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 씨 집권기에 조선의 나라 꼴이 어떠했는지에 관해서는 엽기적인 이야기가 수없이 많거니와, 이조원(1758~1832)이라는 한 인물이 말년에 겪은 일에서 당시 상황을 단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그가 1792년 문과 장원 후 35년간 엘리트 관료의 길을 걷다가 1827년 2월 호조 판서에서 봉조하로 물러난 것은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에 나서기 열흘 전의 일이었다.

다음 달에 서유규라는 자가 격쟁(擊錚)을 하여 이조원이 그 13년 전에 역모를 꾀한 일이 있다고 고발했다. 당시 서유규의 아비인 초산 부사 서만수가 탐학죄로 옥에 갇혔는데, 서만수는 1814년에도 강동 부사로 있다가 평안 감사였던 이조원의 고발로 파직된 일이 있었다. 서유규는 아비가 이조원의 죄를 알고 있어서 그것을 감추기 위해 이조원 일당이 아비를 탄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황당무계한 이야기다. 역모 사실을 아는 서만수가 고변도 하지 않고 있다가 죄인들의 음모에 희생당하고 있다? 탐학죄로 한 번 파직된 수령이 다시 관직을 얻는다는 것부터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단한 배경을 가진 인물이었던 모양인데, 이후 일의 진행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3월의 일에 관해서는 <순조실록> 27년(1827) 3월 29일자에 이런 기사가 있다.


대호군 김기후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의 나이 구질(九耋)에 가까워 의관을 바르게 하고 죽기를 기다리는 중에 삼가 듣자니, 엄수(嚴囚)한 죄인 서만수의 아들 서유규가 징을 쳐서 원정을 하였는데, 내용인즉 그가 봉조하 신 이조원을 나무라고 욕하는데 매우 장황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 지금 스스로 중죄에 빠져서 방헌(邦憲)에 의하여 장차 처벌을 받게 된 즈음에, 문득 신의 성명을 끌어내어 신의 술책에 빠져들었다고 하는 등의 말로써, 애매하게 무함하고 함부로 감히 할 수 없는 말과 차마 들을 수 없는 내용을 보태어, 갑자기 신의 집안 멸망시키려고 한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서만수는 중죄를 범한 죄수로서 자식을 내어 보내어 징을 울리게 한 것도 이미 용서할 수 없는 죄인데, 게다가 감히 할 수 없는 말과 차마 들을 수 없는 이야기로 방자스럽게 남을 무함하여 경에게까지 미쳤으니 말하기도 통탄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금중에 머물러 있으니 경은 번거롭게 진달할 필요가 없다. 내가 이미 그의 거짓됨과 흉패한 정상을 다 알았으니, 다시는 입에 올리지도 말고 장주(長奏)에도 올리지 말라.” 하였다.


효명세자는 이 고발을 무시했고, 서만수는 4월에 유배되었다가 5월에 죽었다. 그런데 이 문제가 몇 달 후 다시 불거졌다. 8월 4일에 서유규가 다시 격쟁을 했고, 세자는 그를 즉각 유배에 처했다. 그런데 이때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형조 판서와 참의가 그 날로 고발 내용의 조사를 청한 데서 시작해 3사가 총동원하여 이조원의 국문을 청하고 나선 것이다. 같은 내용은 서면으로 올리라 해도 모두 세자와의 대면을 요구하는(請對) 인해전술의 압박으로 나왔다. 세자는 이에 정면 대응, 한동안 체차와 사적 삭제, 유배 등 징계 처분에 바빴고, 그 결과 3사가 텅 비다시피 되었다고 한다.

형조 상서 이후 논란이 계속되던 끝에 7일 후 거물급인 대호군 조정철이 이조원의 혐의를 뒷받침하는 상서를 올리면서 분위기가 반전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튿날 거물 중의 거물 김조순이 가세하면서 세자도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접어들었다.

1814년에 있었던(또는 있었다고 주장된) 일의 내용은 <순조실록> 여러 곳에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일"로만 표현되어 있다. 앞뒤를 맞춰 추측컨대 순조의 병이 심할 때 유사시에 대비한 의논 중에 꼬투리 잡힌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말을 했냐, 안 했냐, 일종의 진실게임인데, 언론이 총동원되어 혐의를 주장한 끝에 안동 김 씨 영수 김조순이 쐐기를 박고 나선 것이다. 8월 12일자 <순조실록> 기사는 이렇다.


영돈녕 김조순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어제 중신 조정철의 상서를 보건대, 이조원의 갑술년 겨울의 패설과 흉서를 성토하기를, ‘그때의 정승이 서로 편지를 왕복하여 엄한 말로 통렬히 배척하였고 신도 그 일을 미리 알았다.’고 운운하였습니다. (...) 대체로 사람을 악역(惡逆)으로 단정하는 것은 천하에서 가장 신중히 해야 할 일인데, 신이 이에 대하여 어찌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상세히 알지 못하는 일을 가지고 그 사이에서 마음대로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 흉서를 신이 직접 보지 않았는데, 신이 어찌 감히 이조원에게 죄가 없다고 하겠으며, 신이 입으로 엄히 배척하지 않았는데 또 어찌 감히 이조원에게 이런 사실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대체로 이 일의 긴요한 점은 흉서가 있었느냐의 여부와 엄히 배척한 일이 있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는데, 이에 따라 이조원이 귀신이냐 사람이냐가 저절로 판단될 것입니다. 대신에게 하문하여 처리하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경의 차자 내용이 이러하니, 한번 대신들에게 묻겠다.” 하였다.


결국 세자는 부왕의 재가를 얻어 8월 16일에 이조원을 유배에 처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후에도 국문 요청이 쏟아졌지만 유배지를 원악도(遠惡島)로 바꾸는 양보에 그쳤다. 흑산도에 안치되었던 이조원이 효명세자가 죽은 후인 1832년 3월 유배지에서 죽자 그의 죄를 더하자는 논의가 조정에 일어나 시체의 목이 잘렸다. 그의 이름은 실록에 꼭 한 차례 더 나타난다. <헌종실록> 원년(1835) 1월 17일자.


이조원의 죄명을 효주(爻周)하고 김기서를 방송(放送)하라고 명하였다.


"효주"란 지워버린다는 뜻이다. 김기서는 이조원의 '역모'에 연루된 사람이었다. 이조원의 옥사는 왕이 바뀌자 바로 무효로 돌아갈 만큼 허술한 것이었다.

부패로 단죄된 일개 지방관의 아들이 원로 대신의 13년 전 '역모'에 관한 정보를 어떻게 손에 넣었을까? 그리고 뭘 믿었기에 격쟁을 하고 나설 수 있었던 것일까? 한명숙 전 총리에게 뇌물을 줬다고 주장하는 곽영욱보다도 더 황당한 고발자다. 그런데 이 고발이 결국 먹혀들어 (고발자 자신은 귀양을 갔지만) 조선조 최고의 관복을 누린 사람의 하나이며 당대의 명필로도 이름을 날리던 이조원이 귀양길에 오른다. 그리고 5년 후에는 시체의 목이 잘리는 수모를 당한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그에 비하면 훌륭한 법치국가다.

이 과정에서 가장 놀라운 현상이 3사 관원들의 행태다.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의 3사는 조선 왕조에서 왕권의 보루였다. 이조원에게 설령 잘못이 있었다 하더라도, 아무 탈 없이 고위직을 지켜 온 원로 대신의 13년 전 일이 국가에 대해 '강력하고 현존하는' 위협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일에 3사가 총력을 기울여 쏟아부은 극간(極諫)은 왕과 세자를 몰아붙이는 '정치공세'였다. 왕권에 아무 보루도 남아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해준 것이다.

이조원의 옥사는 국왕에게조차 세도정치에 대항할 수단이 남아 있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효명세자는 3년간의 대리청정을 통해 왕권 부활을 꾀했으나 결국 의문스러운 죽음에 이르고(1830) 세자의 노선에 호응한 신하들은 그 후 모두 혹독한 보복과 탄압을 받았다. 4년 후 세자의 아들이 8세의 나이에 왕이 되었지만 15년 재위기간 동안 안동 김 씨 세도에 대항할 수 있는 길은 똑같은 성격의 경쟁자 풍양 조 씨 세력에 의지하는 것뿐이었다.

헌종 때가 되어서는 왕조의 틀조차 지키지 못하게 된 상황을 동궁(東宮)이 빈 데서 알아볼 수 있다. 1849년 헌종이 23세에 죽을 때까지, 그리고 1863년 철종이 33세에 죽을 때까지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은 채로 있었던 것은 정상적 왕조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후계자의 위치를 분명히 해놓는 것은 계승을 둘러싼 분쟁 소지를 없애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제왕 교육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었다.

병약한 헌종이 재위 15년이 되도록 아들을 얻지 못했다면 입양으로라도 세자나 세제를 세워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입양 대상으로 가장 유력한 후보였던 이하전(헌종이 죽을 때 8세)을 안동 김 씨 측에서 꺼렸던 모양이다. 헌종이 후사 없이 죽었을 때 안동 김 씨는 순원왕후 김씨를 통해 전연 예상 밖의 인물 이원범을 후사로 정했다. 이하전은 13년 후 21세의 나이에 역모 혐의로 사사당했고, 고종 즉위 후에 신원되었다.

왕실의 예법은커녕 양반다운 교육도 받지 못한 '강화도령'을 왕위에 앉힌 것은 똑똑하고 힘 있는 왕을 귀찮아 한 당시 세도가의 취향을 보여주는 일이다. 그런데 이 일을 어쩌나. 전주 이 씨 집안에서 만만한 인물 골라온다고 골라온 것이 죽은 헌종의 아저씨 항렬이었다. 지난 회에 이야기한 조선조 마지막 예송 '천묘(遷廟)' 논쟁이 여기서 파생되었다. 종묘에는 지금 왕의 4대조까지를 소목(昭穆)이라 하여 별도의 자리에 모시는데, 철종이 즉위하자 4대조를 어디에서 자를지가 문제가 된 것이다. 집안 항렬을 기준으로 할 것이냐, 왕위 계승을 기준으로 할 것이냐 하는 문제인데, 이 논쟁도 시비에 관계 없이 정통 노론을 자임하는 안동 김 씨 세력이 반대파를 몰아내는 데 이용되고 말았다.

철종이 33세에 죽을 때까지 후사를 세우지 못한 것은 진짜 심했다. 철종은 아들을 다섯이나 얻었는데 모두 일찍 죽었다. 종실 중 유력한 후보였던 이하전은 사사당했다. 권력 독점이 절정에 달한 안동 김 씨는 "이대로!" 분위기에 빠져 있었고, 풍양 조 씨를 중심으로 한 견제세력과의 긴장관계에만 몰두해 후사를 세우는 것과 같은 국체의 기본까지 소홀히 하고 있었다.

60갑자의 마지막 해인 계해년(1863) 연말을 앞두고 철종이 후사 없이 죽었을 때 조선 왕조는 멸망에 아주 가까이 가 있는 상태였다. 관료체계는 더 이상 부패할 여지가 없다고 할 만큼 철저하게 부패해 있었고 민란이 무차별적으로 터져나오고 있었다. 북경이 서양 오랑캐들에게 유린당한 소식도 들어와 있었다. 흥선군 이하응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는 풍양 조 씨 측의 획책을 방관하며 안동 김 씨 권력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