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 헌트는 18세기 말 유럽 혁명기를 연구한 책에 <인권 발명의 역사>(Inventing Human Rights: a History, 2007)란 제목을 붙였다. “발명이란 말은 홉스봄의 <전통의 발명>(1993)을 떠올려 준다. 불변의 진실로 여겨 온 대상을 하나의 역사적 현상으로 재해석한다는 뜻을 담은 말이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된 21세기 상황에서는 근대세계에서 인권을 절대시해 온 시각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남용의 위험을 피하고 인권의 본질을 지켜내기 위해 거품을 빼야 하는 것이다. (재산권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인권의 다른 측면을 위협하는 문제가 오-남용의 대표적인 예다.) 미국 독립과 프랑스혁명 과정에서 갓 태어난 인권의 미숙한 모습들을 돌아보며 거품과 본질을 가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헌트의 책이다.

 

사람대접을 위해 어떤 자격이 필요했나?

 

프랑스 인권선언(1789)의 정확한 이름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이다. 인간시민이 따로 나올까? 행위의 주체로서 적극적 권리를 가진 시민과 보호받을 소극적 권리만을 가진 인간을 별개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참정권이 대표적인 적극적 권리다. 참정권의 범위가 변해 온 역사를 살펴보면 인권을 누릴 모든 사람에 포함되기 위해 어떤 조건이 필요했는지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초기 참정권 제한의 여러 기준 가운데 제일 먼저 주목받은 것은 종교였다. 영국에서는 가톨릭이, 프랑스에서는 개신교인이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비기독교인인 유대인은 어느 나라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무렵에는 종교의 자유가 자리 잡아 가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대혁명 전에 루이 16세의 관용 칙령”(1787)이 나와 있었다. 구교와 신교 사이의 참정권 상호 배제는 오래가지 않았고, 그 연장선 위에서 유대인에게도 참정권이 부여되었다.

 

종교 다음으로 주목을 끈 기준은 재산이었다. 미국 독립 때 간판 구호 하나가 대표 없이 세금 없다!”였다. 뒤집어 말하면 세금이 없으면 대표도 필요없다는 말이다. 재산 기준의 철폐는 백여 년에 걸쳐 더디게 진행되었다.

 

지금 사람에게는 재산에 따른 참정권 제한이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따져보면 일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 세금을 통해 사회에 공헌하는 사람들이 사회 운영에 권한과 책임을 가진다는 것이다. 세금 안 내는 사람들도 인간으로서 소극적 권리는 누리지만 시민의 적극적 권리까지 가질 필요는 없다고 당시 사람들은 생각했다.

 

주변부에서 도입이 시작된 여성참정권

 

종교나 재산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배제하고 철폐에도 더 오랜 시간이 걸린 기준이 성별이다. 대혁명 당시 일각에서 여성참정권 주장이 나왔지만 공론화되지 못했다.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주권국가 아닌 식민지정부나 지방정부에서 조금씩 채택되기 시작했다.

 

1869-70년 미국의 준주(territory; 아직 주-state-로 편제되지 않은 새로운 영토의 임시 행정조직) 와이오밍과 유타에서 여성참정권이 채택되었다. 아일오브맨(1881), 뉴질랜드(1893), 남오스트레일리아(1894) 등 영국 식민지들이 뒤를 이었고, 유럽 본토에서는 러시아의 대공국이던 핀란드가 1906년 대열에 합류했다.

 

주변부와 식민지에서 여성참정권이 먼저 도입된 것은 중심부와 본국보다 사회경제적 변화가 빨랐기 때문이다. 저개발지역의 유입 인구 중에는 독신 남성 비율이 높고 독신 남성은 정책 선택에서 빠른 변화를 원하는 경향이 있었다. 예컨대 1860년대 와이오밍의 독신 남성들은 원주민(인디언)에 대해 공격적인 정책을 선호했다. 이런 투기세력의 과잉 대표를 막기 위해 가정을 꾸리는 보수적인사람들이 여성참정권을 도입한 것이다.

 

주권국가의 여성참정권 도입은 1913년 노르웨이를 필두로 1919년 독일까지 대다수 유럽국에서 이뤄졌고 1920년 미국이 뒤를 따랐다. 뒤처졌던 영국과 프랑스에도 1928년과 1944년에 도입되었고, 2차 대전 후 독립한 나라들은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1953년 유엔총회에서는 '여성참정권 협약'이 채택되었다.

 

1910년대 여성참정권 확산은 세계대전 때문이었다. 전쟁은 두 측면에서 여성참정권 도입의 필요를 제기했다. 한편으로는 여성 인력 동원을 위해서였다. 가정 안에 묶여 있던 여성의 역할이 생산활동과 사회 운영에 필요하게 된 것이다.

 

한편 평화운동의 발전이 여성참정권을 불러냈다. 극도로 참혹해진 전쟁 양상 앞에서 국가는 이 전쟁을 끝으로 다시는 전쟁을 벌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 했고, 그 약속의 가장 확실한 표현 하나가 여성참정권 도입이었다.

 

재산, 성별... 이제는 연령 기준이 숙제

 

아직까지 가장 많은 사람의 참정권을 가로막고 있는 기준이 연령이다. 2차대전 종전 당시 대부분 국가의 선거권 연령 기준은 20세였고 1970년대부터 하향이 시작되어 지금은 대부분 18세다. 16세까지 내려간 나라들도 있다.

 

선거 연령의 하향 추세 속에 1986년 인구학자 폴 데미니가 파격적인 주장을 내놓았다. 연령 제한을 아예 없애고 갓난아기까지 투표권을 주자는 것이다. 이 주장에 호응하는 참정권 확장 운동을 데미니 투표권(Demeny voting)’이라 한다.

 

갓난아기까지? 엉뚱하게 들린다. 그러나 백여 년 전에는 여성참정권도 엉뚱하게 들렸던 사실을 기억하자. 상황에 따라 온갖 제한이 있다가 서서히 풀려온 것이 민주주의 발전과정이고, 아직껏 풀리지 않고 남아있는 큰 숙제가 연령 문제다.

 

환경 문제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데미니 투표권을 지지한다. 열 살 어린이에게는 정책 선택에서 자원 절약과 환경 보호가 중요하다. 50년 후의 생활조건을 생각해야 하니까. 반면 70대 노인에게는 먼 장래보다 당장의 비용과 불편이 더 중요한 문제다.

 

여기에 사회 노령화 문제가 겹쳐진다. 한국은 2000년경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7%를 넘기고(고령화사회) 지금은 20%(고령사회) 바라보고 있다. 사회 노령화는 생산인구 비율의 감소와 함께 미래에 대한 관점이 좁아지는 문제를 가져온다. 목전의 득실에 얽매이는 경향의 연령층이 너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어린이참정권 시행을 위해서는 영-유아의 대리투표가 필요한 만큼(데미니는 부모가 반 표씩 행사할 것을 제안했다.) 직접선거 원리에 저촉되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참정권의 보편성에 비하면 지엽적인 문제다. 많은 부모가 대리투표 행사를 위해 자녀 입장을 조금이라도 더 숙고할 것을 기대한다면, 그 자체가 정치에 좋은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20세기의 평화와 21세기의 평화

 

정치의 첫째 기능이 자원 배분의 결정이다. 21세기의 우리는 자원의 가치를 전과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 백 년 전 사람들은 개발된 자원만을 배분의 대상으로 생각했다. 미개발 자원은 무한한 것이라서 경제적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제는 오염되지 않은 천연상태의 자원이 더 소중한 것이 되고 있다.

 

20세기 사람들은 지구를 이용할 자원의 일부로 보았다. 지구의 자원을 소진하고 나면 더 많은 자원을 찾아 우주로 나갈 것을 꿈꿨다. 19697월 어느 날 닐 암스트롱이 달 표면에 발을 딛을 때, 머잖아 항구적 기지가 만들어질 것을 사람들은 기대했다. 곧이어 화성에도 길이 열릴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50년이 지난 지금은 하나뿐인 지구를 절감하고 있다.

 

20세기의 위기는 세계대전으로 나타났고, 21세기의 위기는 환경과 자원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백 년 전 위기가 인간사회 내부의 갈등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지금 위기는 인간사회와 외부(로 여겨 온) 환경 사이의 갈등에 기인한 것이다.

 

과거의 평화는 인간사회 안에서 싸움을 줄이는 것이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 자연환경을 효율적으로 착취하는 것이 평화의 길이었다. 그러나 21세기의 평화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더 크게 걸려있다. 20세기 초에 여성참정권을 불러낸 것도, 백년이 지난 이제 어린이참정권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도, 똑같이 인류평화에 대한 위협이다.

 

헌트는 인권을 하나의 역사적 현상으로 설명한다. 민주주의 또한 하나의 역사적 현상이다. 그렇게 본다면 인권의 발전도 민주주의의 발전도 고정된 이념의 실현을 향한 외길이 아니다. 주어진 상황에 맞춰 인간사회의 진로를 조정해 나가는 부단한 노력일 것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Jeannette_Rankin#/media/File:Jeannette_Rankin,_Bain_News_Service,_facing_front.jpg 여권운동과 평화운동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 자네트 랭킨(1880-1973). 여성참정권 도입 전인 1916년 미국 최초의 여성 의원으로 하원에 입성했으나 이듬해 대 독일 선전포고 반대로 시련을 겪었고 1940년 하원에 재입성했으나 이듬해 대 일본 선전포고에 반대한 유일한 의원으로 극심한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1960년대 반전운동에 상징적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https://www.amazon.com/Inventing-Human-Rights-Lynn-Hunt/dp/0393331997/ref=sr_1_1?crid=FQNX5AP66N7C&keywords=inventing+human+rights+lynn+hunt&qid=1687958825&sprefix=inventing+human%2Caps%2C270&sr=8-1&asin=0393331997&revisionId=&format=4&depth=1 린 헌트는 <인권 발명의 역사>에서 인권을 하나의 역사적 현상으로 볼 것을 역설한다.

 

https://en.wikipedia.org/wiki/Suffrage#/media/File:SPD-Plakat_1919.jpg 1919년 여성참정권이 갓 도입된 독일의 선거 벽보. “권리도 똑같이, 의무도 똑같이!” 구호가 적혀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Suffrage#/media/File:Anti_Suffrage_Postcard_c.1908_03.jpg 1908년경 여권 반대 주장을 담은 영국 엽서. 여권운동가를 못 생기고 성질 고약한 여편네들로 보던 반대자들 시각이 담겨 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