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봄에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아는 사람들이 모두 뜻밖의 일로 받아들인다. 내게도 뜻밖의 일이다. 어려서부터 동양적 취향을 보인 편이고 전공도 중국사로 하게 되었다. 철든 뒤로는 합리주의에 깊이 물들어 ‘신앙’이란 것을 갖게 될 것 같지 않았다. 학생 시절 불교를 가까이 해서 절 살림도 꽤 익숙했지만 ‘종교’로 받아들일 마음은 없었다.
2년 전 세례 받을 생각이 떠오른 것도 신앙을 가지겠다는 동기가 아니었다. 내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내 생활에 도움이 될까 해서 떠오른 생각이었다.
아내가 나를 따라 한국에 온 지 십여 년, 객지에서 외롭게 사는 것이 안쓰러웠다. 그에게 종교 가질 것을 권한 것은 어울릴 교인들 갖게 되기를 바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교인들 분위기가 좋아 보이는 천주교와 원불교 사이에서 골라 보라고 권하곤 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란 아내는 종교라면 쳐다볼 생각이 없고 나도 강하게 권할 이유가 없었다.
이따금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권하고 아내는 튕기고 하며 몇 해를 지나다가 어느 날 아내가 교회 다니기 시작한 것을 알게 되었다. 길거리에서 마주친 사람이 권해서 구경갔다가, 하도 잘 대해주고 간곡하게 권하는 바람에 한 번 두 번 자꾸 다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느 교회인지 모르는 그곳에 실례되는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길바닥에서 사람 붙잡아 온갖 재간으로 붙들어 놓는 것이 꼭 유사종교의 삐끼질 같이 들렸다.
아내는 “하도 간곡하게 매달리니까 차마 뿌리칠 수가 없다”고 말하지만 어쨌든 자기 판단으로 다니는 것을 강제로 막을 수는 없다. 그래도 너무 이상한 데 얽히는 건 걱정스럽다. 그래서 내가 세례 받을 생각을 떠올리게 되었다. 나는 관심 없지만 당신은 다녀보라고 그 사람에게 권하기만 해서는 효과가 없으니 내가 솔선수범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었다.
이렇게 살신성인(?)의 심정으로 떠올린 생각인데 일단 떠올리고 보니 더 깊은 곳으로 생각이 끌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수십 년 문명사 공부가 종교와 신앙에 대한 내 생각을 꾸준히 바꿔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나는 초년부터 합리주의 성향이 강한 편이었다. 머리가 좋다는 자부심에서 비롯된 일 같다. 기억력이든 이해력이든 머리 굴려 점수 딸 수 있는 과목만 재미있고 음악, 미술처럼 비논리적으로 보이는 영역에는 흥미가 끌리지 않았으니까. "망치 가진 자에게는 모든 것이 못대가리로 보인다"는 명언 그대로다.
두뇌에 대한 믿음은 나이 먹으면서 이성(理性)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졌다. 이성 외의 모든 것은 이성보다 하위의 ‘취향’이라고 생각했다. 이성에 따라 사는 삶이 잘 사는 삶이고, 이성이 충분치 못할 때 취향에 빠지게 되는 것이라고.
소소한 곡절은 있어도 이성에 대한 믿음은 내 삶의 중심축으로 오랫동안 지켜졌다. 그러다 나이 마흔 무렵 세상 보는 (그리고 나 자신을 보는) 눈이 한 차례 크게 바뀌었다. 1987년 겨울, 내가 39세 되는 시점에서 어머니로부터 아버지 일기 유고를 넘겨받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39세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나이였다. (이 유고를 정리해 <역사 앞에서>(창비, 1993)로 출판하게 된다.)
두 살 때 여읜 아버지는 내게 추상적 존재였다. 안 계신 분에 관해 주변에서 해주는 이야기는 모두 그냥 ‘덕담’으로만 들렸다. 그분이 가르치던 학과에서 공부를 시작하고 어쩌다 보니 그분 연구 분야에 가까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어도 그분이 어떤 주제를 왜 연구하게 되었는지 깊은 이해가 없었다.
그런 차에 그분 모습을 스스로 그린 기록 앞에서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분이 내 나이에 생각하고 실천하던 내용 앞에서 내 삶이 너무나 공허하게 느껴졌다. 하나의 정형화된 악몽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내 삶이 갑자기 끝나 의식은 그대로 있는데 현실에 작용할 길이 없는 유령이 된 내가, 내 삶의 누추한 단면들이 사람들 앞에 가차 없이 드러나는 광경을 무기력하게 바라보게 되는 꿈이었다.
2년 후 교수직을 떠난 일과 아버지 일기 사이의 인과관계를 당시에는 확실히 의식하지 못했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분명해졌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절박한 위기의식이 그 일기와의 만남에서 나왔다. 그때까지 표방해 온 ‘과학사’에서 ‘문명사’로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도 시간이 지나며 깨닫게 되었다.
물리학과에 입학했다가 사학과로 옮긴 뒤에도 이성을 숭상하는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나를 과학사로 이끌었다. 학부 졸업논문부터 시작해서 20년간 중국의 역법(曆法)을 붙잡고 지냈다. 동양적 취향과 이성에 대한 믿음이 결합된 연구주제였다.
역사 공부의 궁극적 의미가 ‘인간의 탐구’에 있다는 내 믿음이 각별히 절실한 것은 ‘개종자의 열정(convert's fervor)’ 때문이다. 30대 시절까지 나는 인간의 이성에만 가치를 두고 공부의 대상도 이성적 활동을 앞세웠다. 합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영역에는 관심이 끌리지 않았다. 종교 같은 것은 이성이 투철하지 못한 틈새에서 일어난 우발적 현상이므로 역사 진행의 자잘한 곁가지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성의 발전과 확장 과정으로 역사를 본 것이다.
아버지 일기를 접하던 1987년 무렵은 17세기에 서양 천문학과 수학이 중국 역법에 도입된 과정에서 새로운 연구 영역을 탐색하고 있을 때였다. 이 영역 안에서 역사 공부에 대한 생각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애초에는 무엇이 (what) 도입되었는지만 궁금했는데 어느 시점에서 (when) 누가 (who) 어떻게 (how) 그것을 도입했고 그 이유가 (why) 무엇이었는지 차츰 관심이 넓어진 것이다.
그래서 마테오 리치를 위시한 선교사들의 중국 선교활동을 폭넓게 살펴보게 되었고 “마테오 리치의 中國觀과 宣敎路線”이란 제목의 학위논문을 작성한 것이 문명사 공부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 단계에서 그 주제에 마주친 것은 행운이었다. 근대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 유럽과 중국 문명이 역동적으로 마주친 장면을 깊이 살펴본 것이 두 문명을 중심으로 문명 전개의 흐름을 더듬어 가는 좋은 발판이 되었다.
문명사로의 전환에 아버지 일기와의 만남이 어떤 작용을 했는지 당시에는 의식하지 못했다. 이성의 한계를 은연중에 깨닫게 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은 시간이 꽤 지난 후의 일이었다. 사람이란 “이래야 한다”는 생각을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이해하려는 자세로 돌아서는 것이 나 자신의 존재를 용납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 사람이 한 세상 살아가는 것이 만만치 않은 일임을 알아보게 되었으니 아버지의 어려움을 그분 일기 속에서 되새김하는 가운데 비로소 철이 든 셈이다.
마테오 리치 선교노선의 원리로 파악한 ‘적응주의(accommodationism)’가 그 후 문명사를 생각하는 데 첫 번째 키워드가 되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 문명의 성숙은 외연의 확장을 가져오고, 외연의 확장은 타자와의 만남을 가져온다. 낯선 문명과 마주치면 본능적으로 대결의 자세가 나온다. 그 자세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쇠망의 길을 피할 수 없고, 본능을 억제하고 조화의 길을 찾아야 발전의 길이 열린다. 대결은 마이너스 섬의 자세이기 때문에 눈앞의 국면에서는 승리를 통해 번영을 누리는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 원기(元氣)를 소진해 문명의 지속성을 잃게 된다.
17세기 예수회 선교사들의 적응주의 노선은 종교개혁으로 수세에 몰린 가톨릭교회의 중흥책으로 타당성을 가진 것이었다. 유럽에서 세력근거를 개신교회에 빼앗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근거를 유럽 밖에 키울 필요가 있었고, 그를 위해서는 타 문명과의 조화를 꾀하는 적응주의가 적절한 노선이었다. 18세기 들어 적응주의가 폐기된 것은 서세동점(西勢東漸) 형세가 빚어지는 데 따라 유럽사회 전체가 모든 외부를 조화의 상대 아닌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유럽중심주의에 빠진 결과였다.
1990년대 초 예수회 적응주의를 연구하는 동안 1780년대의 조선 서학운동에도 관심을 갖고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종종 다니게 되었다. 내가 가톨릭교회에 직접 접해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마침 큰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적응주의를 배척하던 초기교회 이래의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 변화는 국가사회에 대한 당시 가톨릭교회의 역할에도 비쳐지는 것처럼 보여서, 한 번 <중앙일보>에 이런 칼럼도 써 올리게 되었다.
뮈텔 主敎 (1998. 5. )
1898년 5월 29일 종현성당(현 명동성당) 축성 예식을 집전한 것은 당시 조선교구장이던 뮈텔 주교(1854-1933)였다. 그는 1881년 조선에 입국해 4년간 선교사로 활동하고 프랑스로 돌아갔다가 1891년 조선교구장으로 다시 조선에 들어와 별세 때까지 42년간 조선교구를 지휘했다.
뮈텔 주교의 긴 재임기간 중 조선은 숱한 격변을 겪은 끝에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 동안 가장 영향력 있는 조선주재 서양인의 한 사람으로서 뮈텔 주교의 입장은 조선천주교회의 행로뿐 아니라 국제사회의 조선관을 결정하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맡은 것이었다.
조선민족의 관점에서 보면 뮈텔 주교는 ‘어글리 미셔너리’였다. 그가 남긴 재임중의 일기에는 조선의 문화와 전통을 깔보고 무시하는 태도, 교회의 이익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책략을 구사하는 모습이 도처에 나타나 있다. 그는 일본의 조선지배를 지지하여 3-1운동 때는 천주교인과 신학생들의 만세운동 참여를 엄격히 금지했다. 안중근 의사의 영세신부 빌렘이 安의사의 사형집행 전에 고해성사 받으러 가는 것마저 가로막고 결국 빌렘을 조선에서 쫓아낸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일제시대를 통해 개신교회보다 천주교회의 독립운동 기여도가 낮았던 일차적 이유가 뮈텔 주교의 태도에 있었다고 지목된다. 이것은 가톨릭 교회사가들에게 오랫동안 당혹스러운 문제로 남아 있다. 몇 년 전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뮈텔 주교에 관한 연구발표를 놓고 논란이 일었을 때 최석우 신부의 논평에도 이런 당혹감이 담겨 있었다: “그분은 조선인의 육신보다는 조선인의 영혼을 더 사랑하셨던 것 같습니다.”
명동성당 축성 백주년을 기해 김수환 추기경이 30년간 맡아 온 서울대교구장 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재임기간은 한국사회 안에서 ‘명동성당’의 의미를 바꿔놓았다. 민주화와 사회정의의 상징으로 명동성당이 온 국민의 마음에 자리잡은 것은 누구보다 金추기경의 공로다.
한국교회사를 보는 사람들은 대개 金 추기경을 훌륭한 교구장으로, 뮈텔 주교를 그 반대로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진흙 없이 연꽃이 피지 못하듯, 오늘의 한국가톨릭교회와 金 추기경의 성취는 바깥사회를 외면하고 교회에만 매달렸던 뮈텔 주교의 집념을 바탕으로 이뤄진 것이다. 역사란 부끄러운 부분도 자랑스러운 부분도 함께 짊어져야 하는 것임을 되새기게 해주는 것이 우리 가톨릭교회사의 가르침이다.
언젠가 내가 교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꿈에도 없던 20년 전에 쓴 글이다. 세례 받을 생각을 한 뒤에 “혹시 내가 전에 못할 소리를 한 적은 없었나?” 불안한 마음이 들어 다시 뒤져보니 다행히 해교(害敎) 수준은 아니다. 착한 사마리아인 정도로는 봐줄 만하겠다.
늦은 나이에 교인 된 사연을 적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너무 길게 이어진다. 제목 뒤에 “(1)”을 붙이고 한 차례 숨을 돌린 뒤에 (2)로 이어가겠다. (2)로 끝날 지는 써봐야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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