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점심 때 <공자 평전> 마무리를 조 선생과 의논하러 돌베개에 들렀을 때 마침 한 사장도 형편이 맞아 셋이 함께 점심을 했다. 돌베개 편집자들의 도움을 늘 절실하게 받아왔기 때문에 스스로 돌베개 전속 필자처럼 생각하고 지내다가 이번에 어쩌다 다른 데서 책을 내게 된 것이 마음에 걸려 있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기회 있을 때 얼렁뚱땅 풀어내는 것이 좋지. "한 사장, 이번에 하다 보니 다른 데서 책을 내게 됐네요? 근데, 딴 데선 영 못 낼 것 같았는데 막상 내 보니까 그것도 괜찮은 맛이 있네요? 조강지처 두고 외도하는 사람들이 좀 이해가 갈 것 같아요." 한 사장, 속으로 못마땅해도 다른 말 할 수가 있나? "네, 그렇죠, 외도 많이 하세요."

저녁때는 책 만들어준 서해문집 분들을 집 근처에서 모셨다. 김 주간, 편집팀 두 분, 그리고 디자인팀 세 분. 사무실에 가서도 다른 출판사들에 비해 편안한 마음으로 즐겁게 일한다는 느낌을 받아 왔는데, 먹고 노는 일은 더더욱 편안한 마음으로 즐겁게 하는 것 같다. 이번 책 만들어준 것은 나로서 워낙 고마운 일이어서 내가 쏘겠다고 청한 것인데, 아첨을 하려면 철저하게 해야 하지 않나. 그래서 '천리마의 뼈' 얘기를 꺼냈다.

<전국책>에 나온 얘기다. 위기 상황에서 즉위한 연나라 소왕이 중흥의 과제를 위해 어떻게 하면 천하의 인재를 불러모을 수 있을까 고심하다가 곽외선생에게 조언을 청했다. 이 때 곽외선생이 꺼낸 것이 천리마의 뼈 얘기였다. 옛날 어느 임금이 천리마를 꼭 구하고 싶었는데 어지러운 세상이라 보물을 감추는 풍조 때문에 천리마 마주들이 모두 숨어 있었다. 한 군데 겨우 찾아내 신하를 보냈더니 아쉽게도 천리마가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런데 천리마 값으로 천금을 가져간 신하가 돌아가신 천리마의 뼈를 오백금에 사 왔다. 돌아온 신하에게 임금이 "아니 그 뼈는 곰국 끓여먹으라고 사온 거야?" 했더니 신하가 "두고 보시라구요." 대답했다. 아니나다를까, 몇 달 안 있어 이 소문을 들은 천리마 마주가 세 사람이나 말 사시라고 끌고 왔다는 얘기다. 이 얘기를 들은 소왕이 곽외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엄청나게 공경해서 대하니까 천하의 인재들이 "곽외선생 정도를 그렇게 대접해? 내가 가면 진짜 끝내주겠네?" 하고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서해문집을 연결해 준 자칭 거간꾼 호박선생은 이 변변찮은 글을 책으로 만들어준 서해문집에게 내가 감격한 이야기를 하면 "저한텐 그렇게 말씀하셔도 서해문집 가선 좀 도도하게 노세요. 필자가 아니라 꼭 거지 같잖아요?" 핀잔인지 훈수인지 베풀어주지만, 나는 정말 내숭을 못 떤다. 이번에 서해문집 너무 고맙다. 책을 만들어주었다는 사실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일이 있어서 가든, 일 없이 그냥 들르든, 거침없이 반가워해 주는 게 너무 기분좋다. 이번에 책 만들 생각 않고 있던 글을 만들어준 것이 천리마의 뼈를 사들이는 꾀라 할지라도, 좋다, 뼈든, 살이든, 넋이든, 있는 원고 다 들고 가서 기분좋은 동네에 팔아먹고 싶다.

외도가 너무 심해져서 살림 다 들어먹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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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