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년 전의 가을, 베이징에는 의화단(義和團) 단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의화단은 중국의 전통적 심신(心身)수련방법으로 수십 년간 양이(洋夷)들에게 겪어온 치욕을 씻어버리자는 유사종교의 색채를 띤 민간운동이었다. 수련을 거친 사람이 부적을 몸에 지니고 주문을 외우며 싸움에 임하면 총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가르침을 중심으로 의화단은 수백만 명의 준군사조직이 되었다.

 

청일(淸日)전쟁에서까지 패배하고 참외 잘라먹듯 영토와 이권을 빼앗아 가는 열강의 과분(瓜分)에 속수무책으로 몸을 맡기고 있던 청나라 조정에서는 지푸라기에라도 매달리는 심정으로 의화단의 발흥을 방조했다. 아편전쟁 이래 50여 년간 안하무인으로 중국을 유린하던 오만한 서양인을 모처럼 공포에 몰아넣는 의화단의 테러가 중국의 자존심을 되찾아올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의화단의 기세가 절정에 오른 것은 1900년 여름의 북경의 55이었다. 황실의 지존(至尊) 서태후(西太后)의 명령 아래 의화단은 베이징을 장악하고 양이박멸(洋夷撲滅)’에 나섰다. 외국인들이 몇 개 공관과 교회를 거점으로 55일간 농성한 끝에 지원군의 도착으로 해방을 맞은 것은 영화 그대로다.

 

몇 주일간 복수의 기분을 낸 대가를 중국은 엄청나게 치렀다. 막대한 배상금 때문에 재정적 주권은 실질적으로 사라졌고, 국민에 대한 황실과 정부의 권위도 땅바닥에 떨어졌다. 청나라 조정은 열강의 불신까지 받게 되었으니 왕조의 멸망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쑨원(孫文)이 몇 차례 시도 끝에 결국 1911년 신해혁명에 성공하기까지는 기독교인인 그를 지원한 서양인들의 도움이 컸다.

 

1900년의 의화단사건은 중국 주권상실의 큰 고비였다. 그 후 침략과 분열에 시달리던 중국이 50년 만에 공산국가로 일어선 것은 공산주의의 승리 이전에 중국인의 자존심 회복이었다. 1949101일 천안문광장에서 마오쩌둥(毛澤東)드디어 중국은 다시 일어섰다!”고 외친 것은 한 세기에 걸친 침략과 반세기에 걸친 국권상실의 역사를 딛고 일어선다는 선언이었다.

 

그로부터 다시 50, 지난 금요일의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기념일 행사는 중국 안팎의 사람들에게 중국의 지나온 길과 나아갈 길을 다시 생각게 하는 계기가 됐다. 공산혁명이 국권회복의 길이 되었지만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 등 무리한 정책으로 국민들은 참혹하게 시달렸다. 공산권이 붕괴된 후 계속돼 온 공산주의 원리와 실용주의 정책 사이의 줄타기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기념식장에 유일하게 인민복을 입고 나온 장쩌민(江澤民)은 마오쩌둥과 덩샤오핑(鄧小平)을 잇는 중국체제의 새 초점으로 굳어졌다. 덩샤오핑을 이어 장쩌민이 내세워 온 질서 속의 변화도 이제 한계에 오지 않았냐는 관측이 돌고 있다. 기념식을 위해 계엄령을 내려야 하는 중국의 현실에서 이 한계를 본다. 199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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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