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2. 10. 11:58
중국, 마오 대신 공자를 멘토로 선택한 이유는?
유학 르네상스?
2011년 10월이었다. 중국 공산당의 발표가 인상적이다. 자기네들이 "우수한 전통 문화의 충실한 전승자이자 인솔자"였단다. 과연 그랬던가, 뒷말이 많았다. 논쟁도 일었다. 지켜보자니 피식, 웃음이 났다. 사실 여부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어 보인다. 어차피 역사학 논문이 아니다. 중국의 향후를 더듬는 정치 선언으로 접수할 일이다.
절묘한 것은 오히려 시점이다. 신해혁명 100년이었다. 신해 이래 중국은 좌/우 불문, 반(反)전통이었다. 5·4 좌파는 동구를, 5·4 우파는 서구를 전범으로 삼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세력이 중국 공산당이었다. 신문화 운동의 탯줄에서 자라나, 문화 대혁명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새 문화의 혁명을 추구했다.
표적은 고전 문명의 정수인 공자와 유학이었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했다. 루쉰은 유교 문명을 식인(食人)에 비유했고, 마오쩌둥은 스스로를 진시황에 빗대었다. 흡사 20세기 판 '분서갱유(焚書坑儒)'였던 것이다.
그 비난과 수모 속에서도 유학의 명맥은 이어졌다. 근거지는 중원의 밖이었다. 타이완은 대륙의 급진적 실험을 비판하며, '정통 중국', '문화 중국', '자유 중국'의 보루를 자임했다. 유학의 계승자와 보호자를 자처한 것이다. 하더라도 좌우로 양분된 정치사상을 넘보지는 못했다. 어디까지나 문화적 정체성을 담지하고, 근대의 도덕적 위기를 치유한다는 수줍은 차원에 머물렀다. 치국과 평천하가 아니라 수신과 제가에 그쳤던 것이다. 타이완과 홍콩 그리고 구미를 풍미한 신유학의 면모가 대저 그러했다. 자유 진영의 품에서 심성을 갈고 닦는, 다소곳한 냉전형 유학으로 자족한 것이다.
작금 대륙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다시, 치국과 평천하를 담당하는 정치 유학의 부활이다. 후진타오 시대의 슬로건은 '조화 사회'였다. 유학의 언어와 이념이 관방 담론에 침투한 것이다. 때를 맞춤하여 마오보다 더 큰 공자상이 톈안먼에 들어서기도 했다. 당장 혁명 원로들과 마오파의 반발이 거셌다는 후문이다. 그래서 곧장 철거되었다.
허나 사소한 해프닝이 아니다. 왕년의 '신청년'들이 구닥다리, 늙다리가 된 것이다. 신과 구가 뒤집혀질 기미이다. 유학 붐이 지배 이데올로기라는 비판은 백번 적확하다.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한 것이다. 중국의 지배 이념이 100년을 거슬러 고전 사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탓이다. 이미 세계를 누비며 중국을 선전하는 것은 '마오 어록'이 아니라 '공자 학원'이다.
신좌파의 일부는 '유가 사회주의 공화국'을 주창한다. 사회주의를 근간으로 삼되, 전통 문명과의 결합을 꾀한다. 그래서 명실상부 '중화인민공화국', 중화 문명에 인민 공화국을 더한다는 것이다. 삐딱한 이들은 국가에 친화적인 발상이라며 눈을 흘긴다. 옳은 지적이다. 허나 유학 전통에선 하등 이상할 것도 없다.
재야는 국가와 척을 지며 자율성을 고수하는 시민 사회와는 다르다. 국가가 지식인을 포섭했다거나, 지식인이 국가와 타협했다는 비판은 매우 근대적인 잣대의 소산이다. 마침 우파 가운데 일부도 '유가 헌정주의'를 내세우기 시작했다. 유학과 헌정, 민주를 결부지어 담론 경쟁에 뛰어든 것이다.
어느새 좌·우 이념 구도에서 유가 내부의 학파 간 논쟁으로 재편되는 형세이다. 입장 차이는 있으되, 조정과 재야 모두 유학으로 합류하는 듯 보이는 것이다. 물론, 아직은 섣부른 과언일지 모른다. 그러나 맹탕 허언만도 아닐 것이다. 본디 동방의 혁명(revolution)이란 복고(復古), 즉 되돌리고(re-volve) 되살리는 것(Re-naissance)이었다. 길게 보면 꽤나 익숙한 풍경이다.
제국의 정치철학
유학은 지금껏 인류가 경험한 최장의, 그리고 최강의 정치 이념이다. 공자가 입안한 이래 여타 사상과의 치열한 대결과 경합 속에서 두 번의 1000년을 군림했다. 그것도 인구가 가장 많은 제국의 철학으로 거의 일관되게 정통 사상의 지위를 누렸다. 중국의 월등한 규모를 감안하자면, 여태 어느 사상과 이론도 그 다양하고 복잡한 제도 설계를 감당해 본적이 없다 하겠다. 그리하여 변방의 몽골족과 만주족이 중원을 제패하더라도, 그 제도적 관성만은 유구하게 이어졌던 것이다.
뿐인가. 조선과 월남, 류큐 등도 중원을 모방하고자 열심을 다했다. 유럽의 근대철학을 일군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치도 동방의 '철학자 정치'에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최근에는 메이지 유신의 기저에도 주자학의 흔적이 역력했다고 실토하는 형편이다. 마침내 사무라이(士)가 칼을 접고, 붓을 든 선비(士)가 되어간 것이다. 즉 유학은 불과 100년 전까지도 동아시아에서 압도적 권위를 지닌 굴지의 정치철학이었다.
그러나 유학은 근대와 불화했다. 도무지 인간에 대한 이해부터 턱없이 달랐다. 유학에 개인은 없다. In-dividual,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단독자를 상정할 수 없었다. 인간은 자자손손, DNA 네트워크의 한 매듭일 뿐이다. 홀로 됨이 없기에, 자유나 평등 같은 추상적 관념을 따르지도 않는다. 상대와 때와 장소에 따라 다양한 사회적, 윤리적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사람은 그 다면적이고 복합적인 그물망 안에서 자리한다. 부모-자식, 아내-남편, 윗사람-아랫사람, 친구 그리고 통치자-피치자의 다섯 관계이다. 이 오륜을 벗어난 인간관계는 21세기에도 없다. 오륜을 방기하는 해탈과 구원은 패륜이라 여겼다. 여기에는 만민을 평등하게 대하는'법(law)'이 적용되지 않는다.
오륜은 맺고 끊을 수 있는 사회 계약이 아니다. 그래서 서로가 각자의 역할을 다하는'예'(禮)에 정과 성을 쏟아야 한다(克己復禮). 즉 예는 차등과 위계의 논리이다. 다만 오해를 고쳐둘 필요는 있다. 예가 일방향은 아니다. 왕이 왕 노릇을 못하면 왕이 아니다. 그런 왕은 목을 치고 끌어내려야 한다. 역성 혁명은 정당한 것이다. 즉 예는 쌍방을 규제하고 구속한다. 의무일 뿐 아니라, 권리이기도하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신하는 예로써 군주를 압박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에 견주자면 못할 노릇이었다.
유학은 인간의 부족함과 모자람도 냉철하게 파악했다. 그럼에도 초월자에 의지하지는 않았다. 그런 것은 없다고 했다. 혹은 알 수 없다고 했다. 똥밭일지언정 이승에서 구르자 했다. 그러나 자치와 코뮌의 낭만을 품지도 않았다. 범인이 범인을 다스리는 것은 하향평준화이다. 인간다운 생활에서 통치와 지배는 불가결하다. 그래서 통치를 필요악으로 여기는 자유주의와도 다르고, 일체의 권력을 부정하는 아나키즘과도 다르다.
도덕의 옹호자, 문명의 보증인이 정치를 해야 한다. 성인이 무위의 정치를 펼 수는 있으되, 정치적 권위가 없는 문명은 존속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통치자는 단지 힘 센 이가 아니다. 어진 사람, 덕을 체현하고 윤리적으로 빼어난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도리어 개방적이다. 덕은 스스로 갈고 닦는 것이지, 부모에게 물려받는 것이 아니다. 부와 신분의 세습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일찍이 과거제를 도입하여 정치의 문호를 개방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배우고, 익히고, 익으면, 누구도 정치를 맡을 수 있다. 그래서 이들과 함께하는 군주는 더더욱 성인군자의 모범을 보여야 했다. 그것이 유학이 추구한 민주이다. 물론 제대로 실현되었던가는 별개이다.
유학은 국가 간에도 주권과 평등을 말하지 않았다. 나라 사이의 크고 작음은 엄연한 현실이다. 그 명백한 사실에서 출발해 올바름을 구할 뿐이다. 이름 하여, 실학이다. 대소 간의 역할에 차이가 없을 수 없다. 자유로운 개인이 만인과 투쟁하듯, 평등한 국가는 만국과 투쟁한다. 전국 시대, 아노미와 카오스의 아수라장이다. 위계 없이는 질서도 없다. 위계 없는 평등은 혼돈일 뿐이다.
그래서 차등이 있어야 한다. 다만 그 차등이 형평에 맞아야 한다. 차등은 차별과는 또 다른 것이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모시되, 큰 나라도 작은 나라를 섬겨야 한다. 그래야 작은 나라는 자율을 꾀할 수 있고, 큰 나라는 권위를 누릴 수 있다. 이 상호 구속의 길항이 기우뚱하면서도 역동적인 균형을 이룬다. 경쟁을 억제하고, 협동을 촉진하는 것이다.
누천년 동방의 사회 진화가 도출해 낸 역사의 합리적 선택이다. 즉 사대와 사소도 쌍방을 규제한다. 이 합의가 깨어지면, 천하는 다시 대란이다. 즉 위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좋은 위계를 만드는 것이 지상(地上)의 길이다. 만국 공법과 세력 균형과는 매우 다른 접근법이다.
그래서 종족, 민족, 국가를 지고의 가치로 삼지 말라 가르쳤다. 절대 국가는 독이다. 국가는 사해가 동포이고 천하가 태평한 대동 세계로 가는 징검다리일 뿐이다. 국가도 사(私)에 그치는 것이다. 혹여 국가를 절대이성의 담지체라 여기는 헤겔식 백일몽을 꾸어서는 천만 아니 된다. 그래서 판도라의 상자에 집어넣어, 하늘 아래 봉인해 두었다.
오직, 오로지, 천하만이 공(天下爲公)인 것이다. 국경 개념이 희미해져 간다는(과연 그런지는 따져 보아야겠으나…) 21세기에 찬찬히 음미해 볼 대목이다. 세계(World)와 천하(天下), 지난 100년과 1000년의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볼 일이다.
민주주의의 민주화
근대 민주주의는 인민에 의한 통치를 표방한다. 그래서 권력을 견제하고 제한하는 제도가 발달했다. 법치가 그러하고, 삼권 분립이 그러하고, 선거가 그러하다. 반면 유학은 인민을 위한 통치를 강조한다. 민본을 표방하는 정치의 장인을 길러내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학습을 강조한다.
대학(大學)은 소학(小學)에서 출발한다. 하나 보면 열을 알고, 세 살 버릇 여든 간다. 어릴 적 몸가짐부터 철저하게 규율하는 것이다. 그래도 권력을 접하면 마음이 흔들린다. 작금 정치를 도맡는 이들이 어떻게 양성되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선거로 선출된 이들과 과거(科擧)로 선발된 이들의 평균치를 비교하면 어떠할까? 단정하기 쉽지 않다.
과거를 대체한 선거마저 광고에 잠식당한 지 오래다. 올해 현장에서 지켜본 미국 대선은 역사상 가장 값비싼 선거였다. 민주, 공화 양당이 한 해 동안 쏟아부었던 비용이 세계 50위권 국가의 국내 총생산(GDP)에 해당한단다. 아연실색했다. 과연 그 비용에 합당한 사회적 결과를 산출하는지도 의문이다.
물론 지켜보는 재미는 컸다. 막판 박빙의 승부가 아슬아슬했다. 스포츠 못지않은 대중문화에 근사한 것이다. 그러나 베스트셀러가 양서는 아니며, 박스오피스 1위가 명화도 아니다. 다수가 정의는 더더욱 아니다. 과연 선거가 수준 높은 정치를 담보해주는가? 아니라고 하지는 않겠다.
다만 한 호흡 가다듬고 생각해볼 일이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했다. 투표를 한다고 만사형통, 만병통치가 아니다. 정치의 질(quality)과 정부의 능력(performance) 등 따져야 할 점이 적지 않다. 민주도 어디까지나 좋은 정치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민주주의가 번영을 낳았다는 통설은 기각되고 있다. 민주주의를 지속하면서도 '선진국'들은 쇠퇴일로이다. 민주주의 때문이 아니었다. 제국주의, 식민주의 탓이었다. 민주주의는 덤이었을 뿐이다. 전 지구적 비민주가 국지적 민주를 가능케 했다. 전 지구적 민주가 증진되자 비교우위가 사라진 것이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개개인의 욕망 충족에 충실한 과잉 성장 문명의 정치 질서이다. 산업혁명 이래의 특수한 사회적 조건에 즉응한 제도적 산물인 것이다. 그러나 지난 150년의 잔치가 더 이상 지속 불가능한 '예외 상태'였다면? 저성장과 탈성장의 자연 상태로 되돌아간다면? 미래는 알 수 없다. 미지의 세계이다. 그래서 민주의 신화를 해체할 필요가 있다. 민본을 미화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를 일방적으로 편들기 힘들고, 민본을 쉬이 매도하기 힘듦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냉전기만 해도 민주주의는 복수(複數)였다. 사회주의 국가도 민주주의 진영임을 자부했다. 그래서 자유 진영의 쇄신을 압박했다.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민주주의는 탈냉전 이후 더욱 경직된 셈이다. 즉 의식과 상상력의 차원에서 냉전은 그치지 않았다. 탈냉전이 아니라 냉전이 내면화된 것이다. 그래서 매사를 민주와 독재로 나눈다. 그 탓에 지구화라는 제도의 획일화가 단행될 수 있었다.
그래서 위태롭다. 무릇 뭍 생명 진화의 원천은 다양성이다. 인류의 문명 생태계가 단종재배(monocultue)의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저항이 없을 수 없다. 끝내 전 지구적 99퍼센트 운동이 터져 나온 것은 다행한 일이다. 나도 기꺼이 동참했다. 다함께 LA 시청을 점령하고, 작금의 민주주의가 전혀 민주적이지 않음을 타는 목마름으로 고발했다.
그리하여 '민주주의의 민주화'란 정당 정치 강화라는 근대의 반복에 그치지 않는다. 민주주의 자체를 민주화해야한다. 다른 정치, 다른 민주에 대한 상상력을 해방시켜야 한다. 그래야 '아랍의 봄'을 서구식 민주주의의 확산이라 오판하고 오독하는 과오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 실상은 그러하지 않다.
아랍은 이슬람 문명의 재건을 향해 민주화되고 있을 뿐이다. 아랍은 서구화는커녕 나날이 이슬람화 되고 있다. 20세기를 양분했던 친서구 세속주의와 반서구 근본주의 사이에서 새 길 찾기에 나선 것이다. 진정 21세기의 출발이라 하겠다. 동아시아도 이와 방불할 것이다. 남아시아도 유사할 법하다. 저마다 고전 문명에 뿌리내린 정치 질서가 (재)굴기 하는 반전의 시대이다.
하늘 아래에 새 것은 없다. 다만 내가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진리는 늘 오래된 것이다. 우리가 뒤늦게 깨달을 뿐이다. 그래서 무릎을 탁, 친다. 등잔 밑이 어두웠던 것이다. 근대가 전혀 다른 시대인 마냥 착각하는 것이, 근대가 유포한 가장 큰 우매였다. 이미 꿰뚫어 본 이가 있었다.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성 모더니스트, 김수영의 일갈이다.
2011년 10월이었다. 중국 공산당의 발표가 인상적이다. 자기네들이 "우수한 전통 문화의 충실한 전승자이자 인솔자"였단다. 과연 그랬던가, 뒷말이 많았다. 논쟁도 일었다. 지켜보자니 피식, 웃음이 났다. 사실 여부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어 보인다. 어차피 역사학 논문이 아니다. 중국의 향후를 더듬는 정치 선언으로 접수할 일이다.
절묘한 것은 오히려 시점이다. 신해혁명 100년이었다. 신해 이래 중국은 좌/우 불문, 반(反)전통이었다. 5·4 좌파는 동구를, 5·4 우파는 서구를 전범으로 삼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세력이 중국 공산당이었다. 신문화 운동의 탯줄에서 자라나, 문화 대혁명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새 문화의 혁명을 추구했다.
표적은 고전 문명의 정수인 공자와 유학이었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했다. 루쉰은 유교 문명을 식인(食人)에 비유했고, 마오쩌둥은 스스로를 진시황에 빗대었다. 흡사 20세기 판 '분서갱유(焚書坑儒)'였던 것이다.
그 비난과 수모 속에서도 유학의 명맥은 이어졌다. 근거지는 중원의 밖이었다. 타이완은 대륙의 급진적 실험을 비판하며, '정통 중국', '문화 중국', '자유 중국'의 보루를 자임했다. 유학의 계승자와 보호자를 자처한 것이다. 하더라도 좌우로 양분된 정치사상을 넘보지는 못했다. 어디까지나 문화적 정체성을 담지하고, 근대의 도덕적 위기를 치유한다는 수줍은 차원에 머물렀다. 치국과 평천하가 아니라 수신과 제가에 그쳤던 것이다. 타이완과 홍콩 그리고 구미를 풍미한 신유학의 면모가 대저 그러했다. 자유 진영의 품에서 심성을 갈고 닦는, 다소곳한 냉전형 유학으로 자족한 것이다.
작금 대륙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다시, 치국과 평천하를 담당하는 정치 유학의 부활이다. 후진타오 시대의 슬로건은 '조화 사회'였다. 유학의 언어와 이념이 관방 담론에 침투한 것이다. 때를 맞춤하여 마오보다 더 큰 공자상이 톈안먼에 들어서기도 했다. 당장 혁명 원로들과 마오파의 반발이 거셌다는 후문이다. 그래서 곧장 철거되었다.
허나 사소한 해프닝이 아니다. 왕년의 '신청년'들이 구닥다리, 늙다리가 된 것이다. 신과 구가 뒤집혀질 기미이다. 유학 붐이 지배 이데올로기라는 비판은 백번 적확하다.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한 것이다. 중국의 지배 이념이 100년을 거슬러 고전 사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탓이다. 이미 세계를 누비며 중국을 선전하는 것은 '마오 어록'이 아니라 '공자 학원'이다.
신좌파의 일부는 '유가 사회주의 공화국'을 주창한다. 사회주의를 근간으로 삼되, 전통 문명과의 결합을 꾀한다. 그래서 명실상부 '중화인민공화국', 중화 문명에 인민 공화국을 더한다는 것이다. 삐딱한 이들은 국가에 친화적인 발상이라며 눈을 흘긴다. 옳은 지적이다. 허나 유학 전통에선 하등 이상할 것도 없다.
재야는 국가와 척을 지며 자율성을 고수하는 시민 사회와는 다르다. 국가가 지식인을 포섭했다거나, 지식인이 국가와 타협했다는 비판은 매우 근대적인 잣대의 소산이다. 마침 우파 가운데 일부도 '유가 헌정주의'를 내세우기 시작했다. 유학과 헌정, 민주를 결부지어 담론 경쟁에 뛰어든 것이다.
어느새 좌·우 이념 구도에서 유가 내부의 학파 간 논쟁으로 재편되는 형세이다. 입장 차이는 있으되, 조정과 재야 모두 유학으로 합류하는 듯 보이는 것이다. 물론, 아직은 섣부른 과언일지 모른다. 그러나 맹탕 허언만도 아닐 것이다. 본디 동방의 혁명(revolution)이란 복고(復古), 즉 되돌리고(re-volve) 되살리는 것(Re-naissance)이었다. 길게 보면 꽤나 익숙한 풍경이다.
▲ 공자. ⓒ프레시안 |
제국의 정치철학
유학은 지금껏 인류가 경험한 최장의, 그리고 최강의 정치 이념이다. 공자가 입안한 이래 여타 사상과의 치열한 대결과 경합 속에서 두 번의 1000년을 군림했다. 그것도 인구가 가장 많은 제국의 철학으로 거의 일관되게 정통 사상의 지위를 누렸다. 중국의 월등한 규모를 감안하자면, 여태 어느 사상과 이론도 그 다양하고 복잡한 제도 설계를 감당해 본적이 없다 하겠다. 그리하여 변방의 몽골족과 만주족이 중원을 제패하더라도, 그 제도적 관성만은 유구하게 이어졌던 것이다.
뿐인가. 조선과 월남, 류큐 등도 중원을 모방하고자 열심을 다했다. 유럽의 근대철학을 일군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치도 동방의 '철학자 정치'에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최근에는 메이지 유신의 기저에도 주자학의 흔적이 역력했다고 실토하는 형편이다. 마침내 사무라이(士)가 칼을 접고, 붓을 든 선비(士)가 되어간 것이다. 즉 유학은 불과 100년 전까지도 동아시아에서 압도적 권위를 지닌 굴지의 정치철학이었다.
그러나 유학은 근대와 불화했다. 도무지 인간에 대한 이해부터 턱없이 달랐다. 유학에 개인은 없다. In-dividual,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단독자를 상정할 수 없었다. 인간은 자자손손, DNA 네트워크의 한 매듭일 뿐이다. 홀로 됨이 없기에, 자유나 평등 같은 추상적 관념을 따르지도 않는다. 상대와 때와 장소에 따라 다양한 사회적, 윤리적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사람은 그 다면적이고 복합적인 그물망 안에서 자리한다. 부모-자식, 아내-남편, 윗사람-아랫사람, 친구 그리고 통치자-피치자의 다섯 관계이다. 이 오륜을 벗어난 인간관계는 21세기에도 없다. 오륜을 방기하는 해탈과 구원은 패륜이라 여겼다. 여기에는 만민을 평등하게 대하는'법(law)'이 적용되지 않는다.
오륜은 맺고 끊을 수 있는 사회 계약이 아니다. 그래서 서로가 각자의 역할을 다하는'예'(禮)에 정과 성을 쏟아야 한다(克己復禮). 즉 예는 차등과 위계의 논리이다. 다만 오해를 고쳐둘 필요는 있다. 예가 일방향은 아니다. 왕이 왕 노릇을 못하면 왕이 아니다. 그런 왕은 목을 치고 끌어내려야 한다. 역성 혁명은 정당한 것이다. 즉 예는 쌍방을 규제하고 구속한다. 의무일 뿐 아니라, 권리이기도하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신하는 예로써 군주를 압박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에 견주자면 못할 노릇이었다.
유학은 인간의 부족함과 모자람도 냉철하게 파악했다. 그럼에도 초월자에 의지하지는 않았다. 그런 것은 없다고 했다. 혹은 알 수 없다고 했다. 똥밭일지언정 이승에서 구르자 했다. 그러나 자치와 코뮌의 낭만을 품지도 않았다. 범인이 범인을 다스리는 것은 하향평준화이다. 인간다운 생활에서 통치와 지배는 불가결하다. 그래서 통치를 필요악으로 여기는 자유주의와도 다르고, 일체의 권력을 부정하는 아나키즘과도 다르다.
도덕의 옹호자, 문명의 보증인이 정치를 해야 한다. 성인이 무위의 정치를 펼 수는 있으되, 정치적 권위가 없는 문명은 존속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통치자는 단지 힘 센 이가 아니다. 어진 사람, 덕을 체현하고 윤리적으로 빼어난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도리어 개방적이다. 덕은 스스로 갈고 닦는 것이지, 부모에게 물려받는 것이 아니다. 부와 신분의 세습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일찍이 과거제를 도입하여 정치의 문호를 개방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배우고, 익히고, 익으면, 누구도 정치를 맡을 수 있다. 그래서 이들과 함께하는 군주는 더더욱 성인군자의 모범을 보여야 했다. 그것이 유학이 추구한 민주이다. 물론 제대로 실현되었던가는 별개이다.
유학은 국가 간에도 주권과 평등을 말하지 않았다. 나라 사이의 크고 작음은 엄연한 현실이다. 그 명백한 사실에서 출발해 올바름을 구할 뿐이다. 이름 하여, 실학이다. 대소 간의 역할에 차이가 없을 수 없다. 자유로운 개인이 만인과 투쟁하듯, 평등한 국가는 만국과 투쟁한다. 전국 시대, 아노미와 카오스의 아수라장이다. 위계 없이는 질서도 없다. 위계 없는 평등은 혼돈일 뿐이다.
그래서 차등이 있어야 한다. 다만 그 차등이 형평에 맞아야 한다. 차등은 차별과는 또 다른 것이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모시되, 큰 나라도 작은 나라를 섬겨야 한다. 그래야 작은 나라는 자율을 꾀할 수 있고, 큰 나라는 권위를 누릴 수 있다. 이 상호 구속의 길항이 기우뚱하면서도 역동적인 균형을 이룬다. 경쟁을 억제하고, 협동을 촉진하는 것이다.
누천년 동방의 사회 진화가 도출해 낸 역사의 합리적 선택이다. 즉 사대와 사소도 쌍방을 규제한다. 이 합의가 깨어지면, 천하는 다시 대란이다. 즉 위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좋은 위계를 만드는 것이 지상(地上)의 길이다. 만국 공법과 세력 균형과는 매우 다른 접근법이다.
그래서 종족, 민족, 국가를 지고의 가치로 삼지 말라 가르쳤다. 절대 국가는 독이다. 국가는 사해가 동포이고 천하가 태평한 대동 세계로 가는 징검다리일 뿐이다. 국가도 사(私)에 그치는 것이다. 혹여 국가를 절대이성의 담지체라 여기는 헤겔식 백일몽을 꾸어서는 천만 아니 된다. 그래서 판도라의 상자에 집어넣어, 하늘 아래 봉인해 두었다.
오직, 오로지, 천하만이 공(天下爲公)인 것이다. 국경 개념이 희미해져 간다는(과연 그런지는 따져 보아야겠으나…) 21세기에 찬찬히 음미해 볼 대목이다. 세계(World)와 천하(天下), 지난 100년과 1000년의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볼 일이다.
민주주의의 민주화
근대 민주주의는 인민에 의한 통치를 표방한다. 그래서 권력을 견제하고 제한하는 제도가 발달했다. 법치가 그러하고, 삼권 분립이 그러하고, 선거가 그러하다. 반면 유학은 인민을 위한 통치를 강조한다. 민본을 표방하는 정치의 장인을 길러내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학습을 강조한다.
대학(大學)은 소학(小學)에서 출발한다. 하나 보면 열을 알고, 세 살 버릇 여든 간다. 어릴 적 몸가짐부터 철저하게 규율하는 것이다. 그래도 권력을 접하면 마음이 흔들린다. 작금 정치를 도맡는 이들이 어떻게 양성되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선거로 선출된 이들과 과거(科擧)로 선발된 이들의 평균치를 비교하면 어떠할까? 단정하기 쉽지 않다.
과거를 대체한 선거마저 광고에 잠식당한 지 오래다. 올해 현장에서 지켜본 미국 대선은 역사상 가장 값비싼 선거였다. 민주, 공화 양당이 한 해 동안 쏟아부었던 비용이 세계 50위권 국가의 국내 총생산(GDP)에 해당한단다. 아연실색했다. 과연 그 비용에 합당한 사회적 결과를 산출하는지도 의문이다.
물론 지켜보는 재미는 컸다. 막판 박빙의 승부가 아슬아슬했다. 스포츠 못지않은 대중문화에 근사한 것이다. 그러나 베스트셀러가 양서는 아니며, 박스오피스 1위가 명화도 아니다. 다수가 정의는 더더욱 아니다. 과연 선거가 수준 높은 정치를 담보해주는가? 아니라고 하지는 않겠다.
다만 한 호흡 가다듬고 생각해볼 일이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했다. 투표를 한다고 만사형통, 만병통치가 아니다. 정치의 질(quality)과 정부의 능력(performance) 등 따져야 할 점이 적지 않다. 민주도 어디까지나 좋은 정치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민주주의가 번영을 낳았다는 통설은 기각되고 있다. 민주주의를 지속하면서도 '선진국'들은 쇠퇴일로이다. 민주주의 때문이 아니었다. 제국주의, 식민주의 탓이었다. 민주주의는 덤이었을 뿐이다. 전 지구적 비민주가 국지적 민주를 가능케 했다. 전 지구적 민주가 증진되자 비교우위가 사라진 것이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개개인의 욕망 충족에 충실한 과잉 성장 문명의 정치 질서이다. 산업혁명 이래의 특수한 사회적 조건에 즉응한 제도적 산물인 것이다. 그러나 지난 150년의 잔치가 더 이상 지속 불가능한 '예외 상태'였다면? 저성장과 탈성장의 자연 상태로 되돌아간다면? 미래는 알 수 없다. 미지의 세계이다. 그래서 민주의 신화를 해체할 필요가 있다. 민본을 미화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를 일방적으로 편들기 힘들고, 민본을 쉬이 매도하기 힘듦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냉전기만 해도 민주주의는 복수(複數)였다. 사회주의 국가도 민주주의 진영임을 자부했다. 그래서 자유 진영의 쇄신을 압박했다.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민주주의는 탈냉전 이후 더욱 경직된 셈이다. 즉 의식과 상상력의 차원에서 냉전은 그치지 않았다. 탈냉전이 아니라 냉전이 내면화된 것이다. 그래서 매사를 민주와 독재로 나눈다. 그 탓에 지구화라는 제도의 획일화가 단행될 수 있었다.
그래서 위태롭다. 무릇 뭍 생명 진화의 원천은 다양성이다. 인류의 문명 생태계가 단종재배(monocultue)의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저항이 없을 수 없다. 끝내 전 지구적 99퍼센트 운동이 터져 나온 것은 다행한 일이다. 나도 기꺼이 동참했다. 다함께 LA 시청을 점령하고, 작금의 민주주의가 전혀 민주적이지 않음을 타는 목마름으로 고발했다.
그리하여 '민주주의의 민주화'란 정당 정치 강화라는 근대의 반복에 그치지 않는다. 민주주의 자체를 민주화해야한다. 다른 정치, 다른 민주에 대한 상상력을 해방시켜야 한다. 그래야 '아랍의 봄'을 서구식 민주주의의 확산이라 오판하고 오독하는 과오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 실상은 그러하지 않다.
아랍은 이슬람 문명의 재건을 향해 민주화되고 있을 뿐이다. 아랍은 서구화는커녕 나날이 이슬람화 되고 있다. 20세기를 양분했던 친서구 세속주의와 반서구 근본주의 사이에서 새 길 찾기에 나선 것이다. 진정 21세기의 출발이라 하겠다. 동아시아도 이와 방불할 것이다. 남아시아도 유사할 법하다. 저마다 고전 문명에 뿌리내린 정치 질서가 (재)굴기 하는 반전의 시대이다.
하늘 아래에 새 것은 없다. 다만 내가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진리는 늘 오래된 것이다. 우리가 뒤늦게 깨달을 뿐이다. 그래서 무릎을 탁, 친다. 등잔 밑이 어두웠던 것이다. 근대가 전혀 다른 시대인 마냥 착각하는 것이, 근대가 유포한 가장 큰 우매였다. 이미 꿰뚫어 본 이가 있었다.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성 모더니스트, 김수영의 일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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