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항복 선언 후 달포가 지나 이제 10월이다. 그 동안 국내 상황 파악에 몰두했는데, 국외 상황도 한 번 점검해 봐야겠다. 한민당과 국민당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지도력을 기대하고 있던 중경 임시정부의 상황부터 살펴본다.


1919년 상해에서 수립된 후 1930년대 들어 중국 남부의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1940년 이후 중경에 자리 잡고 있는 동안 임시정부는 한국 독립운동의 대표적 존재로 널리 인식되었다. 물론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우리가 교육받은 것처럼 절대적 존재는 아니었다. 당시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국내외 일반인들의 인식 속에서는 임시정부가 대표적 존재였다.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대표적 존재로 인식된 중요한 이유 하나는 상해의 지리적 조건에 있었다. 1919년 당시 중국이 군벌로 쪼개져 있는 상황에서 최대 개항장인 상해는 국제적 도시였다. 국내에 비교적 가까우면서 만주, 연해주, 미국 등에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 세력들이 쉽게 모일 수 있는 장소였다.


임시정부 소재지로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연해주였다. 만주와 연해주에는 당시 해외 동포의 압도적 다수가 살고 있었는데, 만주에는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던 반면 러시아는 일본과 오랜 숙적이었다는 것이 연해주의 유리한 점이었다. 독립운동의 무장운동 측면이나 대중적 근거를 위해서는 연해주가 상해보다 압도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연해주 아닌 상해로 결정된 데는 1919년 당시의 상황이 작용했다. 1차 세계대전 종결과 3-1운동 발발로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의 가능성에 한껏 들떠 있었다. 그래서 모처럼 열의를 가지고 모여들었는데, 모이기에 가장 좋은 장소가 상해였고, 상해에서 모였다는 사실이 임시정부를 상해에 두기로 결정한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 1919년의 들뜬 분위기가 가라앉고 나서 임시정부가 혼란과 무기력의 침체기에 빠지는 데는 동포 주민의 기반이 협소하다는 위치의 약점이 크게 작용했다.


1920년대 후반 국민당의 북벌로 군벌 할거가 해소되고 장개석 정권이 강화되면서 임시정부는 그 영향권에 들어갔다. 장개석 정권은 임시정부의 거의 절대적인 존립 배경이 되었고, 임시정부는 이에 맞춰 김구의 지도체제로 정비되었다.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대립도 임시정부의 구조에 직접 영향을 끼쳤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중국 내 한국 독립운동은 일본군의 확산에 따라 물적 기반이 축소되면서 연안의 공산당에 의지하는 일부 공산주의자들 외에는 임시정부로 수렴되었다. 1940년 중경에 자리 잡은 후 국민당과 공산당이 원칙적 합작을 지키는 상황 덕분에 임시정부도 넓은 폭의 독립운동가들을 포용할 수 있었다. 1940년대 초반의 임시정부는 그 전 시기에 비해 한국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위상이 뚜렷해졌다.


포용하는 폭이 넓은 만큼 분파적 양상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1945년 초 김준엽, 장준하 등 일단의 학병 탈영자들이 중경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눈에는 이 분파적 양상이 개탄스럽게 비쳐졌던 모양이다. 임정 간부들을 앞에 두고 장준하가 터뜨린 유명한 ‘폭탄선언’을 소개한다. (박경수 <장준하, 민족주의자의 길>(돌베개 펴냄) 162쪽)


“우리는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멀리에서 여러 어른들을 계속 존경하고 사모하면서 이보다 더 행복했을 겁니다. 저 자신은 물론 우리 젊은 동지들은 이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더하면 더했지 조금도 덜하지가 않습니다.

가능하다면 여기를 빨리 떠나 다시 일본군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 지금의 제 심정입니다. 제가 만약 일본군에 돌아간다면 꼭 그들의 항공대에 지원하고 싶습니다. 일본군 항공대에 들어간다면 저는 중경 폭격을 지원하여 여기 임정의 청사에 폭탄을 투하하고 싶습니다.

임정이 이렇게 네 당 내 당 하면서 겨루고 있을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그 많은 사선을 넘으며 이곳을 찾아온 것은 조국을 위하여 죽을 자리를 찾자는 것이지 결코 여러 선배들이 일삼고 있는 당쟁의 이용물이 되고자 해서가 아닙니다. 이것으로 저의 말씀을 맺습니다.”


청년 장준하의 결벽으로만 몰아붙일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중경 단계에서도 임시정부는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던 여운형은 임정 지도력의 한계를 알아보고 있었기 때문에 건국준비위원회를 통해 별도의 지도력을 키워내려 했다. 안재홍 역시 임정의 문제점을 전혀 모르고 있지는 않았겠지만, 임정에 지지를 모아줌으로써 극복의 길을 찾고자 했다. 임정의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그 가치를 무시하지 않는다는 공통의 입장에서 두 사람은 얼마동안이라도 함께 일할 수 있었다.


임시정부의 지도력을 무시하는 공산주의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임시정부의 ‘절대 지지’를 표방한 한민당도 해방 후 임시정부의 역할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비판적 지지’란 말이 우리 사회에서 근년 많이 쓰이고 있는데, 비판적 지지 아닌 지지라면 어떤 의미 있는 지지가 있을 수 있을까? ‘비판적 지지’의 출현은 종래의 줄서기 식 ‘절대 지지’를 벗어나는, 의미 있는 정치의 시작으로 나는 본다.


지금의 시점에서 임시정부를 바라보는 데도 임시정부와 김구의 절대화와 신화화를 벗어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의 표준적 교육과 교양은 너무 경직되어 있었다. 임시정부와 김구의 문제점과 한계를 투철하게 인식할 때 그들의 가치에 대한 올바른 음미도 가능할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