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3. 30. 14:54
(토요일 오후에 갔다가 저녁 후 일죽의 허방 선생을 찾아가 하룻밤 묵고 일요일 아침에 다시 가 뵈었다. 점심 후에 여주의 이모님을 모셔왔다. 원래 생각은 하루이틀 더 가까이 지내면서 살펴보고 싶었는데, 일요일 저녁때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천 시내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들어가니 3시. <불광> 남 보살님이 윤시내 선생님 내외분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앉아 있었다. 윤 선생님은 몇 해 전 어머니 생각하는 글 <불광>에 올린 것을 감명깊게 본 일이 있는 분인데, 귀국한 길에 어머니 뵈러 와주신 것이다.

새로 뵙는 두 분과 인사도 나누기 전에 어머니 인사말씀부터 들어야 했다. "야, 이 쌍누므 자식아!" 내 얼굴이 보이면 얼굴에 웃음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보통이기는 한데, 이 때는 그 웃음에 장난기가 철철 흘러넘치고 있었다. 세 분이 30분 가량 모시고 있으면서 기분을 무척 고양시켜 드린 것도 같고, 든든한 자식 있다는 사실을 과시하고 싶은 마음이 부쩍 일어나신 것 같기도 했다.

쩔쩔 매는 시늉으로 "네, 어머니. 쌍누므 자식 왔습니다." 하는 꼴을 흘낏 쳐다보고는 남 보살님에게 눈길을 돌리고 본격적인 아들 자랑으로 들어가신다. 저 놈이 천하에 미련한 놈이다, 미련해서 내가 제일 좋아한다, 마치 아들이 불쌍해서 좋아해 주시는 것처럼 으스대신다.

"미련한 게 좋다!" 역설 좋아하시는 취미는 어쩔 수가 없다. 좋은 거 좋아하는 보통사람들 따라하면 자존심이 상하시는 것 같은 이 역설 취미가 참 질색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부동산 투기를 해도 남들이 인식 못하는 장점이 있는 땅이라야만 마음내켜 하셨다. 아니, 땅의 가치를 남들이 인식 못하는 데만 찾아다니면 땅값은 누가 올려주는데?

쓰러지시기 전까지 절에서 굳이 지내시던 것도 그렇다. 남들 다 하는 것처럼 편안한 아파트에서 살지 못하시는 이유가 뭔지? 병원에 모신 뒤에도 꼼짝 못하실 만큼 기력이 떨어지시기 전까지 불쑥불쑥 "나 집에 갈 테야." 사람들을 난감하게 만들곤 하신 것도 같은 맥락으로 생각한다. 주어진 여건을 편안하게 받아들이지 못하시는 마음.

지지난 겨울 회복되시면서부터 마음이 참 편안해지셨다. 이곳으로 옮겨올 때도 "기협아, 나 여기가 좋은데 여기 그냥 있으면 안 되니?" 하셨다. "네, 좋으실 대로 하세요. 그런데 저쪽도 괜찮은 데거든요? 가 보고 마음에 안 드시면 도로 모셔올께요." 하고 모셔왔는데, 도착한 두 시간 후 말씀, "야, 여기 참 좋다. 여기 그냥 있어도 되는 거니?" 그 후 9개월 동안 지내면서 다른 곳 생각이 나실 때도 있고 이곳을 불편하게 느끼실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어진 현실을 아끼는 마음, 그에 대해 고마워하는 마음이 가득차 일상적 굴절에 크게 흔들리지 않으시는 것 같다.

이 아들 놓고도 이런저런 좋은 점이 있어서 좋아한다 하시지 못하고 미련해서 좋아한다고 뒤집어서 말씀하시는 데는 종래의 비판적 습관도 작용하는 것이겠지만, 이제 그리 치우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손자가 예뻐 어쩔 줄 모르는 할머니가 "우리 보배둥이!" 하기보다 "우리 똥강아지!" 하는 마음. 역설을 위한 역설이 아니라 더 강한 긍정을 위한 역설이다. 그래, 미련퉁이 노릇 해드리지, 뭐. 똥강아지 노릇 하는 애들도 있는데.

남 보살님은 어떤 사람인지 상당히 분명한 기억이 일어나시는 것 같고, 윤 선생님 내외분은 정확한 파악이 안 되는 상대겠지만 깨끗하고 따뜻한 인상이 역시 편안하게 느껴지시는지, 자신만만하게 쇼맨쉽을 발휘하신다. 내 어떤 태도를 상대방이 좋아할지 정확하게 파악해서 그에 맞춰주는 솜씨가 능수능란하시다. 이렇게 사교 잘하시는 모습을 예전에 뵌 적이 없다. 지나치게 강하시던 자의식을 가라앉히고, 사람이 사람을 아끼고 잘해주려는 본능이 거침없이 살아나게 된 것이다. 성불은 몰라도 보살도에 이르신 것은 분명하다.

세 분 손님은 어머니와 함께 있는 한 순간 한 순간을 편안하고 즐겁게 누리셨을 것이다. 당신이 살고 있는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의 집에 이 손님들을 맞아들이신 것이다. 손님을 즐겁게 해주려고 별난 음식을 내오고 별난 대접을 한 것이 아니다. 내 마음자리가 이렇게 즐겁고 편안하니, 같이 누릴 만하면 누립시다, 하고 열어주고 보여주신 것이다.

어쩌다 한 번 찾아온 이 손님들은 어머니를 도반(道伴)으로 여겨 어머니의 마음자리에 대한 어떤 기대를 품고 찾아온 분들이다. 이런 분들 응대하는 것은 그 기대에 맞춰 하나의 역할극처럼 해낼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 어머니의 응대가 한바탕 역할극이 아니라 진면목이라는 사실은 같이 생활하는 분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알아볼 수 있다.

간병인 송 여사님은 딸처럼 대하신다. 두 분 사이의 수작이 자연스러운 것을 보면 긴 생활을 통해 든든하게 자리 잡은 관계다. 다른 간병인들도 어머니를 좋아하고 잘해 드리는 분들이 많지만, 송 여사와는 각별한 교감이 이뤄진 것 같다. 순환근무제 때문에 직접 모시는 위치는 곧 바뀌겠지만, 그렇게 마음이 통하는 분이 가까이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복이다. 그러고 보면 송 여사의 이 방 근무가 꽤 길었던 것 같은데, 가능한 한 길게 붙여놓는 배려를 원장님이 베푼 것일지도 모르겠다.

직접 모시는 간병인 외에 직원 중 어머니 생활에 가장 많이 관여하는 이가 원장님일 텐데 원장님을 대하시는 태도를 봐도, 정말 모자라지도 않고 지나치지도 않는다는 느낌이다. 몇 분을 살펴드리는 간병인과 요양원 전체를 돌보는 원장의 입장 차이를 정확하게 이해하시는 듯, 원장님과 마주칠 때는 다정하면서도 정중한 선을 지키시는 것 같다. 젊은 간호사들에게는 동네 아이들 대하는 것처럼 가볍고 편안한 느낌.

더러 다른 할머니들과의 접촉에서는 더 다양한 태도가 나타나신다. 여기 대해서는 더 관찰한 뒤에 한 번 세밀한 묘사를 하는 것이 좋겠다. 조금 복잡하기 때문에 섣불리 그리려다가는 그림이 잘 안 될 것 같다. 아무튼 다양한 특성을 가진 할머니들 대하시는 방법을 보면 정말 머리가 좋으시다는 생각이 든다. 기억력에 제한이 있는 만큼 사고력이 더 원활하실 수 있는 것인지?

일요일 오후에는 이모님과 편안한 한 때를 가지셨다. 이모님은 전번 방문 때까지도 "울 언니 진짜 살아나신 거야?" 하는 눈치로 뒷전에서 관찰하는 편이었는데, 그 날은 그냥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았다. 이모님이 전보다 더 편안하게 느끼실 만한 점이 있었을까 생각해 보니, 어머니의 표현 폭이 더 넓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내 기준으로만 봐서는 포착하기 힘든 변화를 다른 분의 반응에 비춰보면 더 잘 파악되는 면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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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