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환이라는 “미친X” 때문에 또 한 차례 세상이 시끄럽다. 국회 회의장에서 특정한 국회의원을 놓고 “미친X”라고 했을 때도, 지방선거에서 야당 찍은 젊은 애들 북한 가라고 했을 때도 저거야말로 참 “미친X”구나 하는 생각을 거듭거듭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미친X”가 좀 억울할 것 같다. 아비가 딸자식 보살펴준 것뿐인데.


이번에 걱정할 일은 특정한 “미친X”의 정신상태가 아니라 이 사회의 구조문제다. 그 문제를 차분히 살펴보기 위해서는 이름만 들어도 혈압이 오르는 이 “미친X”보다 정상인에 가까워 보이는 사람의 경우를 들여다보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진수희 보건복지부 장관의 지난 달 국회 청문회 장면이 하나 떠오른다. 미국 국적을 선택한 자녀들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 의원의 “따님의 국적을 회복할 생각은 있느냐"는 질문에 "진행하고 있는 과정을 끝내고 돌아오면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라고 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감정이 복받치는 듯 울먹이는 목소리로 "우리나라를 위해 일할 아이라는 것은 확신을 갖고 말씀드리겠다."고 덧붙였다고 한다.


후보자 본인 아닌 가족의 국적 회복 의사를 묻는 것부터 객쩍은 짓으로 느껴졌는데, 그 대답을 들으며 두 차례 닭살이 돋았다. 한 차례는 답변 앞부분에서 “당연히”란 말을 들을 때, 또 한 차례는 뒷부분에서 “우리나라를 위해”란 말을 들을 때. 떠올리는 지금도 닭살이 새로 돋는다.


국적 회복이 왜 ‘당연한’ 일인가? 국적 회복은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일이다. 어느 쪽으로도 합당한 이유는 각자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내 형 하나가 미국에 유학 갔다가 학업이 끝난 후 그곳에서 계속 일하게 되어 미국으로 귀화했다. 그가 퇴직 후 한국으로 돌아오면 같이 놀기 좋겠다고 은근히 바라는 마음은 있지만 그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지는 않는다. 그에게는 같이 놀고 싶어 하는 동생 외에도 고려할 사항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진 장관 딸에게는 왜 국적 회복이 ‘당연한’ 일일까? 장관 딸이라서? 국회의원 딸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일이 장관 딸에게는 당연한 것이 되나? 그렇게 당연한 일을 꼭 하는 집안이라면, 지금은 학업을 위해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게 ‘당연한’ 일인가?


“당연히”라는 말이 이런 이유로 귀에 거슬리지만, 그리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 “픽” 실소를 유발하는 정도다. 그런데 “우리나라를 위해”, 이건 좀 심각한 문제다.


딸아이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우리나라를 위해”란 표현을 쓰는 사람은 그 표현이 무슨 뜻인지 자신 있게 알고 있다는 거다. 그 뜻을 알면서 당당히 쓰는 것은 자기가 그렇게 산다고 믿고 있다는 거다.


그런 믿음을 전제로 하면 전에 이해되지 않던 것이 이해되는 일이 있다. 촛불 사태 때를 비롯해서 수시로 진수희 한나라당 의원이 쏟아내던 말 같지 않은 소리들. 청문회에서 그에 대한 추궁이 있자, “그때는 국회의원이라서 그런 태도를 취했다.”고 변명했다고.


진수희는 아마 자신이 “우리나라를 위해” 애쓰는 사람이라고 자임하는 모양이다. 국민 대다수에 비해 자기가 훨씬 뛰어난 애국자라고 믿는 모양이다. 그런 믿음이 있으니까 상황 판단에 따라 극단적 행동도 하고 극단적 표현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국회의원과 장관 중에만이 아니라 일반인 중에도 “우리나라를 위해” 애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를 나는 바란다. 그러나 자기가 그런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좀 적었으면 좋겠다. 스스로 착한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이 착하지 못한 짓을 스스럼없이 잘하기 쉬운 것처럼 스스로 애국자라고 믿는 사람들이 나라 망치는 데 한 술 더 뜨는 일이 너무 많다.


그런데 그런 믿음을 대물림까지 하겠다니까 내가 ‘구조문제’라 하는 것이다. 미국 같은 고급 나라 국적을 가지고 그 고급 나라에서 고급 학력까지 쌓은 고급 인재가 한국을 위해 일하겠다는 것은 엄청나게 착한 마음이다. 다른 나라 국적 선택할 능력도 형편도 안 되는 보통사람들이 불가피하게 주어진 나라와 애증이 엇갈린 관계를 평생 끌어안고 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미국에서 출생해 국적 선택의 기회를 가지고, 별로 “당연한” 것 같지 않은 선택을 미국 쪽으로 한 진 장관 따님, 한국을 위해 일하겠다는 고마운 마음 일으킬 것 없이 미국인으로 그냥 잘 살아주기 바란다. 우리나라에 고급 인재가 더 많으면 좋은 점도 있겠지만, 개인의 행복까지 희생시켜야 할 정도로 궁하지는 않다. 이빨이 모자라면 잇몸으로도 씹을 수 있다. 그리고 너무 착한 마음으로 한국을 대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오히려 착하지 못한 짓을 하게 될 위험도 크다는 점을 생각해주기 바란다.


“외무고시 2부 합격자 41%, 외교부 고위직 자녀”란 기사가 눈에 띈다. 아마 진 장관처럼 자식들이 “우리나라를 위해” 일하게 하려는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것을 대다수 국민이 고마워하지 않는 것이 무슨 까닭일까?


해방 후 한국에서 돌아가는 일본인 대열 속에 아사노 미치오라는 사람이 있었다. 원래는 현영섭이란 이름의 조선인으로 태어난 사람이다. 어느 친일파보다 철저한 일본인이 되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는데, 끝내 일본 출신의 일본인다운 직업조차 가지지 못했다. 일본인으로서 그의 가치는 ‘조선인 출신의 일본인’에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 전 아사노가 한 일은 조선인들에게 ‘일시동인’을 받아들여 ‘내선일체’를 이루자고 설득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일 하는 것이 조선인을 위한 일이라고 믿는다고 주장했다. 정말 그렇게 믿었을지도 모른다.


한국인 아닌 사람들, 또는 자신이 한국인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한국을 위해 일하겠다는 지나치게 착한 마음을 너무 많이 일으키지 않기 바란다. 마음도 착하고 능력도 뛰어난 그 고급 인재들의 도움 없이 경제의 고속 성장이 설령 어렵다 하더라도, 보통사람들끼리 마음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