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0일 미소공위 제3호 공동성명이 나왔다. 개회 사실을 알린 21일의 제1호 성명, 회의 진행방법을 알린 23일의 제2호 성명에 이은 제3호 성명은 회의 의제를 명확히 규정하고 그 구체적 논의 방법을 밝힌 것이었다.


◊ 공동성명 제3호

1946년 3월 25일부터 29일까지 덕수궁에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 회의는 소련 수석위원 쉬티코프 중장 사회 하에 개최되어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결정된 제3조 제2항·제3항에 관하여 상세히 연구하고 검토하였다. 미소 양 대표 간에 이 문제에 대하여 연구 토의한 결과 공동위원회는 이하의 순서로 2계단에 분하여 하기로 결정하였다.

1) 제1계단, 막부회의 결정 제3조 제2항의 실천

2) 제2계단, 막부회의 결정 제3조 제3항의 실천

제1계단은 이하의 제 문제를 포함함

① 민주주의 제 정당 급 사회단체들과 협의할 조건 급 순서

②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의 기구 급 조직 원칙과 임시헌장에 의하여 조직될 각 기관에 대한 제안의 준비토의

③ 장래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의 정강 급 적의한 법규에 관한 준비토의

④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의 각원에 대한 제안에 관한 토의 (하략)

미국수석위원 A. V. 아놀드 소장 / 소련수석위원 T. F. 쉬티코프 중장

(<서울신문> 1946년 03월 31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토요일에 발표된 성명 내용이 알려진 뒤의 각계 반응이 월요일(4월 1일)자 <서울신문> 기사에 나타났다.


◊ 민주의원 金俊淵 담

금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우리 과도정권 수립에 그만큼 구체적으로 회의가 진전된 것은 크게 감사하는 바이다. 우리 민의는 앞으로 공동위원회가 더욱 호성과를 발휘하도록 3천만과 함께 힘쓸 따름이다.


◊ 민전사무국 발표

1) 미소회담은 반민주 진영의 분열선전에도 불구하고 착착 진행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명확히 인식할 수 있는 동시에 이 회담 진행에 감사한다. 현재 우리 민족은 첫째도 정부수립이오 둘째도 셋째도 정부수립이다. 하루 빨리 실현의 날을 기다린다.

2) 삼상회의 결정을 반대하는 경향을 배제하고 인민을 토대로 한 인민정부가 수립되기를 기대한다.


◊ 공산당 중앙위 발표

첫째, 그것은 우리 민주주의 진영의 큰 성공이다. 우리 민주정부가 정말 조직되는 것이고 삼상회의 결정안이 법문으로 실현되는 단계에 든 것이고 조선은 동맹국의 성심과 호의로써 독립국가가 되었다.

둘째, 반민주적 반동분자들은 지금까지 삼상회의를 반대하고 미소공동위원을 이간 중상했고 자기를 따라오는 대중을 속여 왔다. 속아온 반동분자 영향 하의 대중들은 자기 지도자의 잘못을 비판하고 그들의 반동성을 폭로 투쟁하고 그들의 지도를 거부하고 민주노선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셋째, 연합국은 호의적으로 조선의 독립 달성을 원조하는데 조선인은 자발적으로 활동하면서 연합국에 감사하는 동시에 그에게 적극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조선민주주의정부 수립의 유일한 길이다.


◊ 한민당 金炳魯 담

기왕의 막부삼상회의 결정 조항 중 임시정부 수립에 관한 것까지는 본당으로서도 이의가 없다. 따라서 만약 미소공동위원회로부터 초청이 있다면 본당으로서는 물론 출석하여서 협의에 응할 것인바 우리로서는 각당 각파의 종합적 대표기관인 민주의원에서 당연히 미소공동위원회와 협의하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현하 식량 문제 정치적 현상 등이 긴박한 상태에 직면하고 있으므로 하루바삐 각 정당 각 단체가 협조해서 남북통일 정권이 수립되기를 3천만 민중이 학수고대하고 있는 바이니 본당으로서도 임시정부가 급속히 실현되기를 절망한다.


◊ 조선신민당 발표

양군 대표의 정치적 호양으로서 이만한 단계로 구체화되도록 추진시킨 점에 대해서 양군 대표의 노력을 감사하며 유종의 미를 맺도록 기대하는 바이다. 그리고 동 위원회 성공을 위하여 우리 당은 다음의 제안을 하고자 한다. 민주정권은 민주적 경제에 입각해야만 하고 민주문화는 민주정치와 민주경제의 산물인 만큼 그 3번은 불가분의 통일적 관련성을 맺고 있는 만큼 건국초기에 큰 성격을 규정하는 결정권은 민주정권 그 자체가 담당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민주적 정권의 구성인 민주적 인물배치가 기본조건이 되느니만큼 그를 망라하는 방법으로서 민주적 각 정당, 문화·학술단체는 물론이고 무소속 개인이라도 민주적 기능본위의 인물을 망라하기를 제안하는 것이다. 한 가지 부언할 것은 공동위원회의 진행 도중에 다소라도 자극적인 언동과 필설은 조선민족에게 불리한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면 민중을 선동함으로서 자당의 당세확장을 꾀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바인즉 그러한 점에는 구태여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이 조선민족의 절실한 요청인 민주정권 수립은 촉진 완성하도록 노력하여 주기를 바라는 바다.


◊ 신한민족당 兪驥烈 담

그전부터 예상되던 것이 발표된 것뿐으로 그 내용이 아직 막연하여서 앞으로 다소간 구체적 결정이 있기 전에는 별로 소감이라고 말할 것이 없다. 물론 미소공동위원에서 혹 초청을 한다면 본당으로서 동 위원회와 의견교환을 하는 것은 무방하겠다.

(<서울신문> 1946년 04월 01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반응의 초점이 임시과도정부 수립에 모여 있다. ‘임시과도’라 하지만 상해-중경의 임정과 달리 제한적이나마 실효적 지배권을 가진 정부를 36년 만에 가진다는 것은 ‘독립’의 첫 걸음 정도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독립 그 자체가 될 수 있는 일이었다. 해방이 되고도 반년 넘도록 애태우며 독립을 기다리던 끝에 드디어 독립이 구체화되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반가움의 표명 이면에 당략적 태도가 엿보이는 것은 임시과도정부 수립에 걸림돌이 될 걱정거리다. 공산당의 “반민주적 반동분자” 비난과 민전의 “삼상회의 결정을 반대하는 경향” 배제 주장은 한민당-이승만-김구 세력의 반탁운동을 겨냥한 것인데, 시정을 촉구하는 정도라면 몰라도 임시과도정부 수립 과정에서의 원천적 배제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치다. 반탁운동에 설령 과오가 있었다 하더라도 큰 일이 잘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일단 함께 하려는 자세가 필요했다.


민전은 제1차 성명이 나온 21일의 담화에서 이미 반탁세력의 배제를 주장한 바 있다.


“하지 중장의 개회사에 대하여 우리는 만강의 사의를 표하며 쉬티코프 대장의 규정에 대하여 절대의 찬의를 표한다. 실로 우리의 평소 주장과 완전히 일치되는 데 저윽이 만족을 느낀다.
삼상회의 결정에 반대한 개인 또는 정당 급 단체도 또한 임시정부 수립에 발언할 수도 참가할 수도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주장하는 바이다. 정당등록법에 대하여서는 절대로 거부한다. 동시에 미소공동위원회의 협의상대 규정에 있어서 이 정당등록법에 구애되지 말 것을 굳게 주장하는 바이다.” (<서울신문> 1946년 03월 21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한편 한민당의 김병로는 미소공위의 협의상대로 “각당 각파의 종합적 대표기관”인 민주의원을 내세웠다. 김병로 본인은 지난 1월의 ‘4당 코뮈니케’ 사태 때도 보였고, 나중에 토지개혁안 문제로 한민당을 탈당하는 데서도 보일 것처럼 합리적 민족주의자였다. 하지만 범 우익 대표기관으로 막 출범한 민주의원을 앞세우는 자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협의상대’ 결정이 미소공위를 끝내 좌초시킨 난제였다. 미소공위의 형식상 주인은 미-소 두 나라였다. 그러나 조선의 일을 결정하는 데 조선인을 배제할 수 없으므로 ‘협의상대’ 자격으로 회담에 참가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니 ‘협의상대’란 실질적으로 조선인의 회담 대표인 셈이다. 누구누구를 협의상대로 참석시킬지 어떤 방법으로 결정할 것인가?


이북 지역의 대표를 정하는 데는 문제가 비교적 적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토지개혁에서 실효를 거둬 주민들의 폭넓은 지지와 신임을 확보하고 있었고, 공산당의 주도권을 중심으로 신민당, 조선민주당, 청우당 등 주요 정당들 사이의 관계도 안정되어 있었다. 조선민주당 조만식 계열에 대한 탄압 정도가 눈에 띄는 문젯거리였지만, 이남에서 미군정의 좌익 탄압에 비하면 경미한 문제였다.


이남 지역의 대표성 문제가 훨씬 더 불안정했다. 결성된 지 두 달 되는 우익의 최대 조직 비상국민회의는 민주의회에 가려져 존재감을 잃고 있었다. 4월 3일 홍진 의장의 기자단과의 회견은 이런 내용이었다.


비상국민회의 의장 洪震은 3일 오전 11시 출입기자단과 회견하고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였다.


(문)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한다는데?

(답) 부의장과 여러 번 협의해 본 일도 있었고 4일에 개최하는 상임위원회에서도 문제가 논의될 것으로 생각된다.


(문) 각 분과위원회는 종료되었는가?

(답) 아직 보고가 전부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자세히 모르겠으나 아직 종료되지는 않은 듯 하다.


(문) 미소공동위원회에서 각 단체의 자문을 요청한다는데 귀 회의에는 무슨 소식이 있는가?

(답) 아직 아무 것도 없다.


(문) 남조선에 있어서 비상국민회의를 제한 정당과 사회단체도 자문에 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답) 민주주의적 단체라면 용인한다느니보다 당연히 응해야 될 줄로 생각된다.

(<조선일보> 1946년 04월 05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한편 민주의원은 비상국민회의의 최고정무위원회로 출발했으면서도 군정청 자문기관으로 변신함으로써 비상국민회의를 제치고 전면에 나섰지만 ‘국민대표민주의원’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대표’ 의미도, ‘민주’ 의미도, ‘의원’ 의미도 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대표성에는 우익에 제한되는 한계가 있었고, 민주성에는 ‘영수’ 2인의 지명으로 구성되었다는 한계가 있었고, 의회 역할에는 자문기관으로서의 한계가 있었다. “고궁에서 한담”만 하는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고 그 핵심인물 안재홍이 탄식할 정도였다.


대표성과 민주성에 있어서는 민전이 비상국민회의-민주의원보다 우월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민전을 구성한 단체들 중에는 정치색이 약한 학술-문화-사회단체들도 많았고, 정치단체 중에도 중도 노선이 더 많이 수용되어 있었다. 좌익 주도 통일전선으로서 민전이 거둔 성공 때문에 그에 앞선 시도였던 인공(조선인민공화국)은 저절로 폐기될 정도였다.


그러나 민전의 결정적 한계는 미군정의 승인과 협조 대신 경계와 탄압의 대상이었다는 점이다. 민전의 편협하고 과격한 노선을 문제 삼기도 하지만, 이것은 미군정의 비협조에 부수된 문제로 볼 수 있다. 진주 후 7개월이 되어 가는 시점에서 미군정은 이남의 민의가(이북에 비해) 효과적으로 대변될 수 있는 기반조건을 만들지 못했을 뿐 아니라 민의의 표출을 계속해서 교란시키고 있었다.


제3차 공동성명이 나온 3월 30일에 하지가 부정적 전망의 보고를 본국에 보낸 사실을 3월 18일자 일기에 적었다. 이제 겨우 시작하고 있는 회의가 성공을 거둘 것 같지 않다고 하는 재수 없는 판단의 이유가 소련군의 기계류 반출 소문의 진위 확인에 소련 측이 협조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내가 65년 전의 시점에 있었다면 미소공위의 성패를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실패할 경우 실패 책임의 적어도 한 부분이 하지에게 있으리라는 것은 분명히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