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봄 계명대 전임강사로 자리 잡을 때까지 해외에 나가본 일 없이 국내에서만 공부를 해 왔지만, 나는 국내의 학풍이 너무 좁고 경직된 데 불만을 품고 있었다. 당시 국내의 중국사 전공자로는 이례적으로 서양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를 집중적으로 검토하게 된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학교에 자리 잡고 과학사학회 간사 일을 맡으면서 외국 학자들과 편지 주고 받는 일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때 내 영문 이름을 지었다. "Orun Kihyup Kim"으로.

1970년경에 형 둘이 다 버클리로 유학을 갔는데, 이름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가서 겪은 문제를 알고 있었다. 원래 이름을 그대로 옮겨서 "Ki Bong Kim", "Ki Mok Kim"으로 했는데, 퍼스트네임이 같게 된 것이다. 미들네임이야 누가 신경 쓰나? 형제가 같은 이름으로 같은 학교에 다닌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고지식한 짓을 따라 하지 말고, '부르기 좋고 듣기 좋은' 이름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Orun'을 만든 것이다. 이름 불릴 때 "어른, 어른" 하는 것이 듣기 좋을 것 같았다. 부르기도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고.

그런데 1985년 상반부를 케임브리지의 니덤 연구소에 가서 지내기로 결정하고 수속을 위해 편지를 주고받다가 문제가 발생했다. 니덤 박사는 1900년 생으로 당시 84세였는데, 편지 한 장을 비서 시키지 않고 자기 손으로 타이핑해서 내게 보내왔다. 내 이름의 의미를 묻는 편지였다.

한자에 빠삭한 니덤 박사는 한국 발음체계는 모르더라도 'Kihyup Kim'이 '金基協'에 대응한다는 사실을 알아보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앞에 붙은 'Orun'이 뭐냐고 묻는 것이었다. 종교적 직책이나 신분을 나타내는 타이틀이냐고.

그래서 답장을 쓰는데, 참 난감했다. 50세 연상의 노 학자에게 나를 보고 "어른, 어른" 불러달라고 한 셈 아닌가. 이름의 뜻과 만든 경위를 설명한 다음 이렇게 덧붙였던 것 같다. "I am afraid I was not thoughtful enough in deciding my name. I failed at the time to imagine that I would one day be asking an elderly person like you to call me by that name."

반년 후 케임브리지에 도착해서 연구소를 찾아가 현관에서 벨을 누르니 내 또래의 청년이(Gregory Blue) 나와서 문을 열고 내 얼굴을 보더니 대뜸 "You are Orun from Korea, aren't you!" 반색을 하는 것이었다. 안으로 끌고 들어가서는 마침 커피타임이라 회의실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We have Orun here." 하고 다 아는 인물 소개하듯 하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니덤 영감님이 내 편지가 재미있다고 온 식구들에게 회람을 시켜서 다들 내 이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편지를 본 사람들은 내 개성을 조금이라도 파악했다는 느낌을 가졌는지, 생전 처음 서양에 온 사람을 식구 중 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 생활과 활동에 적응하는 데 큰 도움이 된 일이다.
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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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7.05 16:31

    오랜만에 교수님의 블로그에 들어와서 글을 읽는 데, 역시 재미가 있군요. 81년에 계명대에 오셨군요. 저도 대학교 4학년 때 졸업논문을 쓸 때는 계명대학교 도서관이 잘되어있어서 주로 계명대에 갔었습니다. 계명대와 저는 이래 저래 인연이 깊어요. 초등학교 6학년에서 중2때까지 YMCA어린이 합창단 활동을 하면서 주로 계명대 노천강당에서 연습을 했고, 년말에는 강당에서 공연을 했어요. 지휘자선생님, 반주자 선생님 모두 계명대 선생님이셨지요. 담쟁이 넝쿨로 싸여진 건물이 아름다왔습니다. 국립대의 보수적인 것보다 계명대학교의 예술성과 자유분방한 느낌을 좋아했네요.

  2. 2011.07.07 06:04

    교수님 저는 orun이 오른인 줄 알고,,, 평소에 보수주의자를 자처하셔서.... 오른킴... 즉.. 우파김으로 생각했었습니다.

    저도 이름이 외국애들이 부르기에는,,,, 상당히 힘들어서 (절대 못 따라해서....) 그냥.. 군대에서 써전 허, 코포럴 허.. 프라이빗 허... 이렇게 불렸던 것 같이 그냥 huh라고 부르라고..... 외국이름을 또 만드는다는 것도 이상하고.... 좀 하나 만들려고 해도..... 이게 뭐 마이크 이렇게 불리기는 싫고요.... 저는 외국인들이 부르기 쉽게... DAEIN같은 것으로 지어야겠네요.....

    그런데 제가 사학과에 다녀보지는 않아서 잘 모르겠는데,,,, 한국은 역사철학이나 역사이론에 대한 접근이 좀 부족하지 않나 싶습니다.... 대중서나,, 아니면 전문적인 논문이나.. 그쪽 분야를 다루는 부분이 많지 않고.... 사실 일반 대중서라고 해도... 이게 특정한 철학체계를 바탕으로 쓰여지기 마련인데,,, 그런게 안 보여서 좀 아쉬운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좁고 경직된 학풍도 아마 그런 것이 아닌지....가령 한국에서 Imagined Communities같은 역작이.. 나올 수가.. 있을지....

  3. 2011.08.24 10:56

    저는 '옳은'을 음 그대로 읽어서 '오른'으로 쓴 줄 알았습니다.. 그 전설의 니덤 할아버지를 만나셨군요..부럽삼^^니덤의 책 중에서 중국의 교량건설기술을 설명하면서 수나라때것인지 아치다리를 예시한 것이 있었는데, 일본 나가사키의 메가네바시(반원형 이중아치다리가 물에 비치면 안경과 같아서 안경다리라고 하더군요)를 봤을때, 그 때 그 도판이 생각나서 니덤 할아버지가 생각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