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수의 패러독스"의 실제 사례가 연일 나타나고 있다. "보스"의 위세가 당당할 때는 보스가 하라는 말만 하고 하지 말라는 말을 않는 자들이 많았다. 그대로 따른 결과 위증죄 처벌이나 수사관의 미움, 시민의 손가락질 등 어떤 손해를 보더라도 따르지 않다가 보스에게 당할 보복보다 덜 무서웠다. 그리고 충성을 인정받으면 보스에게 보상을 받을 희망도 있었다.

 

그런데 보스가 감당 못할 지경으로 상황이 진행되면 그 위세가 무너지고, 졸개들은 개인적 득실에 따라 각개약진에 나서게 된다. 수사관이 모르고 있던 범죄나 증거까지 알려주며 그 호의를 얻으려고 앞을 다투기도 한다. 3개월 전까지 어느 VIP는 대한민국 어느 사람의 어떤 범죄라도 덮어줄 힘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위세가 당당할 때였다. 그런데 지금은 자기 한 몸 지킬 것도 장담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 변호인단의 기괴한 언행에 접할 때마다 실소와 함께 생각하네 된다. "아, 이제 저 인간 주변에는 정상에 가까운 사람이 씨가 말랐구나."

 

죄수의 패러독스가 모처럼 작동하는 것을 보며 일단 꼬소한 마음도 들지만 또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하다. 한 때는 혈육처럼 서로 아끼고 위해주던 사람들이 상황이 바뀌었다고 "그 X이 그런 X인 줄 나는 정말 몰랐다. 다 그X 책임이다." 하는 꼴을 보려면, 아, 인간이 저럴 수가 있는 거구나, 인간이라는 사실에 자괴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

 

歐陽修가 "朋黨論"에서 "利"로 뭉친 "黨"과 "義"로 뭉친 "朋"을 구분한 것도 이런 자괴감을 극복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이익을 함께하는 패거리는 함께할 이익이 있을 때 그 사이가 꿀처럼 달지만 이익을 다툴 입장이 되면 원수가 되어 버린다. 반면 의리를 함께하는 모임은 물처럼 싱거운 사이지만 의리에 대한 입장이 달라질 수 없으므로 한결같다. 이익보다 의리를 따르는 군자들의 "朋"이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런데 군자가 따르는 "義理"란 말을 조폭도 애용한다. 양쪽의 의리가 물론 서로 다른 것이기는 하지만, 통하는 뜻도 있다. 개인의 이해관계보다 공동체의 득실을 앞세운다는 점이다. 그 공동체의 범위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조폭이 생각하는 공동체는 구성원들의 집합에 그치는 것인데, 군자가 생각하는 공동체는 사회 전체라는 차이다. 

 

몇 달째 언론을 도배하고 있는 "국정농단" 집단이 조폭 수준도 못 된다는 얘기가 그래서 나오는 건데, 그런 평이 억울한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법꾸라지" 소리까지 들어가며 어느 조폭 못지않게 투철한 자세를 지키는데도 조직이 무너지는 결정적 책임은 최고보스인 VIP에게 있다. 졸개들에게 충성을 요구하면서 그 댓가로 자신을 조금이라도 희생하려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나를 믿고 따른 것뿐이니 내게 책임을 물으시오." 하는 인사치레도 없다. 자기는 선의만을 갖고 있는데 나쁜 X들에게 속았다고 우긴다. 부의 과도한 집중을 "낙수(trickle down) 효과"로 호도하던 버릇으로 졸개들이 권력의 낙수 효과 또한 믿어줄 것을 기대한 건지.

 

이런 상황 앞에서 우리 사회에 군자의 의리까지 바라기에 앞서 조폭의 의리라도 세워지기 바라는 마음이 든다. 조폭의 의리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물론 전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지만 세상의 구석구석에 조폭의 의리가 작은 규모의 질서를 형성한다면 전체 질서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상주의적인 군자의 의리에만 매달려 조폭의 의리를 지나치게 배척하면 오히려 사회의 현실적 기반이 약해질 수 있는 것 아닐까?

 

로버트 퍼트넘은 <Bowling Alone>에서 사회의 조직력을 "본딩(bonding)" 조직력과 "브리징(bridging)" 조직력으로 구분했다. 본딩은 동질적 집단 내부의 조직력이며 철저한 이기주의 원리에 따르는 것인 반면 브리징은 이질적 집단 사이의 조직력으로, 이타적 성격을 보여준다. 현대세계에서 본딩 조직력을 대표하는 것은 기업과 조폭이며(양자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기 힘든 경우도 있지만) 브리징 조직력은 공익활동에서 주로 나타난다.

 

브리징은 착한 조직력이고 본딩은 나쁜 조직력이라는 순진한 2분법을 깨트리는 데 퍼트넘의 논지에서 주목할 점이 있다. 그는 본딩 조직력을 벽돌에, 브리징 조직력을 모르타르에 비유한다. 튼튼한 건물을 세우려면 품질 좋은 벽돌과 품질 좋은 모르타르가 모두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뉴라이트 비판>에서 인간을 이기적 동물로 보는 뉴라이트 관점을 비판했지만, 이기심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이기심이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사회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한 중요한 역할을 맡는 것으로 인정한다. 다만 이기심 외의 모든것을 부정하는 편협한 태도를 비판한 것이다.

 

오래된 "적폐"가 무너지고 쓸려나가는 모처럼의 광경이 시원하기는 하다. 그러나 그 무너지고 쓸려나간 자리에 무엇이 들어설지 걱정이 바로 따르는 것은 먹물의 병통일까. 인간이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대개 비슷하지만, 좋아하고 바라는 것은 갈래가 많다. 국정농단의 추태를 싫어하는 데는 많은 사람의 마음이 합쳐졌지만, 이제 비워지는 자리에 무엇을 세울지, 어렵고도 중요한 일이 이제부터다.

 

벽돌 없이 모르타르만으로 구조물을 빚어낸다면 형태를 자유로운 상상력에 맡길 수 있다. 그러나 비바람을 견딜 수 없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런저런 행태를 보며 "저건 조폭 수준이야!" 욕하던 버릇을 바꿔야겠다. 조폭 수준의 조직력조차 아쉽게 된 이 사회의 콩가루 상태를 이번 국정농단 사태에서 읽으며 조폭의 의리라도 회복되기 바라는 마음이 든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