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럽사의 중세를 암흑시대(Dark Age)’라 한다. 그리스문명과 로마제국의 고대는 빛나는 시대였는데 그 빛을 잃은 시대가 중세였고, 잃어버렸던 빛을 르네상스를 통해 되찾아 근대를 열게 되었다는 뜻이다. <위키피디아>‘Middle Ages’ 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인구의 감소, 도시의 해체, 중앙집권체제의 붕괴, 침략, 종족들의 집단이동 등 고대 말기에 시작된 현상들이 중세 초기까지 계속되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의아한 생각이 든다. “인간의 문명이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발전하게 되어 있는 것 아닌가? 일시적-부분적 퇴행은 가능한 것이겠지만, 어떻게 하나의 문명권이 수백 년 동안 통째로 퇴행할 수 있었던 것일까?”

 

중국사의 흐름을 주변세력들과의 관계에 비추어 정리해 보는 오랑캐의 역사작업 중 양이(洋夷)’의 등장을 앞두고 서양 사정을 간략하게 소개하기 위해 살펴보다가 뜻밖에 깊이 빠져들었다. 유럽사는 근대역사학 연구가 가장 집중된 영역이므로 널리 통용되는 내용은 모두 탄탄하게 다져진 것이리라 생각했는데, 막상 들어와 보니 발이 푹푹 빠진다.

 

무엇보다 터무니없는 것이 이슬람문명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인식이다. 르네상스시대 고전의 재발견이 이슬람세계를 통해 이루어진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이슬람세계의 역할은 창고업자에 불과한 것으로 본다. 그렇게 보니까 암흑시대라는 말을 한다. 문명의 발전은 중세기에도 꾸준히 계속되었다. 그 발전은 동로마제국과 페르시아제국을 중심으로 진행되다가 이슬람문명으로 이어졌고, 우리가 생각하는 유럽, 르네상스를 통해 모습을 바꾸게 될 유럽이 오랫동안 그 진행에 끼어들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Islam#/media/File:Kaaba_Mirror_like.jpg 메카의 카바(Kaaba) 신전

https://en.wikipedia.org/wiki/Islam#/media/File:Medieval_Persian_manuscript_Muhammad_leads_Abraham_Moses_Jesus.jpg 마호메트가 아브라함, 모세, 예수 등 다른 예언자들을 이끌고 기도하는 모습을 그린 페르시아 그림

 

얼마 전부터 서양사의 범위를 새로 생각하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유럽의 역사를 서양사로, 아시아의 역사를 동양사로 보는 종래의 기준으로는 이슬람의 역사를 어디에 넣을 것인가? 유럽중심주의에 입각한 유럽-아시아의 구획을 접어놓고 유라시아 전체를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북아프리카의 지중해 연안 지역까지 넣어서 본다. 대양으로 떨어져 있던 남북 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사막과 열대 지역으로 떨어져 있던 아프리카 중남부는 근세에 이르러서야 인류 역사의 큰 흐름에 합쳐진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Guns, Germs, and Steel , , >에서 농업문명의 전파가 남북 방향보다 동서 방향으로 쉽고 원활하게 이뤄진 사실을 설명했다. 위도가 비슷한 지역으로 나아가야 전파의 발원지와 기후조건이 비슷한 지역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유라시아 대륙이 문명 발전의 주무대가 된 것은 워낙 면적이 넓기도 하지만 동서로 펼쳐진 거리가 다른 대륙들보다 몇 배 길기 때문이었다.

 

근세 이전 유라시아 대륙의 문명 발전은 크고 작은 두 개 영역으로 나뉘어 진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동아시아가 작은 영역이었고,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에서 유럽과 북아프리카까지 나머지 모두가 큰 영역이었다. 동토지대-사막-산악-아열대지대로 이어지는 거대한 장벽이 두 영역 사이를 남북으로 가로지르고 있어서, 각각의 영역 내 교섭에 비해 두 영역 간 교섭이 어려웠다. 우랄산맥-흑해-에게해로 이어지는 유럽-아시아 간 경계보다 더 장벽다운 장벽이었다. 동쪽의 작은 영역도 다른 대륙들보다는 동서 간의 거리가 길 뿐 아니라 서쪽 영역과의 교류가 얼마간 계속되었기 때문에 문명 발전의 중요한 무대가 될 수 있었다.

 

한국사-동양사-서양사의 틀로 짜여 온 우리 사회의 역사교육에서 동양사-서양사의 경계선을 옮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동양사에서는 동아시아의 역사만을 다루고 인도와 중앙아시아로부터 서쪽은 모두 서양사로 묶어서 보는 것이다. 서양사의 무대가 몇 배로 넓어지겠지만 현실적인 문제는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새로 서양사에 편입될 이슬람권-힌두권 영역은 어차피 지금까지 역사교육에서 비중이 아주 작았으니까. 문제는 서양사의 시야를 유럽으로부터 이 새로운 영역으로 넓히는 데 있다. 유럽중심주의를 벗어나는 것이다. (이와 가장 비슷한 지역 구분의 사례로 도널드 라크의 <Asia in the Making of Europe 아시아가 유럽에 끼친 영향> 11(1965) 서론에서 인더스 강으로부터 동쪽의 지역과 문명들을 아시아로, 슬라브세계 서쪽의 국가와 민족들을 유럽으로설정한 것을 보았다. 동유럽과 러시아, 그리고 이슬람세계는 그 중간지대로 본다고 했다.)

 

https://en.wikipedia.org/wiki/Islam#/media/File:Islam_percent_population_in_each_nation_World_Map_Muslim_data_by_Pew_Research.svg 국가별 무슬림 인구비율. 역사 속의 이슬람 문명권 범위가 비쳐 보인다.

 

 

2.

 

“7세기 중엽 우리가 근동이라 부르는 지역에서 시작된 이 흥미로운 상황의 전개가 유럽의 역사와 문명이 나아갈 진로에 큰 영향을 끼치는 과정을 이 책에서 설명하려 한다.”

 

마리아 로사 메노칼의 <The Ornament of the World 문명의 보석>(2002) 도입부에서 이 말을 읽고 깜짝 놀랐다. 지난 몇 달 동안 이슬람의 역사에 관한 책들을 찾아 읽으면서, 7세기에서 15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이슬람의 역사가 유럽 역사에 끼친 영향이 그 반대 방향의 영향보다 압도적으로 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유럽보다 훨씬 더 풍요했던 이슬람세계에서 일어나는 파장이 유럽 쪽으로 전해지는 데 따라 유럽사의 중요한 굴곡들이 빚어진 것이 많다는 생각이다.

 

그런 생각을 해왔으면서도 메노칼의 말에 놀란 것은 그의 책이 다룬 지역이 이슬람문명의 가장 변방이었을 것이라고 어렴풋이 생각해 온 이베리아반도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부제는 무슬림과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이 중세 스페인에 함께 만들어낸 관용의 문화.)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같은 근동의 중심부 아닌 서쪽 끝에서 이슬람문명의 진수(眞髓)가 나타나 유럽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 것이 뜻밖이었다.

 

더 큰 놀라움은 무슬림과 기독교인의 관계에서 협력과 관용의 측면을 부각시킨 데 있다. 중세 후기 기독교 유럽과 이슬람의 관계는 십자군의 대결로 상징되어 왔다. 평화를 제창하는 종교를 피차 가지고도 상대방과의 전쟁만은 정의로운 전쟁으로 옹호할 만큼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던 관계를 떠올리는 상징이다.

 

이베리아반도에서 이 시기에 진행된 기독교세력 지배의 확대 레콩키스타(Reconquista)’도 십자군의 일환으로 흔히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이 지역 주민들에게 종교의 차이로 다른 집단을 배척하는 경향이 별로 없었음을 메노칼은 보여준다. 경제적-문화적 이해관계에 따라 상대방들을 대하고, 대결보다는 관용과 협력을 통해 함께 큰 이득을 취함으로써 경제적 번영과 찬란한 문화를 이룩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스페인에서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의 격렬한 충돌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중세 야만성의 대명사라 할 종교재판이 어느 곳보다 맹위를 떨친 곳이다. 무슬림만이 아니라 유대인까지 탄압을 받고 대거 추방된 사실이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메노칼의 설명에 따르면 이 극한대립의 풍조는 이베리아반도의 외부로부터 들어온 것이었다. 무슬림이건 기독교인이건 지역의 토착세력들은 공생(共生)에 익숙한 모습을 보인 반면 중세 후기에 외부에서 들어온 세력들이 원리주의 성향을 보였다는 설명이다.

 

유라시아대륙의 서쪽 끄트머리 이베리아반도에서 문명의 발전과정이 특별히 활발한 진행을 보였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아바스 칼리프조가 들어설 때 몰살당한 옴미아드 칼리프조의 후예 하나가 망명해 와서 총독(Emir) 자리를 차지하고 실질적인 독립국을 운영한 것을 봐도 (170여 년 후 옴미아드 칼리프조의 부활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이슬람세계의 중심부에서 얼마나 먼 곳이었는지 분명하다. 이런 변방에서 바그다드와 쌍벽을 이루는 찬란한 문화의 발전을 이룬 것은 문명의 발전에서 통합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보여준다. 이베리아반도는 로마제국에서도 이슬람세계에서도 외진 변방이었지만 양쪽 전통이 원만하게 통합될 조건을 갖춤으로써 특출한 발전의 현장이 된 것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History_of_Spain#/media/File:Map_Iberian_Peninsula_750-en.svg

https://en.wikipedia.org/wiki/History_of_Spain#/media/File:506-Castile_1210.png

https://en.wikipedia.org/wiki/Spain_in_the_Middle_Ages#/media/File:Spanish_kingdoms_1360.jpg 720년경, 1210년경과 1360년경 이베리아반도의 정치세력도. 720년경에는 반도의 북쪽 끝만을 기독교세력이 지배하고 있었으나 1210년경에는 반도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13세기까지는 확장된 기독교 세력권에도 이슬람 전통이 바닥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십자군이라는 선명한 대립의 그림은 어쩌면 그 시대의 내용물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한낱 포장지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지중해 동방 해안지대 레반트에서 11세기말에서 13세기말까지 일련의 전투가 단속적으로 벌어지는 동안 이베리아반도에서는 이슬람문명의 풍요로운 성과가 이른바 유럽지역으로 넘쳐 들어가고 있었다. 시칠리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전투의 현장인 레반트 지역에서도 두 세계 사이의 경제적-문화적 교류는 계속되었다. 그것이 르네상스를 위한 기반조건이 되었고, 중세기를 암흑시대로밖에 겪지 못했던 유럽이 인류문명의 발전 과정에 비로소 동참하는 계기가 되었다.

 

 

3.

 

십자군운동은 이슬람세계와 기독교세계의 단순한 흑백대결이 아니었다. 기독교세계 안에서도 동로마제국과 로마교회 세력 사이에 물밑으로 치열한 항쟁이 있었다는 사실은 프랑코팬의 <The First Crusade 1차 십자군>에 여실히 그려져 있다. 아민 말루프의 <The Crusades Through Arab Eyes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1984, 김미선 옮김 2002)에서는 이슬람 쪽 사정도 그 못지않게 복잡한 것이었음을 읽을 수 있다.

 

말루프는 프롤로그에서 10998월 바그다드 조정에서 다마스쿠스 판관 알-하라위가 피난민들을 이끌고 칼리프에게 호소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예루살렘 함락 한 달 후의 일이다. 이슬람이 모욕받고 무슬림이 학대당하는 상황을 바로잡아 달라고 알-하라위는 열변을 토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칼리프와 조정의 반응은 미미했다.

 

이슬람과 서방 사이에 기나긴 적대관계의 출발점이 될 예루살렘 약탈은 아무런 즉각적 반응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아랍인의 동방이 침략자에 맞서 일어나고 칼리프의 조정에서 지하드를 요구한 다마스쿠스 판관의 호소가 엄숙한 저항의 첫 행위로 기억되기에 이른 것은 그로부터 근 50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침략이 시작될 당시 아랍인 중에 서방으로부터의 위협을 알-하라위처럼 심중하게 인식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새로운 상황에 재빨리 적응한 사람들도 있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고통스럽지만 체념하고 살아남는 데 힘썼다. 어느 정도 명철한 시각을 지키며 종래 겪어보지 못한 기이한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쓴 사람들도 있었다.” (xvi)

 

1099년 당시 칼리프의 입장을 생각해 본다. 945년 부예 왕조의 바그다드 점령 이후 칼리프는 실권 없는 명목상의 지도자가 되어있었다. 1055년 셀주크제국이 부예 왕조를 몰아낸 뒤에도 칼리프의 위상은 그대로였다. 바쿠후시대 일본의 천황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그 입장에서 볼 때 프랑크인의 침략이 얼마 전 셀주크인의 침략과 무엇이 달랐겠는가? 프랑크인은 무슬림이 아니라는 점이 다르기는 하지만, 기독교인도 율법의 백성(people of the book)’이라면 이슬람을 받아들인 지 얼마 되지 않는, 그리고 제대로 받아들인 것 같지도 않은 셀주크인과 얼마나 차이가 있었겠는가? 셀주크인의 정복 과정에서 가혹행위도 십자군에 못지않았고 프랑크인의 침략 지역은 셀주크인이 차지하고 있던 곳이었다. 야만인들끼리 싸움에 힘도 없는 칼리프가 뭐 하러 끼어들겠는가?

 

현지의 셀주크인 권력자들도 문명의 충돌을 생각한 기색이 없다. 십자군이 예루살렘까지 진군해 오는 3년 동안 그들은 새로운 상황에 재빨리 적응하기 위한 경쟁을 벌였다. 프랑크인의 공격이 자기보다 이웃으로 향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침략군에게 협력하는 행태가 많았고, 어쩌다 공동의 적에 대응하기 위해 이웃의 숙적 간에 일시적 동맹을 맺은 때도 이웃이 자기보다 더 큰 타격을 받게 만들려고 잔꾀를 부리다 상황을 그르친 일이 적지 않았다.

 

합친 지 오래면 갈라지고 갈린 지 오래면 합쳐진다(合久則分 分久則合)”는 중국 속담처럼 거대 질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성쇠를 반복하는 경향이 있는 모양이다. 십자군운동이 시작된 11세기말은 이슬람세계의 분권이 극에 달한 시점이었다. 수십 년이 지나 통일의 기운이 일어나면서 비로소 프랑크인을 겨냥한 지하드(jihad, 聖戰)’가 시작된다. 공동의 적에 대한 적개심이 이슬람의 통일을 위한 동력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11세기 후반 셀주크 세력은 중-근동 일대의 광대한 지역을 석권했지만 안정된 제국체제를 이루지는 못했다. 실질적인 군웅할거 상태에서 제1차 십자군(1095-1099)에게 틈새를 만들어주었고, 십자군이 만든 레반트의 영지들은 오랫동안 큰 위협을 받지 않았다. 1140년대에 세력을 일으킨 누르 앗-(1118-1174)이 비로소 본격적인 지하드를 시작하면서 제2차 십자군(1147-1150)을 불러왔고, 그 뒤를 이은 살라딘(1137-1193)이 파티마 칼리프조의 이집트를 통합한(1171) 뒤 예루살렘 탈환(1187)으로 지하드의 정점을 찍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Jerusalem#/media/File:The_Church_of_the_Holy_Sepulchre-Jerusalem.JPG 예루살렘의 성묘교회는 기독교의 성지 중 성지다.

https://en.wikipedia.org/wiki/Jerusalem#/media/File:Jerusalem-2013-Temple_Mount-Al-Aqsa_Mosque_(NE_exposure).jpg 마호메트 승천의 전설이 깃든 알-아크사 모스크는 이슬람의 중요한 성지다.

 

 

4.

 

유럽인이 암흑시대 너머에서 찾은 고대의 빛은 그리스문명이다. 우리 모두 그리스문명의 찬란한 성과를 많이 알고 있다. 그런데 그 그리스문명이 그리스만의 문명이었을까? 조너선 라이언스의 <The House of Wisdom 지혜의 집>(2009, 김한영 옮김 2013)에 인용된 이븐 할둔(1332-1406)의 말을 보며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페르시아 사회에서 지적 학술이 크고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은 강력한 왕조들이 단절 없이 지배를 계속했기 때문이다. 지적 학문들이 페르시아인에게서 그리스인에게 넘어간 것은 알렉산더가 다리우스를 죽이고 아케메네스 제국을 손에 넣은 때의 일이라고 한다. 그때 알렉산더가 페르시아의 서적과 학문들을 차지한 것이다.” (62)

 

이 말을 듣고 생각하니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근대화를 밝혀준 고대의 빛중에는 그리스 고전시대보다 알렉산더 정복 이후 헬레니즘시대의 유산이 많았다.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한 유클리드(기원전 4-3세기)와 프톨레마이오스(2세기),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에서 활동한 아르키메데스(기원전 3세기), 터키의 페르가몬에서 활동한 갈레누스(2세기)가 대표적인 예다. 헬레니즘은 고대문명의 여러 갈래 흐름이 합쳐지는 하나의 범람원이었다. 알렉산더제국의 공용어인 그리스어로 모든 학술활동이 이뤄졌지만, 그 내용은 그리스의 전통만이 아니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Ptolemy#/media/File:PSM_V78_D326_Ptolemy.png

https://en.wikipedia.org/wiki/Galen#/media/File:Galenus.jpg 프톨레마이오스와 갈렌은 중세 후기의 유럽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고대 사상가들이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Aristotle#/media/File:Aristotle_Altemps_Inv8575.jpg 아리스토텔레스

 

어쩌면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의 자연철학 창시에도 동방문명의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가 해양세력 그리스보다 대륙세력 페르시아에 가까운 편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앞서 내놓은 일이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기원전 343년 이후 여러 해 동안 마케도니아에 머물 때 동방의 학술에 접했을 것이다.

 

750년 아바스 칼리프조 성립 이후 약 2백년이 이슬람 황금시대였다. 경제적 번영 속에 학문과 예술의 발전이 눈부시게 이뤄진 이 시대에 그리스 (및 헬레니즘) 고전의 연구도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펼쳐졌다. 라이언스는 9세기 전반기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아바스조의 새 관점에서 볼 때 동방정교회의 비잔틴은 이교도일 뿐 아니라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 고대 그리스의 학술을 거부한 잘못이 있었다. 종교로서 이슬람의 우월성은 고대 그리스인의 업적을 알아보는 지혜로 더욱 뒷받침되었다. 비잔틴을 반대하는 것은 그리스 학술을 지지하는 것이었고, 그 역도 마찬가지였다. 초기 비잔틴제국의 핍박으로 네스토리아교회, 시리아교회 등 동방기독교회 학자들이 이슬람세계로 망명해 있던 상황이 이 주장을 입증해 주었다.” (The House of Wisdom 76)

 

8세기 초반까지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일대를 포괄한 이슬람세계는 또 한 차례 문명의 범람원이 되었다. 8-10세기 이슬람 황금시대는 이 범람원에 넘쳐나는 다양하고 풍성한 문명자원을 통합한 시기였고, 번역이 그 중요한 방법이었다. 문명 초창기부터 이 지역에 쌓여온 문명자원은 여러 언어로 전해져 있었고, 페르시아어와 그리스어가 그중 중요한 언어였다. 이것을 아랍어로 옮기는 작업이 이 시대 학술활동의 주축이 되었다.

 

이 시기 동아시아에서도 516국과 남북조의 혼란기에 펼쳐진 다양한 문화현상이 당-송 황금시대를 통해 통합되고 있었다. 또 하나의 범람원이었다. 그러나 통합되는 전통의 범위가 이슬람세계 쪽이 더 컸다는 사실은 동원된 언어의 범위에서 일단 알아볼 수 있다. 이슬람 황금시대의 학자들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언어로 된 자료를 다룬 반면 당-송 학자들이 다룬 자료는 한어와 한문의 범위를 별로 넘어서지 않았다.

 

이 차이에서 서세동점(西勢東漸) 현상의 유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중세기의 유라시아대륙을 동쪽의 작은 문명권과 서쪽의 큰 문명권으로 갈라서 볼 때, 동쪽 문명권, 즉 동양은 확실한 통합성을 일찍 이룩한 반면 서쪽 문명권, 즉 서양은 통합이 늦고 통합 수준도 낮았다. 그러나 일단 통합이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포용하는 다양성의 큰 범위가 발전의 동력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19세기에 나타난 서세동점 현상이 겉보기로는 유럽의 물질문명에 기인한 것 같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이슬람세계에서 통합되었던 광대한 문명자원이 바닥에 깔려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5.

 

10세기까지 황금시대를 통해 이슬람세계는 경제적-문화적으로 다른 지역과 격차가 큰 선진지역이 되었다. 가장 격차가 작던 동로마제국도 이슬람 팽창에 눌려 과거의 성세를 잃어버린 채 위축된 틀을 지키기에 급급했다. 그에 비해 그 배후의 미개한 변방이던 유럽(로마교회 지역)이 차츰 자라나 이슬람에 휩쓸리지 않은 중요한 세력으로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이슬람세계에서 프랑크인(Franj)이라 부르던 지금의 프랑스-독일-영국-이탈리아 지역 사람들이 이슬람세계의 풍요로운 경제와 문화를 차츰 알아가면서 두 가지 태도가 나타났다. 하나는 싸움을 걸어 빼앗는 것이고 또 하나는 보고 배워서 따라가는 것이다. 12-13세기는 한편으로 십자군의 시대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번역의 시대였다.

 

메노칼은 이베리아반도에서 펼쳐진 특이한 번역문화를 보여준다. 반도에 이주한 아랍인(동방에서)과 베르베르인(북아프리카에서)은 소수였고, 이슬람 지배 아래 현지인의 개종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기독교인과 유대인 등 다른 종교집단도 큰 위협을 받지 않고 지속되었다. 그러나 고급문화는 아랍어로 통일되었다. 아랍어와 히브리어, 라틴어, 현지(카스티야) 방언 사이의 통-번역은 주민들의 일상생활 그 자체였다. 히브리어와 카스티야 방언은 이런 환경 속에서 표현과 기록 방법에 큰 발전을 이루기까지 했다.

 

10세기까지 코르도바가 바그다드와 어깨를 견주는 경제-문화 중심지로 성장하면서 그 문화자산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수십 개 도서관이 만들어지고 수십만 권 도서를 갖춘 중앙도서관의 장서목록이 44권에 달했다고 한다. 11세기 들어 옴미아드 칼리프조가 무너진 후 문화 활동은 독립성이 늘어난 여러 도시(Taifa)에 경쟁적으로 확산되었다. 주요 도시 중 일찍 기독교 지배로 넘어간(1085) 톨레도는 기독교세계의 고전 연구자들이 모여드는 책 도시가 되었다.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1605) 도입부에서 아랍어로 적힌 주인공의 행적을 톨레도 길거리의 폐지더미에서 찾도록 설정한 데서도 이 도시의 오래된 명성을 알아볼 수 있다.

 

12-13세기에 톨레도에서 번역되어 유럽에 전파된 고전이 많았고 여기 참여한 사람들을 톨레도 번역학파(Toledo School of Translators)'라 부른다. 그중에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를 번역한 크레모나의 제랄드(Gerardus Cremonensis, c. 1114-1187)가 있었는데 라이언스는 제랄드의 제자 한 사람의 말을 통해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철학 연구의 여러 중심지에서 공부하며 라틴세계에 알려진 모든 지식을 습득했다. 그러나 라틴세계에서 찾을 수 없던 <알마게스트>를 읽고 싶어서 톨레도로 갔다. 그곳에서 온갖 주제에 관한 아랍어 서적을 보고 그 책들이 라틴세계에 없는 것을 안타까워한 그는 그 책들을 번역하기 위해 아랍어를 배웠다.”(The House of Wisdom 154)

 

https://en.wikipedia.org/wiki/Toledo_School_of_Translators#/media/File:Al_Razi_Receuil_de_traite_de_medecine_translated_by_Gerard_de_Cremone_Second_half_of_13th_century.jpg 크레모나의 제랄드가 번역한 의학서적의 한 면. 톨레도의 번역가들은 라틴어보다 카스티야 방언으로 번역하는 일이 많았고, 이것이 근대 스페인어 탄생의 계기가 되었다.

 

뒤이어 인용된 잉글랜드 철학자 몰리의 대니얼(Daniel of Morley c. 1140-1210)의 말은 두 세계 사이의 격차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오래 전 내가 학문을 위해 잉글랜드를 떠나 파리에서 얼마동안 지낼 때 보니 (우매한) 짐승들이 교수 자리에 앉아 권위를 잡고 있었다. (...) 그 교수들은 아는 것이 너무 없어서 석상처럼 가만히 앉아있으면서 침묵이 지혜를 보여주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 그러다 아랍의 학술이 (...) 톨레도에서 그 무렵 융성하다는 소식을 듣자 나는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철학자들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 서둘러 그곳으로 향했다.”(같은 책 156)

 

12-13세기 번역의 시대를 통해 유럽인은 이슬람세계의 학술과 문화를 폭넓게 받아들였다. 십자군운동과 나란히 일어난 변화였다. 두 움직임 모두 유럽의 사회경제적 변화를 배경으로 벌어진 일이다. 그렇게 많은 군인과 학자들이 긴 기간 동안 먼 곳에 가서 조직적 활동을 벌인다는 것이 11세기 이전 유럽의 사회경제적 조건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사회경제적 변화를 발판으로 이슬람세계로부터 획득한 문화자원을 활용해서 르네상스가 펼쳐졌고, 그를 통해 하나의 문명권으로서 유럽이 만들어졌다.

 

 

6.

 

동양사에 관한 생각을 정리하는 작업 중에 서양으로 잠시 다니러 갔다가 뜻밖에 오래 지내게 되었다. 몽골제국 이전의 동양사에 수시로 긴장을 불러일으킨 오랑캐는 초원의 오랑캐였는데, 이제 바다오랑캐(洋夷)’가 큰 역할을 맡으러 나서는 장면을 앞두고 그 배경을 살펴보러 갔던 것이다. 막상 가보니 과연 서양이 어떤 곳이었는지 이해하기 위해 과거의 통념을 넘어설 필요가 많이 느껴지는 바람에 여러 달 동안 둘러보게 되었다.

 

이제 아쉬운 대로 중국으로 돌아오려 한다. ‘서양서양사를 이렇게 보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그 동안 몇 가지 적었는데, 그 방면 연구자가 아닌 사람으로서 분수를 넘어선 내용이 많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중요한 최신 연구를 참조하며 통념이 앞으로 바뀌어야 할 방향에 대한 생각을 다듬은 것으로 독자들은 받아들여 주기 바란다. “오랑캐의 역사작업을 마친 후 이 주제로 돌아와 더 깊이 있는 작업을 벌일 것을 기약한다.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유럽중심주의를 벗어날 필요성이다. 오랫동안 생각해 온 문제인데, 모처럼 서양사를 좀 넓게 살펴보려니 그 폐해가 지금까지 생각보다도 더 심각하다. 가장 큰 문제가 이슬람의 역사적 의미에 관한 것이다. 이 방향 연구가 근년에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우리 역사교육에도 하루빨리 활용할 길을 찾아야 하겠다.

 

몽골제국 아래 원나라와 일-칸국의 관계를 통해 중국은 종래보다 서양과의 접촉면을 크게 늘렸다. 그러나 원나라가 일-칸국의 종주국이었기 때문에 이 접촉으로부터 중국이 받은 영향은 일부 기술적 측면에 제한되고 제도적 측면에는 별로 미치지 않았다. 14세기 들어 원나라와 일-칸국이 모두 혼란에 빠지면서 동-서 관계도 움츠러들었다가 명나라의 흥기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정화(鄭和)의 대항해를 둘러싼 수수께끼도 이 국면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