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츠담 회담의 제일 중요한 결정이 원자폭탄 사용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투하로 핵무기가 ‘사용 가능한 무기’가 되었다. 핵무기가 사용되지 않은 채로 그 성격이 널리 알려졌다면 그 실제 사용에는 큰 저항이 있었을 것이고, 냉전의 성격을 일차적으로 결정하는 역할도 가지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일본이 황인종의 나라였기 때문에 원자폭탄 사용이 쉽게 결정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포츠담에서 최대의 공식 의제였던 독일 처리 방침을 보면 추축국에 대한 증오심이 인종 차이 같은 것과 비교도 안 되게 격렬한 것이었음을 알아볼 수 있다.


유럽 복구를 미국이 적극적으로 도와준 마셜 플랜이 독일의 부흥 여건도 만들어준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사실 마셜 플랜은 1947년 여름에야 시작된 것이었다. 그때까지 2년 동안 미국의 점령정책은 합참명령(JCS) 1067호로 대표되는 소위 ‘모겐소 플랜’이었다. 독일 항복 직후 이 정책이 결정되자 그 집행을 맡은 헨리 모겐소 재무장관이 “이 정책이 내 이름과 얽혀서 알려지지 않기를 빈다.”고 할 만큼 가혹한 정책이었다.


독일의 발전을 무조건 틀어막는 정책이었다. 파괴된 산업시설을 재건하기는커녕 남아있는 공장까지 제거해서 독일을 농업사회로 되돌려 놓는다는 정책이었다. 독일인의 생활수준을 다른 나라들보다 낮게 유지한다는 구체적 지침까지 있었다. 기아와 질병조차 점령당국에 곤란을 일으키지 않는 한 방치한다는 방침이었다.


이 정책에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도덕관이 큰 작용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전을 앞두고 모겐소 장관은 독일의 조속한 부흥과 정상 회복을 목표로 하는 점령정책을 건의했는데, 루즈벨트가 이렇게 반박했다고 한다.


“미국인과 영국인들 중에 지금까지 일어난 일의 책임이 독일인 전체가 아니라 소수의 나치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현대문명의 원리를 침해한 불법의 음모에 전 민족이 참여했다는 사실을 독일인들에게 똑똑히 알려줘야 합니다.”


합참명령 1067호를 작성할 때 그러다가 독일 국민들이 다 굶어죽게 되면 어쩌냐는 말을 누가 하자 루즈벨트는 “그래서 안 될 이유가 뭐요?” 대꾸했다고 한다.


포츠담 회담은 루즈벨트가 죽은 석 달 후에 열렸지만, 그의 정책은 여기서도 관철되었다. 게다가 독일에 대한 소련의 원한까지 여기에 겹쳐졌다. 2천만이 넘는 민간인을 포함해 3천만 가까운 인명을 전쟁에 희생당한, 수백 개 도시와 수만 개 마을을 파괴당한 소련의 원한은 다른 연합국들과 급이 달랐다. 전쟁 마지막 단계에서 독일군 중에는 소련군을 피해 서쪽으로 도망가 다른 연합군을 찾아 항복한 부대들도 있었다고 한다.


폴란드에게 잘려나간 영토를 비롯해 동유럽 지역에 퍼져 있던 1천만 이상의 독일인이 소련 점령군에게 귀국 명령을 받았다. 그중에서 백만 이상이 기아와 질병 등의 이유로 목숨을 잃었다. 나치 시대에 독일인들이 저질렀던 만행을 독일인들이 그대로 당하게 되었으니 정당한 업보로 볼 수도 있는 일이지만, 전쟁이 끝난 상태에서 저질러진 일이라는 점에서 그 야만성이 더 두드러진다.


길고 참혹한 전쟁을 통해 키워진 증오심이 이 야만성의 바닥에 깔려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친일파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문제를 한탄할 때, 전후 프랑스에서 협력자들을 엄격히 처단한 사실과 대비해서 생각하는 일이 많다. 친일파 정리가 미흡했던 것은 참으로 우리 사회에 많은 폐단을 남긴 일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협력자 처단과 대비하는 데는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차이점이 있다.


2차 대전에서 프랑스의 역할에는 애매한 문제가 있었다. 프랑스 본국은 개전 초기에 항복해서 전쟁 말기까지 나치 지배를 받으며 추축국 진영에 협력했다. 드골의 ‘자유프랑스’는 국민에게 선출된 정통성 있는 정부가 아니었다. 초기 자유프랑스의 병력 중 태반이 세네갈, 토고 등 식민지 출신의 흑인이어서 파리 해방 때 앞장서서 행진할 부대를 고를 때도 흑인이 적은 부대를 고르느라 고심할 지경이었다.


프랑스는 얄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에 초청받지 못했다. 전승국 대열에 끼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포츠담 회담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 분할 점령의 주체로 결정된 것은 연합국으로 인정받은 결과다. 그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1940년 7월부터 1944년 8월까지 프랑스를 통치한 비시 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모든 나치 협력을 ‘반 프랑스’ 또는 ‘비 프랑스’적인 것으로 규정해야 했다.


비시 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은 프랑스 정치계만이 아니라 학계에서도 대세이지만, 이것이 현실정치의 필요에 얽매인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지워버릴 수 없다. 국가로서 프랑스의 책임을 회피하는 부도덕성의 지적도 있다. 1995년에 시라크 대통령이 한 연설에서 비시 정부 경찰의 나치 협력을 사과한 일이 있다. 르팽 같은 극우파는 비시 정부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의회 의결에 따라 세워진 비시 정부의 정통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한다는 것은 아직도 프랑스 역사의 짐으로 남아 있다.


프랑스 사회는 나치 협력 문제를 놓고 우리의 친일 문제 고민보다 훨씬 더 많은 고민을 해 왔다. 거기에서 분명히 배울 점이 있다. ‘협력자(collaborateur)’와 ‘협력주의자(collaborationniste)’의 구분이 그런 예의 하나다. 당시의 프랑스에도 파시스트들이 있었고, 그들이 나치 독일에의 항복을 기화로 비시 정부와 프랑스 사회를 파시즘으로 몰아가며 적극적인 나치 협력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이런 ‘협력주의자’들의 범죄성은 민족주의에 앞서 인도주의와 문명의 원리에서 파악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친일 문제 고찰에도 이처럼 보다 보편적 기준을 보강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