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9. 11. 21:52


오늘은 내 얼굴을 보자 빙긋이 웃으면서 양손을 뻗어 내 얼굴부터 만져보신다. (요즘은 가기 전에 꼭 면도를 한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작별' 말씀을 하신다. "이제 작별할 때가 되었구나." 별로 엄숙한 표정도 짓지 않으신 채로, 너무나 당연한 사실 가르쳐주시는 것처럼 이제 떠나신다는 것이다. 말씀 중에 간병인 여사님이 들어왔다가 듣고 "난 데 없이 어딜 떠나신다는 거예요?" 하니까 답답하다는 듯이 "사람이란 다 떠나는 거야."

"어머니, 떠나시는 게 별로 서운하지가 않은 기색이시네요?" 했더니, "고마운 일이지. 이만큼 있다가 떠나면서 서운해 하면 도둑놈이지." 유머 감각은 한창 시절 못지 않으시다. "어머니, 말씀하시는 걸 봐도 금세 떠나실 것 같지 않은데요?" 하니까 한껏 익살스런 표정을 짓고 "그래? 뭐 좀 더 있을 수도 있지. 그것도 나쁘지 않지."

나중에 나오는 길에 원장님께 여쭤봤다. 작별, 떠남, 그런 말씀 요새 하실 때가 있더냐고. 얼마 전에 얼핏 하신 적이 있다고 한다. 확인이 된다. 어머니 머리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펼쳐지고 있다. 사람을 대할 때 상대에 따라 그중에서 적당한 생각을 꺼내 말씀하시는 것이다. 웬만한 사람들은 '작별' 말씀을 하시면 펄쩍 뛰며 말리겠지. 내가 그런 화제 꺼리지 않고 받아줄 놈으로 인식하고 계시기 때문에 내 얼굴 보일 때 그 생각을 끄집어내시는 것이다.

기억력이 엄청나게 좋아지신 것이다. 10년쯤 전에 기억력이 크게 퇴화하신 후로는 생각을 이렇게 마음대로 넣어뒀다 꺼냈다를 못하셨다. 속으로 굴리는 생각만이 아니라 소리내어 말씀하시던 이야기도 한 번 끊기면 되찾아내기가 힘드셨다. 그런데 지금은 상당한 범위의 생각이 활성화되어 있어서 조금만 자극이 있어도 술술 풀려나오고, 또, 말씀하시는 중에 더 펼쳐지기도 한다. 지난 주 이문숙 선생이 뵙고 "이야기를 자가발전하신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신체 상태도 아주 좋으시다. 근력도 느시는 모양이다. 간병인에게도 듣고, 원장님께도 나중에 따로 들었는데, 며칠 전 간병인이 잠깐 방을 비운 사이에 일어나 앉아 계시더란다. 기운이 좋아지신 것이 반가우면서도, 예상 외의 움직임으로 혹시 다치시는 일이라도 있을까봐 걱정이 된다고 한다.

주변의 의견도 듣고 생각을 좀 해봐야 할 일이다. 우선은 보수적인 입장을 취해 놓고. 지난 겨울 회복이 좋으신 것을 보며 생각했던 일이 있다. 날씨가 풀린 뒤에 회복이 좋으시면 걸음마를 다시 배우실 수 없을지 알아봐야겠다고. 막상 봄이 되었을 때 보니 그 정도까지 바라볼 만큼은 안 된다 생각해서 그냥 접어놓았는데, 지금은 봄과도 또 다르시다. 혼자서 일어나 앉으신다지 않는가.

작년 초 입으로 식사를 근 1년 만에 시작하실 때 틀니를 놓고 잠깐 고민한 일이 있다. 전에 쓰시던 틀니를 넣어드리려 하니까 너무 힘들어하셨다. 그래서 새로 맞춰드릴까 생각했는데, 여러 사람이 말렸다. 이제 틀니가 맞고 안 맞고가 아니라 쓰신다는 것이 너무 힘드실 거라고. 그래서 생각하니, 틀니 없이도 식생활이 충분히 만족스러우시다면 그것을 어머니의 표준으로 생각하면 될 일이지, 젊은 사람 표준으로 강요할 일이 아닐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도 틀니를 포기한 것은 잘한 일이다.

그런데 걸음마는 틀니와 다른 것 같다. 지금도 큰 고통이나 불만 없이 지내시지만, 몸을 조금 더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다면 거기서 얻는 기쁨은 틀니가 식생활을 보태드리는 것과 다른 차원일 것 같다. 지금은 목소리와 말씀으로 한 몫 하며 살아가시는 것인데, 몸놀림을 조금이라도 구사하실 수 있다면... 오늘은 치료사 김 선생이 없었는데, 다음에는 김 선생도 만날 수 있는 날 가봐야겠다. 사실 저 정도 마음이 활발하시다면 몸 움직임과의 균형이란 면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작년 여름 이곳에 오신 후 얼마동안은 색다른 태도와 반응으로 주변 사람들을 재미있게 해주고 인기를 끄셨던 셈인데, 지금은 생각이 원활하시니까 사람들의 개성을 상당 수준 파악해서 그에 맞춰 응대하시는 것 같다. 모시고 있는 동안 지나치는 분들 한 분 한 분 응대하시는 데 책략이라면 책략, 배려라면 배려가 나름대로 곁들여진다. 슬랩스틱 코메디언에서 토크쇼 수준으로 격상되셨다고 할까?

식탁에 앉으신 뒤 떠날 때, 한 차례 크게 당했다. "어머니, 저도 이제 집에 가서 밥 먹을게요." "왜? 너도 여기서 먹지 그러니?" "집에 가서 먹어야 바로 일을 또 하죠, 어머니." 여기까지는 통상적인 진행이다. 그런데 여기서 뜻밖의 말씀을 내 얼굴도 쳐다보지 않으면서 담담히 하시는 게 아닌가. "기협이 네가 가버리면 내가 허전해." 의자를 당겨 옆에 앉을 수밖에. "어머니 허전하시지 않도록 제가 밥을 굶더라도 곁을 지켜드려야죠."

시치미 떼신 표정에서 미미한 회심의 미소를 읽은 것은 내 착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착각이 아니었음을 옆 할머니와의 수작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옆 할머니가 (늘 봐도 순진한 인상이시다.) "아드님 이제 보내주셔야죠. 가서 일도 해야 할 텐데..." 하시니까 당당하게 "내가 가지 말라고 안 그랬어요." 하시는 것 아닌가! 그렇지! 너 가면 나 허전하다고 하셨지, 너 가지 말라고 하신 건 아니니까. 한창 시절에 장난치시던 솜씨 그대로다!

내가 곁에 없다고 진짜로 크게 허전하실 것 같지는 않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 이웃이라면 이웃이고 장난감이라면 장난감인데! 내가 아들이라면 아들이고 장난감이라면 장난감인 것처럼. 그래도 곁에서 더 많은 시간 가지지 못해 아쉬운 것은 내가 그 즐거움을 더 많이 누리지 못하는 것이 아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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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