하고 나머지는 명단에 넘기어 일반 배급을 하게 하기로 된 것이다.


동양방직의 ‘은닉미 사건’이 면죄부를 받은 것이다. 서울지방법원 검사국이 7월 16일 동양방직 영등포공장에서 숨긴 쌀 3,200 가마를 이튿날 인천공장에서 1,600가마를 적발했을 때 당국의 서슬은 시퍼랬다. 쌀 때문에 고초를 겪던 시민들도 분노해 마지않았을 것이 눈에 선하다. 적발 당시 <서울신문> 7월 18일자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서울시민이 식량난으로 방금 도탄에 빠져있는 이때 최남이 관리하는 동양방직회사 영등포공장 창고 안에 고스란히 잠자고 있는 쌀 3천 2백 가마가 드디어 검찰의 손에서 적발되었다 함은 기보한 바이어니와 16일 서울지방법원 검사국 김홍섭 검사는 경기도경찰부 이만종 경감과 함께 동양방직 영등포공장으로 출동하여 쌀이 들어 있는 창고를 검색하는 동시에 동 창고에 들어있는 3,213가마 중에서 2,913가마를 압수 봉인하고 나머지 3백 가마는 사건의 진상이 규명될 때까지 동 공장 근무 직공들의 식량으로서 남기어 놓고 돌아왔는데 (...) 동포는 식량난으로 가두에 방황하는 이때 모리를 획책하는 혐의가 농후하다 하여 경찰당국은 경찰부와 긴밀한 연락 하에 단호한 태도로 이 사건의 진상을 엄중히 규명하여 처단하리라 한다.

이에 대하여 지방법원 검사국 김용찬 검사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서울시민이 방금 식량난으로 곤경에 처해 있는 이때 같은 조선사람의 창고에서 3천 가마의 쌀이 적발되었다는 것은 중대한 사실의 하나다. 회사 측의 변명과는 별개로 당국으로서는 일반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여 엄중히 조사 처결할 터이다. 앞으로 사건을 취조하여야 모든것이 확연하여질 것이나 조사결과에 있어 부정행위가 판명되는 경우에는 직접 일반생활에 중대 위협을 주는 식량문제이므로 추호도 용서 없이 엄벌에 처할 방침이다. 그리고 방금 압수한 쌀 2천 9백 가마도 사건이 끝나는 대로 식량으로 곤란을 받고 있는 일반시민에게 적당히 배급할 의향이다.”


같은 신문 7월 19일자 기사에는 인천공장의 쌀 적발 보도에 붙여 “건국 도상의 도의심으로나 민족의 양심으로나 이러한 모리행위를 미연에 적발한 당국의 처사에 일반은 끝없는 신뢰와 그 추이를 기대하고 있다”는 논평까지 붙어 있다.


대단히 파렴치한 범죄처럼 몰아붙여 놓았는데, 과연 그럴 만한 일이었는지 선뜻 판단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의 민심으로는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직원 1인에 4홉씩 준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가족 1인당 3홉씩 줬다는 것은 믿기도 어려운 이야기다. 당시 서울시민들은 일제 말기 전쟁기의 배급 2홉 남짓의 절반도 안 되는 배급량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무튼 7월 중순에는 검사장까지 나서서 엄중한 태도를 과시해서 일반인의 “끝없는 신뢰”를 모으던 일이 3주 후에는 별 것 아닌 일로 발표되었다. 동양방직을 둘러싸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을까? 8월 10일자 <동아일보>의 짤막한 기사 하나가 눈에 띈다.


인천에 있는 동방의 종업원들은 이번 전평을 탈퇴하고 3일 대한노총에 개명단체로 재출발을 하였는데 선임된 임원은 다음과 같다.

위원장 蔡競錫 부위원장 金秉鶴 崔正煥 金正信


궁금증이 자꾸 커진다. “한국근현대사신문자료”에서 “동양방직”, “동양방적”, “동방”으로 검색을 해보았다. 몇 개 기사를 보며 어떤 그림 하나가 그려졌다. <자유신문> 1946년 6월 14일자에 두드러진 기사 하나가 있었다.


“조선 노동운동에 劃時期 - 전평에 단체계약-교섭권을 인정”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는 해방 후 결성된 이래 파괴된 산업시설의 부흥과 산업재건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노자(勞資)의 대립을 조정하고 근로대중의 정당한 권리 옹호를 위해 애써 왔는데 특히 최근의 인천 동방(東紡) 쟁의문제에 있어서 전평이 취한 태도는 극히 타당한 것으로 인정되어 12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의 장시간 동안 군정청 상공국 노동국장 ‘존손’씨와 군정고문 ‘B 켄나’씨, 섬유과장 ‘바-보’씨 보조관 ‘할나웨이’씨, 동방 전무 오계선 씨, 전평 한철 씨 외 3명, 쟁의단 여공 대표 김정애 신홍례 양군이 출석하여 열린 조정위원회에서 쟁의단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수락하게 되어 13일 오후 건강상태가 관계없는 여공들만 우선 즉시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동방 쟁의 문제는 군정청의 충분한 양해로 불법한 사업주를 견제하고 노동자의 정당한 요구를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군정청 노동국에서는 전면적으로 전평을 노동자들의 대표단체로 인정하고 단체계약 교섭권을 인정하여 차후 일체의 근로대중 문제는 전평의 각 세포조직을 통해서 정정당당하게 군정청 노동국과 교섭하게 되리라 한다.


그 배경이 되는 기사는 <자유신문> 1946년 6월 10일자에서 찾았다.


“東紡 파업공, 러 장관에게 진정”

동양방적 인천공장 직공 8백여 명은 그 동안 (1) 일을 마친 다음에 외출을 마음대로 하게 해 달라, (2) 기숙사 방과 방 사이를 마음대로 다니게 해 달라, (3) 최저임금 2월 50전을 15원으로 올려 달라, (4) 후생시설을 해 달라는 등의 열 가지 요구조건을 공장당국에 제출하고 8-15 이전 일제시대와 똑같은 (...) 악습을 철폐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지난 5월 26일에는 군정청 시청 경찰서 등에도 진정서를 제출하고 해결 알선을 의회하였던바 회사 측은 30일 원만 해결을 약속하고 돌연 29일 공원대표 16명을 해고한 것을 발단으로 사태가 악화하였는데 직공 4백여 명은 강제해산을 피하여 경성 본사와 직접 교섭을 하고자 경성에 와서 회사장 최남 씨와 교섭을 하는 한편 6일에는 종업원대표 신홍례 씨 외 12명이 사전 선처를 요망하는 진정서를 ‘러-취’ 군정장관을 비롯하여 상무국장 노동국장에게 제출하였다고 한다.


1930년대 초에 세워진 동양방직은 (http://815book.co.kr/sajuk/Eeph/) 일본에 본사를 두고 영등포와 인천 만석동에 공장을 가진 큰 회사였다. 1920~30년대에 유통업계에서 입지전적 기업가로 활약한 최남이 관리인으로 군정청의 임명을 받아 운영하고 있었다. 광목이 생필품으로 수요가 큰 품목이었기 때문에 유리한 운영조건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해방 전 전쟁기의 노동착취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려다가 문제를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사용자의 입장, 특히 ‘적산(敵産) 회사’ 관리인의 입장은 해방 전에 비해 약해졌는데 노동자들은 민주주의 사상에 노출되었으니 노동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6월 14일 기사에서 군정청 관리들과 전평이 노사 양측과 함께 참여하는 ‘조정위원회’가 분쟁 해결의 주체 역할을 맡은 것이 놀라운 일이다. 군정청의 노동-산업 관계 고문들 중에 진보적인 성향 인사들이 많았다고 커밍스는 본다.


하지의 노동문제 고문 스튜어트 미첨에 따르면 이남에서 ‘노동조합’은 “짧은 기간 동안 (...) 일본인 소유였던 공장들을 거의 완전히 장악했다.” 전평은 1946년 중엽까지 이남 지역의 유일한 노동조직이었으며 가을의 봉기 때까지 가장 강력한 조합의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지방의 다른 미국인 관찰자들도 대개 그런 평가에 동의했다. 전평은 모든 산업도시에 지방평의회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군정청의 많은 미국인들은 전평과 그 산하의 노동조합들이 조선 노동자들을 대표하고 대체로 개혁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 인정했다. “노동 부문 정책”의 어느 문서에 이런 내용이 있다.

“많은 공장에서 일본인 소유자를 쫓아낸 후 경영을 장악한 직원위원회는 무조건적인 폭압보다 틀이 잡힌 조합을 통해 통제하는 편이 낫다. 군정청의 정책은 진정한 대표성을 가진 조합을 육성하면서 예전 소유자들을 쫓아낸다는 막연한 계획 외에 공장을 제대로 조업할 아무 계획도 갖지 않은 무책임한 선동가들을 솎아내는 방향(이어야 한다.) (미국인들은) 모든 직원위원회가 공산주의자들의 지배를 받는다는 성급한 결론을 조심해야 한다. (...) 소위 공산주의 집단 중에는 상당히 온건한 것으로 밝혀진 것이 많다.” (B Cum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98-199쪽)


6월 중순까지도 군정청의 노동 정책은 전평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진보적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라 형성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전평에 대항하여 4월 8일 결성된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대한노총)의 세력이 확대되고 있었다. 5월 13일에 철도국원들이 대한노총에 가입한 기사, 7월 12일 조선피혁에 대한노총 분회가 설립된 기사가 보인다. 그러다가 8월 초순에 동양방직이 전평에서 대한노총으로 바꿨다는 기사가 나온 것이다.


이 전환이 어떤 갈등을 거쳐 이뤄진 것인지 세밀히 파악할 수는 없다. 다만 <자유신문> 1946년 8월 3일자의 아래 기사에서 한 모퉁이를 들여다볼 수 있을 뿐이다. ‘구사대’의 탄생 장면이 아닐까.


“이번에는 구타사건 - 동방 은닉미 사건으로 또 분규”

수천 석의 쌀을 저장하였던 동양방적회사 사건에 관하여는 일반이 크게 주목하고 있던 바 동사에서는 쌀 문제를 에워싸고 또 한 불상사가 일어났다. 즉 동 회사 인천공장에는 간부와 경비원으로 신우회가 조직되어 있는데 이들은 최남 관리인을 옹호하고 앞서 당국에서 미곡에 대하여 차압 봉인한 것을 반대하는 진정서를 내자고 전 종업원에게 일일이 도장을 받았는데 이에 응하지 않는다고 채익병을 27일 밤 구타하여 중상을 입힌 외 31일 밤에 종업원 방모라는 여자를 구타한 것까지 전후 5명이 중경상을 입었는데 이에 대하여 피해자는 1일 장 경찰부장에게 고소장을 내어 놓았다. 그리고 전평 간부의 말에 의하면 동 회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쌀은 현 인원에게 11월까지 배급하고도 2천8백 가마가 남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