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르치는 일을 좀 별난 방식으로 시작했다. 교실에서 하는 수업이 아니었고 학생이 단 한 명이었다. 일본 점령기 때 아버지가 친구의 첩에게 표준어를 가르쳐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손수 하시기 불편했던 아버지가 열네 살이던 내게 그 일을 맡겼다. 그 여자에게 백화문 읽기와 말하기를 가르치는 일로 보수를 받았을 뿐 아니라 나 자신 배우는 것이 많았다.
말하기 쪽은 쉬웠다. 광둥어를 쓰는 학생에게 같은 내용을 표준어로 바꿔주는 일이 내게도 재미있었다. 읽기 쪽을 위해서는 준비를 좀 하고 중학교 교과서를 사용했다. 교과서의 백화문은 아버지에게 배운 고전한문과 달랐기 때문에 가르치는 방식을 새로 만들어야 했다. 그 일을 통해 나도 새로 배우는 것이 있었다.
가르치는 자세의 준비가 대학 1학년 때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기숙사에서 우리는 식민지배의 해악을 토론하면서 마르크스와 레닌에 관한 글도 좀 읽었다. 나는 <공산당선언>까지 읽어보았다. 그때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 눈에 띄어 라디오 말라야의 방송극에서 박서 역할을 [<동물농장>에 나오는 수레 끄는 말 박서는 성실하고 충직한 노동자의 역할이다.] 맡기도 했다. 친구들이 더러 마르크스에 관해 물을 때 두 책을 다시 읽어보고 마르크스는 스탈린의 소련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말해주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친구들이 따져 물을 때는 설명하기가 꽤 힘들었다. 그 설명이 그럴싸하게 들렸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는 것이 넉넉해야 제대로 가르칠 능력이 된다는 사실은 분명히 깨달았다.
그 무렵에는 역사가 과거 그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남아있는 자료에서 뽑아내는 사실과 해석일 뿐이다. 새로 발견되는 자료가 있으면 역사를 새로 써야 한다. 말라야대학에서 수업을 시작할 때 1500-1800년 간의 동아시아사를 문학부 교양과목으로 맡았다. 지식 기반을 넓히고 서양 지배에 대한 지나친 강조를 완화하려는 우리 학과의 시도였다. 강의는 영어로 진행했다. 지역의 어떤 언어도 필요 없는 강의였다.
내 관심에 따라 명나라 청나라의 역사에는 중국 자료에서 뽑은 세부 내용을 넣었는데, 일본사와 한국사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적절한 대목에서 세 나라의 역사를 포르투갈인과 스페인인들의 활동, 그리고 네덜란드와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그들을 우회해 중국과 일본에 접근한 상황과 연결해 설명했다. 서양인의 활동이 아무리 역동적인 것으로 보이더라도 결국 동아시아사에서 주변적 요소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그렇게 설명함으로써 확인해줄 수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유럽 근대사에 더 익숙해서 그 강의를 하던 7년 동안 비슷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 중국 자료가 중국인의 자만심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 자만심 때문에 호된 대가를 치르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이다. 중국의 지배자들이 얼마나 교역을 경시하고 남중국해의 전략적 가치를 모르고 있었는지 해마다 설명해야 했다. 중국에 대륙만 생각하던 북방인과 바다를 향해 열린 자세를 취하던 남방인 사이의 차이가 있었음을 그 강의를 하면서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가르치는 일을 통해 중국사의 중요한 한 시기를 바라보는 시각을 다듬어냈다.
기초가 되는 전통들 Different traditions as foundation
배스틴 교수로부터 학과장직을 넘겨받은 후 똑같은 경험을 되풀이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말라야 역사에 더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국민으로서 내 의무로 여겼다. 그러나 배스틴 교수가 석사반에 도입한 “역사학의 이론과 방법” 과목도 계속할 필요가 있었다. 나 자신 많이 생각한 주제는 아니었으나 그 필요를 강하게 느낄 때가 더러 있었다.
예를 들어 난징에서 공부할 때 마르크시스트 사관을 중국사에 적용하는 데 대한 민족주의 역사학자 먀오펑린의 극단적 비판이 기억난다. 그에 비해 나중에 홍콩에서 만난 치엔무(錢穆, 1895-1990)는 전통주의자이면서도 포용적이었다. 사마천과 반고가 이천 년간 지켜질 역사서술의 기준을 세워놓은 사실을 중국고대사를 공부하면서 배웠다. 중국사의 특이한 연속성을 보장해준 문서 작성을 위한 사관(史館)이 당나라 때 세워졌다. 중국에서 사실과 해석이 뒤섞이게 된 사정을 그렇게 알게 되었다. 그 덕분에 대학원생이던 1957년 중국학 잡지 <대(大)아시아 Asia Major>에 내 첫 논문 “구오대사(舊五代史)와 오대(五代) 시기의 역사서술”을 발표할 수 있었다. 수집된 문서와 정사 내용의 비교를 통해 결론을 끌어낸 논문이었다.
역사학의 이론과 방법 강의를 맡으면서 역사학자 지망생들에게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는 두 권의 책으로 시작했다. 마르크 블로크의 <역사가의 직업>과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였다. 나는 학생들에게 역사서술을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방법으로 과거를 기록하는 서로 다른 문화와 문명의 맥락 속에서 이해한다고 설명했다. 학생들이 어려서부터 서양 역사학에 익숙했으므로 그리스와 로마의 출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를 읽으면서 그들이 유럽 역사서술에 그토록 큰 영향을 끼친 이유를 생각해 보았었다. 두 사람에 관한 강의는 학생들이 좋아했다. 로마에 관해서는 흥미가 덜했으나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를 제국주의자의 야만인 인식으로 설명하는 데는 관심을 보였다. 대체로 정치와 군사에 치중하는 경향이 분명했고, 헤로도토스를 더 좋아하는 학생이 많았다. 전쟁과 평화를 넘어 보다 넓은 범위에서 인간의 조건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학생 중에는 힌두교인도, 무슬림도, 기독교인도, 불교도도 있었고, 근대적 대학에서는 어느 신앙도 종교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사건에서 종교의 역할이 클 때가 많고, 역사기록 방법에 끼치는 영향도 분명하다. 기록에 작용한 신앙의 영향을 논할 능력이 내게 없다는 사실은 학생들도 알았다. 그러나 각 종교가 사건의 전개에, 그리고 그 해석 방법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는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여러 시대에 세계 여러 곳에서 작성된 연대기와 기사들의 성격을 더 공부했다. 성서와 경전, 그리고 종교인들의 명상 기록이 과거사의 전개에 어떤 작용을 했는지 더 주의를 기울였다. 그런 노력으로 내가 더 훌륭한 사람이 되지는 않았으나, 모든 사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가르치는 일을 통해 공부에 큰 도움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그러다 보니 잘한 일인지 어떤지는 몰라도 때때로 내가 더 공부하고 싶은 주제를 가르치려고 나서는 일이 있게 되었다.
이 경험이 과거를 연구하려고 나선 길에서 또 하나 진전이었다. 10세기 북중국 상황을 논문으로 쓰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박사과정 공부를 통해 무엇을 어떻게 얻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그때까지 내가 받은 훈련은 근대 역사학이었는데, 내 연구의 자료는 중국과 일본 학자들이 개발하고 서양의 중국학 연구자들이 근대화한 방법으로 연구된 것이었다. 나는 그 방법에 훈련이 없었다. 논문 쓰는 데 3년 시간이 있었는데, 유학자들의 기록을 이용해서 중국인 아닌 오늘의 독자들이 읽을 수 있는 역사를 써내기 위해 중세사라는 분과의 방법론을 그 시간 내에 익혀야 했다.
이 상황은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내 논문은 제출한 대로 출판되었다. 중국학 잡지들 외에 <잉글리시 히스토리컬 리뷰>와 <아메리칸 히스토리컬 리뷰>에 서평이 실렸다. 이론과 방법 강의를 맡았지만, 그 강의를 함으로써 내가 이론가가 되지도 않고 방법론 전문가가 되지도 않았다. 나 자신이 의거한 ”이론과 방법“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았고, 내가 어떤 종류의 역사학자인지 학생들의 질문을 받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그런 식으로 가르치면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나 나름의 시각을 키워냈다. 훌륭한 전문적 역사학자가 되는 길은 아니라도, 현재 속에서 과거를 찾아내는 자세를 다듬어주었고, 경제학, 정치학, 인류학과 사회학, 고고학, 언어학 등 다른 학문분야에서 얻을 수 있는 도움에 개방적인 입장을 만들어주었다.
장소를 옮겨도 따라오는 중국인 정체성 Chinese identities can travel
말라야대학 사학과 학과장을 맡을 당시 나는 근대 동남아시아사에 부차적 관심을 가진 전근대 중국사 연구자로서 말레이시아라는 이름의 새 연방을 지지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지역의 현실에 관여하다 보니 내가 새 국가의 역사학자로서 제 몫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연구를 해야 하는지 절실하게 생각되었다.
내가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영역은 말레이시아,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나라들에 큰 인구집단을 만든 중국인 이주 현상이었다. 지역 역사학에 내가 할 수 있는 공헌은 말라야 일대의 중국인 이주 현상의 연구라고 생각했다. 나 자신은 말레이시아의 중국계 주민집단에 집중하고 제자들에게 말레이국가들을 비롯한 역사의 다른 측면들을 권하려 했다.
1965-66년에 일어난 일들, 베트남의 열전과 수카르노정권의 붕괴, 뒤이어 중국의 문화혁명이 동남아시아의 정치 지형을 바꿔놓았다. 지역 정세에 대한 내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중국에 대한 내 이해도 불안해졌다. 두 개 선택지가 남아있었다. 해외 중국인집단에 집중하는 것이 하나의 길이었다. 그러나 중국사 연구자로 행세하는 사람으로서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계속 살펴볼 필요도 있었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능력을 키워낸다면 중국과 중국사의 특수성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몫을 맡을 수 있을 것이었다.
물론 해외중국인의 연구가 쉬운 길이었다. 학부생 시절 해협식민지에 온 중국 개혁가와 혁명가들에 관한 글을 쓰기 전에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중국인에 관한 WJ 케이터의 1936년 연구와 빅터 퍼셀의 <말라야의 중국인 Chinese in Malaya>를 읽으며 관심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후 4년간 그 방향 공부를 계속하지 않고 고대사에 빠져 지냈다.
내가 강의를 시작할 무렵 중국사와 관계된 동료로는 19세기 영국의 대 중국 정책을 연구하던 렌 영(Len Young)과 대륙 방면, 특히 티베트와 신장에서 영국과 중국의 접촉을 연구하던 앨러스테어 램(Alastair Lamb, 1930-2023)이 있었다. 나는 1500-1800년 명-청 시대를 초기근대사로 강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학교 밖 사람들이 내게 듣고 싶어 한 것은 새 국민국가 안에서 해외중국인의 위치와 장래였다.
반공 선전가들이 그 주제와 관계된 모든 것을 정치화하려 들던 때였다. 결백을 스스로 입증하지 못하면 나를 좌익으로 몰아붙일 기세였다. 또한 ”애국 해외중국인“을 향한 중국어 선전문에도 잘못된 내용이 많았기 때문에 바로잡기 위해 <남양 중국인 약사 A Short History of the Nanyang Chinese>를 썼다. 이 방향 공부에 큰 도움이 된 것은 모리스 프리드먼(Maurice Freedman, 1920-1975), 톈루캉(田汝康, 1916-2006)과 G 윌리엄 스키너(George William Skinner, 1925-2008), 세 사람이었다. 셋 다 인류학자로, 프리드먼은 남중국과 남양 사이의 관계에 관한 출판된 자료를 활용했고, 톈루캉과 스키너는 사라왁과 태국에서 여러 해 필드워크를 수행했다.
말라야의 중국인 연구를 시도하며 보니 모든 것이 지역 정치와 얽혀 있었다. 푸젠이나 광둥 출신이 아닌 나는 그쪽 동향(同鄕) 조직에 속하지 않았다. 그 차이 위에 20세기 초 이래의 중국 정치가 덧씌워진 결과, 무엇을 어떻게 쓰든 이쪽 아니면 저쪽의 오해를 피하기 어려웠다.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나는 넓은 관점을 취했다. 지역 내 각국의 정치와 그 나라 중국인집단의 경험을 비교했다. 그 결과가 말라야의 역사학자로서 내 입장을 강화해 주지는 못했다. 그래도 각 집단이 각자의 정체성을 어떻게 형성해 왔는지, 싱가포르와 말레이국가들의 중국인이 다른 곳 중국인과 어떻게 다른지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한편 15세기 초 명나라 함대의 인도양 항해에 관한 내 연구는 중국 밖의 중국인의 또 하나 측면에 초점을 잡아주었다. 10세기 남중국의 해상교역 의존과 송나라의 함대 건설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쿠빌라이칸이 이 함대를 남중국해와 동중국해에서 활용한 것이 백년 후 정화 함대의 배경이 되었다. 명나라 영락제의 믈라카 술탄국 지원에 관한 연구를 발표하면서 중국이 대외관계에 조공체제를 이용한 방식을 이해하게 되었다.
존 K 페어뱅크의 <중국의 세계질서 Chinese World Order>에 이 주제의 글을 부탁받으면서 전통적 국가관계의 영역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면서 주류 서양 담론에서 벗어나는 중국 밖의 중국의 다양한 모습을 펼쳐볼 의욕이 일어났고,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중국 문화혁명의 의미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요란한 사태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현대 중국에 관한 자료에 접근할 길이 없는 나는 내버려진 느낌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