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 7. 15:18

어제로 만 60세가 되었다. 회갑? 웃음이 픽픽 나온다. 이제 일을 일답게 시작하는 참인데... 그리고 오랫동안 사람들과의 관계에 신경도 써 오지 않았다. 따로 별 일 없어도 이따금씩 보며 지내는 친구들이나 평소보다 좀 넓게 불러 저녁이나 같이 할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아내가 집에서 하잔다. 그래도 명색 있는 날인데, 바깥 음식 먹게 해서는 자기가 너무 면목없다고. 친구들이야 다 좋아하겠지. 아내를 알고 지내는 친구들은 다들 아내를 좋아하고, 내 인간성을 향상시켜 줬다고 그 사람에게 고마워하니까. 그리고 아내가 만들어주는 음식도 대개들 좋아한다. 못이기는 체하고 그러자고 했다.

이따금 친구들 집에 부를 때도 많아야 일고여덟 명인데, 이번엔 아무래도 열 명은 넘을 테니... 피난살이 같은 살림에 그릇부터 문제다. 요리접시와 앞접시, 그리고 술잔을 몇 개씩 사는 것도 아내는 아까워서 마음이 아프지만 이번엔 정말 큰 맘 먹고 준비할 것 다 한다. 밥상도 사야 하나 고심하다가 상각 선생이 차에 실을 만한 게 있다 해서 빌리기로 했다.

누구누구 부르나... 이럴 때는 내 미니멀리즘 취향이 스스로 생각해도 돋보인다. 다년간 의지해서 지내 온 이웃의 상각 선생과 일문 선생, 그리고 연식 선생과 동범 선생은 서로 얽힌 한 덩어리다. 그리고 유빠그룹에서 애환을 나눠 온 녹두님, 정신님, 째비님은 상각 선생, 일문 선생과도 정분이 쌓여 쉽게 어울릴 수 있는 범위. 그리고 내 일에 요긴한 도움을 주는 돌베개의 김 선생과 조 선생, 프레시안의 강 기자도 이런 기회에 한 번 찾아와 주면 나쁘지 않겠다. 강 기자는 오기 힘들 것을 알지만 혹시 하는 생각으로 메일에 비쳐 놓았더니 역시 오지는 못했어도 박 대표를 찔러줬는지 굴을 택배로 보내줘서 비친 보람을 느꼈다.

제일 애매한 게 바둑친구들. 십여 년간 정든 사이인데 그냥 지나가기 미안하지만, 그 친구들 여기까지 오게 하면 하룻밤 놀게 해주기는 해얄텐데... 놀자고 어울리는 사이니까... 그런데 요즘 놀 틈 없이 지내는 신세에 놀이판 펼칠 엄두가 안 난다. 바둑 외의 일로도 왕래를 해온 작가 허방 선생과 사업가 건달 사범, 보솔 사범에게만 연락했다. 놀이판 없어도 일산에 가끔씩 찾아주는 분들이다.

그리고 썬생님 친구분 아드님 이 전무. 얼굴 두 번 본 분이 한 번 또 찾아오고 싶다는 메일이 있기에 기왕이면 어느 날 와서 산에나 같이 올라가자고 해놨는데... 무심코 메일을 보내고 나서 생각하니 행여 부담스럽게 생각할까봐 걱정이 된다. 두 번 메일을 더 보내 절대 빈손으로 오시라고 신신당부했는데, 끝내 곶감 한 짐을 싸들고 왔다. 다른 손님들과 어울리지는 않고, 낮에 내외가 함께 와 차 한 잔 마시고 갔다. 민망하기는 하지만... 갖다주신 뜻을 받들어 맛있게 먹는 수밖에...

오후 산보는 유빠 세 분, 연식 선생, 일문 선생과 오랜만에 나타난 영진이가 함께 했다. 세 시에 출발했다가 다섯 시 반에 돌아왔다. 날씨가 각별히 맑아 심학산 정상에서 멀리 내다볼 수 있었다. 강화도 바깥쪽 황해도의 해안선까지 이렇게 내다볼 수 있었던 것은 처음이다.

집에 들어와 조금 있으니 동범 선생과 상각 선생이 밥상을 갖고 와 자리를 펴고 앉았다. 그 시점에서 나까지 아홉 명. 바둑 친구들이 허방, 보솔, 건달 순서로 시차를 두고 나타나고, 돌베개 두 분은 판이 다 무르익은 뒤에 나타났다. 자리에 거의 앉지 않은 아내를 빼고 술자리를 함께 즐긴 사람이 14명. 좋아하는 분들을 이렇게 많이 모아서 놀아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백주 여덟 병과 돌베개 한 사장이 보내준 꼬냑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줬다. 음식도 잘들 먹어줘서 아내가 흐뭇해 했다.

그런데 술자리가 무르익으면서 슬슬 걱정이 시작된다. 너무 일찍 시작했다. 아직 아홉시도 안 됐는데 꼭지가 돌기 시작하는 선수들이 있다. 이 자리에서 처음 마주친 이들도 있는데, 기질이 발랄한 이 친구들이 모두 무사한 몸으로 내일을 맞을 수 있을 것인가?

앞장서서 끼를 드러낸 것은 단연 허방 선생. 오랜만에 오면서 오기 전부터 너무 기분이 좋았다. 정말 모처럼의 이빨 작렬이다. 건달 사범이 힘껏 견제를 하지만 역부족. 할 수 없이 내가 간간이 찬물을 끼얹어주는 수밖에.

자기 바둑이 나보다 고수라는 사실을 열렬히 강조하는데, 건달이 "허방 형님은 나보다 하수고, 문천 형님이 나보다 조금 쎄." 하고 아무리 초를 쳐도 굽히지 않는다. 바둑 모르는 분들이 내게 사실(내지는 내 의견)을 밝혀달라고 하기에 "나이가 60대가 되면 그런 데 신경이 쓰이지가 않아요." 했더니 허방 선생, 조금 머쓱해한다. 나보다 두 살 아래인 허방 선생이 손님들 중에서는 제일 연장자였다.

허방 선생이 자청해서 노래를 뽑았는데, 평소 실력보다도 잘 빠졌다. 나부터 시작해서 많은 청중이 감명받은 기색을 보이니 신명이 났다. "내 자랑 하는 거 같아서 뭐하지만... 내가 서라벌예대 문창과 다닐 때 성악과 교수가 나한테 성악과로 전과하라고 권한 일도 있어요." 이럴 때 한 마디 찔러주지 않고 못 배기는 건 내 인간성이 아직도 순화되지 못한 면을 보여준다. "그 교수님이 허방 선생 글을 읽어보고 그렇게 권합디까?"

결국 자리를 정리한 것은 타고난 해결사 건달 사범이었다. 9시 반이 되었을 때, 술과 피로를 이기지 못해 방에 들어가 쉬고 있던 허방 선생과 영진이, 그리고 아내를 빼놓고는 모든 손님이 나랑 함께 집에서 쫓겨났다. 내일의 일을 위해 먼저 일어선 보솔 사범과 동범 선생, 그리고 술 오르면 소문 없이 사라지는 상각 선생을 제하고 여덟 사람이 길거리에 몰려나갔다가 돌베개 두 분이 먼저 찢어졌다. 남은 여섯이 맥주집에 들어가자 하는 것을 내가 제안해 당구장으로 갔다.

당구장에 자리 잡은 뒤 건달 사범에게 합류하라고 전화했더니 득달같이 쫓아왔는데, 같이 놀자는 게 아니라 나를 우악스럽게 끌고 나온다. 어안이 벙벙해서 쳐다보는 다른 손님들에겐 "오늘은 우리 형님 쓸 데가 따로 있으니까 보고 싶으면 다른 날 보셔!" 외쳐 놓고 집에 끌고 와서는 "오늘은 땃 짓 말고 형수님이랑 노셔!"

쉴 만큼 쉬고 나온 영진이랑 얘기를 좀 나누는 사이에 책임 완수한 건달 사범은 허방 선생이 쉬고 있는 방에 따라들어가 골아떨어졌다. 영진이를 보내고 아내와 자리에 들었다가 날 밝을 때 문 열리는 소리에 깨어나 나가 보니 현관문은 열려 있고 사람은 하나도 없다. 건달 사범 전화를 돌리니 "저 이제 집에 들어왔어요. 잘 놀았어요." 뒤이어 허방 선생 전화를 돌리니 "대화역까지 왔습니다. 잘 놀고 갑니다. 다음에 더 확실히 폐를 끼치죠."

회갑잔치가 이렇게 수월한 건 줄 몰랐다. 이 정도라면 매달이라도 하겠다. (읔! 아내가 볼라!)

정겨운 선물 이것 저것 모두 마음이 흐뭇한데, 하나 마음에 쎄게 걸리는 물건이 있다. 디카. 상각 선생과 동범 선생이 구해 왔는데, 내 필요를 알뜰하게 살펴준 마음도 고맙거니와, 돈도 만만치 않은 물건인데. 과분한 선물이지만 요긴한 물건이니 잘 쓸 수밖에. 그래~ 마음에 새겨 뒀다가 즈그들 회갑 때 답례를 잘 해야지~ (아직 십여 년 남았지?)

'사는 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유빠일까?  (24) 2010.03.10
내 몸을 맡아주실 분  (3) 2010.02.23
週 2회의 권리와 의무  (10) 2010.02.15
행복? 좋아요!  (13) 2010.02.14
불안감의 정체  (7) 2010.02.09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