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9일 새벽 경찰의 학병동맹 습격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미군 진주 이래 권력과 폭력의 독점자인 미군정의 정책과 조치가 조선인들의 불만과 분노를 일으킨 일은 끊임없이 있었지만, 학병동맹 습격사건처럼 충격적으로 터진 일은 없었다.


전 해 연말까지 미군과 경찰이 친 사고 중 가장 큰 것이 11월 중순의 ‘남원 사건’이었다. 그 무렵 전국적으로 진행되고 있던 인민위원회 탄압 과정에서 불거진 것이었다.


10월 말 미군이 남원에 진주할 때까지 남원 인민위원회는 지역 일본인들에게 재산 관리 위임장을 받아놓고 있었다. 그 재산을 넘겨달라는 군정청의 요구를 인민위원회가 거부하자 11월 15일에 도 경찰부장이 경찰대를 이끌고 와서 인민위원회 간부 몇 사람을 체포해 전주로 압송하려 했다. 마을 외곽에서 1백 명가량의 몽둥이 등을 든 주민들이 경찰 차량을 가로막고 경찰대를 구타한 다음 체포되었던 사람들을 풀어주었다.


이튿날 미군이 증파된 가운데 주민 16명이 체포되고 그 다음날 더 많은 체포가 예상되는 가운데 1천 명 가까운 주민이 모여 경찰서를 둘러쌌다. 이 군중을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주민 두 명과 경찰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경성변호사회에서 진상조사를 위해 파견한 홍순엽이 작성한 보고서 중 사건의 원인에 대한 김응조 전북 경찰부장의 주장 부분을 옮겨놓는다.


이번 사건의 도화선은 11월 15일 남원인민위원회 위원 5명을 검거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이 검거는 전북 경찰부장 김응조의 지휘 하에 행해진바 검거의 이유와 경과를 당 부장에게 물어보기로 하였다. 남원인민위원회는

(가) 인민공화국이란 국자(國字)를 사용한 인민위원회 간판을 군청에다 게(揭)하고 청사를 불법사용 하였으며 8월 15일 이전부터 군수이던 임충정을 추축한 것,

(나) 각 면을 접수하며 경찰관주재소란 간판을 떼고 보안부란 간판을 사용한 것,

(다) 남원인민위원회 산하에 있는 건국군이 무기를 불법소지하고 야간강도를 범행하는 것,

(라) 민중에게 세금 소작료 불납을 종용한 것,

(마) 경비를 인민에게 부과시킨 것,

(바) 민심을 교란한 것

등의 추상적인 설명을 하고, 구체적 인례를 요구한 데 대하여 기억치 못한다고 대답하였다. (<자유신문> 1945. 12. 3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오늘 남원사건 얘기 꺼낸 것은 학병동맹 사건과 대비시키기 위해서였는데, 꺼낸 김에 아쉬웠던 설명을 풀어놓겠다. 사건을 일으킨 인물 김응조(1909-1996)는 해방 전 만주군 중위였고, 해방 후 경찰에 투신해 전북 경찰부장을 지내다가 1946년 2월 말 불법행위를 저지르고 죄수를 학대했다는 이유로 해임됐다.(이에 관한 신문기사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찾지 못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육사 7기로 특별입학하고 준장으로 예편, 대한재향군인회 사무총장을 지냈다. (<친일인명사전> “김응조”)


커밍스는 김응조가 남원사건 때부터 군대 수준의 경찰력 육성을 바라던 사실을 중시하고 국방경비대 창설 배경의 일부로 이해한다.


이 군사력 창설 조치의 직접적 계기는 11월 15일의 남원사건이었다. 남원인민위원회 구성원들과 국군준비대의 한 지대가 한국 경찰 및 미군 작전부대와 충돌한 사건이다. 이 사건 직후 경찰의 미국인 고문 리머 아고가 전북 경찰부장 김응조를 만나 경찰의 질서 유지를 지원할 ‘경찰상비대’ 창설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 기구가 국군 창설의 구심점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김응조가 대답했다. 아고는 그런 이름은 붙일 수 없다고 말했다. “미국과 소련이 함께 한국을 점령하고 있는데, 어떻게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군대를 만들 수 있겠소?” 한국은 다국 신탁통치를 받을 것이며, 그 동안에는 군대 조직이 금지될 것이라는 사실을 아고는 또한 김응조에게 가르쳐주었다. 이것을 불만스럽게 여긴 김응조는 전북 경찰관들 사이에 반탁운동을 조직하기로 결심했다.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69-170쪽)


남원사건과 비슷한 패턴으로 미군과 경찰이 인민위원회 등 주민 자치운동을 탄압한 사례가 도처에 일어난 것을 커밍스는 위 책 제9장(293-350쪽)에 광범하게 서술했다. 이런 충돌이 서울 아닌 지방에서 먼저 일어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미군이 늦게 도착해서 자치운동이 조직을 갖출 시간 여유가 있었다는 점. 미군 도착 초기에는 군사력도 약하고 경찰력도 많이 복원되지 못해서 주민의 대항이 어느 정도 가능했다는 점. 그리고 초기에 도착한 부대는 군정 훈련이 전혀 없는 작전부대여서 정치적 판단력이 없었다는 점.


1946년으로 넘어오면서 서울에서도 시작된 미군과 경찰의 자치운동 탄압은 이전 지방에서의 탄압과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지방에서의 탄압이 치안 차원의 소극적인 것이었다면 이제 서울에서는 정치 차원의 적극적인 탄압이 시작된다. 첫 타깃이 여러 지방에서도 자치운동과 연계되어 탄압 현장에 나타났던 국군준비대였다.(1월 7일, 10일자 일기)


국군준비대 탄압 작전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1월 3일 본부를 습격하고 그 이튿날까지 사령관 이혁기 등 핵심 간부들을 체포했다. 장택상은 1월 19일 학병동맹 습격에서도 비슷한 성공을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국군준비대 탄압을 본 바 있는 학병동맹원들은 치열하게 저항했고, 서울시내를 발칵 뒤집어놓은 소란 끝에 경찰의 무리수가 대거 드러나며 여론의 표적이 되었다. (1월 18일, 27일, 2월 24일자 일기)


조선신문기자회가 여론을 대표해서 진상 조사에 나섰고, 1월 28일과 2월 23일 두 차례 조사결과 발표를 통해 많은 의혹을 제기했다. 경찰은 이것을 묵살하고 자기네 시나리오대로 관계자들을 송국해서 4월 6일 제1회 공판이 열렸다.


세상에 큰 충동을 준 지난 1월 19일 새벽 삼청정 학병동맹본부에서 일어난 불상사는 더욱 일제 때에 강제로 끌려나가 사선을 돌파하고 온 학병들이니만치 이들의 조국인 이 땅에서 서로 피 흘리게 한 슬픈 사실은 아직도 우리 기억에 새로운 이때 해방 후 처음으로 세인의 이목을 총집중한 학병사건은 포고령 위반, 불법체포감금죄로 제1회 공판이 6일 지방법원 대법정에서 朴根榮, 鄭義和 담당검사 입회 朴元三 판사 주심으로 11시부터 개정되었다.

이날 새벽부터 모여든 피고들의 가족과 동무들과 사회인사들로 대혼잡을 이루었고 방청석에는 피고들의 가족과 청총, 부총, 학병동맹, 문학자동맹, 혁명자구원회, 기타 각 단체 관계자 5백여 명의 방청객으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변호사석엔 이번 사건의 변론을 담당한 趙鎭萬 변호사외 15명의 변호사가 열석한 뒤 피고인 학병 申堯澈, 金炳煥, 吳錫運, 崔武學, 李孝燮, 崔萬鎭, 崔文煥, 朴泰潤, 李昌雨 등 9명이 간수에게 인도되어 법정에 들어서자 방청석에서 우뢰같은 박수소리로 법정을 진동케 하는 감격된 장면을 빚어내었다.

심리가 시작되기 전에 피고 吳錫運으로부터 1월 19일 새벽 불행히 희생당한 고 李達, 金星翼, 朴晉東의 영령을 위로하는 묵상의 허락을 재판장에게 받은 후 피고 일동이 눈물어린 얼굴을 숙이고 묵상에 잠기자 멀리 경상도에서 몰려온 고 박진동의 모친과 부인 具 씨 외 유족 속에서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는 보는 사람의 가슴까지 아프게 하였으며 이를 따라 소리 없이 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있는 광경이 방청석 이 구석 저 구석에 벌어졌다. 재판장으로부터 피고들에게 학병으로 나가가게 된 동기와 학병동맹의 목적과 활동에 대한 심문이 있어 피고들은 각각 우렁찬 소리로 솔직히 답변한 후 오후 1시경에 폐정하였는데 오는 13일에 제 2회 공판을 열기로 되었다. (<서울신문> 1946년 04월 07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간단한 기사에서도 공판정의 열기가 느껴진다. 4월 13일 개정하려던 제2회 공판은 “새벽부터 모여든 천여 명의 방청객으로 말미암아 4호 법정은 재판소 창설 이래의 처음 보는 초만원을 이루었는데 채 들어오지 못한 방청객과 이를 정리하는 정리 사이에 분규를 일으켜 법정은 드디어 대혼란상태에 빠져 개정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공판을 개정치 못하고 무기한 연기되었다. (<조선일보> 1946. 4. 14일자)


4월 20일에 열린 제2회 공판에서 변호인단은 경기도 경찰부의 장택상 부장과 노덕술 형사과장 등 많은 증인을 신청했으나 재판부는 이를 거의 다 기각했다. (<서울신문> 1946. 4. 21일자) 3월 24일 제3회 공판에서 변호인단은 장택상과 노덕술의 증인 신청을 다시 제출했으나 다시 기각되었고, 검찰은 세 명에게 징역 1년, 여섯 명에게 징역 10개월을 구형했다. (<서울신문> 1946년 04월 26일자) 그리고 5월 8일의 언도공판에서 박원삼 판사는 한 명에게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여덟 명에게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서울신문> 1946년 05월 09일자)


이런 수준의 ‘범죄’를 단속하기 위해 세 사람의 목숨을 빼앗고 서울 시내를 발칵 뒤집는 ‘작전’을 벌여야 했단 말인가? 학병동맹사건은 당시 경찰이 불법폭력단체라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밝혀주었다. (2월 11일, 3월 7일자 일기에서 당시 경찰의 속성 일부를 서술했다.)


어떤 조직이든 조직의 확대를 위해 움직이는 경향을 내재적으로 가진다는 경영학 이론을 어디서 본 듯한데, 당시의 경찰이 바로 그런 속성을 보여주었다. 홍순엽 변호사의 남원사건 조사보고서 중 위에 인용한 이응조의 주장을 보더라도 자치운동 탄압의 이유는 탄압할 이유가 안 되는 것(청사 점령, 간판 등) 아니면 근거가 없는 것들이었다. 경찰은 민의에 일부러 맞섬으로써 경찰력 강화가 필요한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제시대보다 경찰력을 갑절로 늘리고도 치안 유지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4월 7일자 <동아일보>에 “경무부, 경찰제도 개혁”이란 제목으로 이런 기사가 나왔다.


기왕의 관권경찰 제도의 잔재를 송두리째 없애어 새로운 경찰로 개편하는 한 방편으로 군정청에서는 각도 경찰부를 일반 행정과 분리 독립시키고자 그 구체안을 고구하는 중이다. 지금까지의 지방경찰은 도지사의 명령으로 움직이었던 것인데 앞으로는 군정청 경무부직속으로 하고 도지사의 권한에서 경찰부를 독립시켜 군대식으로 사단구를 설치하려는 것이다. 새로 될 제도에 의하면 경무부를 최고사령부로 하여 남선 각 도를 8구로 나누어 각 도에 한 개의 사단구를 두고 그 명칭을 제 1사단구… 제 7사단구라 하며 관직명도 최고사령관·사령·부사령 등 군대식의 위계칭호를 습용한다. 현재 이 관제의 제정에 대하여서는 경무부에서 예의 토의 연구 중인데 어느 정도는 이미 각 도에서 이에 의하여 실시하고 있다.

趙炳玉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경찰진용은 사회추천에 의한 민선기관이 아니고 그 직원은 군정관이 부여한 경무부장의 임명권에 의하여 그 신분이 보장된다. 사회와 타협하고 구합할 권리도 없고 의무도 없는 것이다. 군대와 같은 명령계통을 가지고 규율적으로 복무를 다 함으로써 의무를 다 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앞으로 그 명칭과 기구도 경무부와 일원적 연락아래 두고자 준비하고 있는 터이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지방자치가 없는 바에야 강원도 경찰부장이 강원도 지사의 지휘를 받거나 서울의 경무국장 지휘를 받거나 ‘민주경찰’의 수준은 도토리 키 재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찰 업무를 지방행정에 종속시키는 편이 경찰과 인민의 사이를 좀 더 가깝게 하는 길이고 문명국에서 취하는 제도다. 그런데 군국주의 일본에서도 도지사에게 맡겨두던 경찰 업무를 전국적으로 일원화하겠다는 극단적 파시스트 정책이 해방 한국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 때 만들어진 파시스트 경찰 제도가 아직까지 대한민국 경찰을 시민사회와 대립시켜 놓고 있다.


조병옥의 말을 들어보라! 경찰은 사회와 타협하고 구합(苟合)할 권리도 없고 의무도 없으며 임명권자에게만 충성해야 한다는 말을 버젓이 하고 있다니, 그 머릿속은 어떻게 되어먹은 것일까? 조병옥보다 더 심한 반민족행위자는 있었을지 몰라도 그보다 더 심한 반민주행위자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조병옥은 임명권자인 군정관에게 스스로 충성을 맹서하고 모든 경찰에게 같은 충성을 요구한 것일까?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그에게 권력을 쥐어줬다면 그들에게도 같은 자세로 충성을 바쳤을 것인가? 과연 그런 맹목적 충성을 진정한 ‘충성’이라 할 수 있을까?


충성은 ‘충(忠)’과 ‘성(誠)’이 합쳐지는 것이다. ‘충’은 타인에 대한 진정성이고 ‘성’은 자신에 대한 진정성이다. 임명권자에 대한 맹목적 충성은 진정성이 없는 충성이다. 자기 이익 챙기는 길을 분식하기 위해 이용하는 충성이다. 이 진정성 없는 맹목적 충성이 대한민국에서 권력을 둘러싼 또 하나의 전통이 되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