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군이 점령지역 주민의 자치활동을 육성하려 애쓴 사실은 치스차코프 사령관이 입국한 바로 다음날의 일에서 나타난다. 8월 24일 함흥에 도착한 치스차코프는 이튿날 아침 도지사 등 일본 측과 무장해제 및 행정권 접수를 의논한 다음 치안 유지와 행정사무 일반을 도지사 이하 일본인들이 당분간 계속해서 맡는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 날 오후 함남 공산주의협의회와 건준 함남지부 몇 사람을 만나 조선민족 함남집행위원회 결성 방침을 듣고는 오전의 포고문을 취소하고 이 위원회에 치안과 행정을 맡기며 헌병과 경찰관의 무장해제를 명령했다.


8월 15일의 항복 선언은 문자 그대로 선언일 뿐, 일본제국의 통치력이 바로 소멸한 것이 아니었다. 천황이 휘하의 모든 행정조직과 군대에게 연합군에의 항복을 명령했고, 연합군은 일반명령 제1호로 항복 받을 범위를 결정했다. 한반도의 38선 이북에는 소련군이 도착할 때까지, 이남에는 미군이 도착할 때까지 총독부와 주둔군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자리는 지키고 있어도 퇴출이 결정된 권력은 ‘레임 덕’이 아니라 ‘데드 덕’이다. 도발자에 대한 보복 능력은 공권력의 중요한 근거다. 일 저지르고 도망가는 놈이 있을 때 몇 년이라도 수배하고 수색해서 혼내줄 수 있다는 전제 하에 공권력이 성립된다. 몇 주일 후 사라질 권력은 공권력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다. 그래서 8월 15일 아침에 정무총감이 여운형에게 ‘질서 유지 협력’을 부탁했던 것이다.


<8-15의 기억> 중(183-185쪽) 강창덕의 회고에 의하면 8월 17, 18일경 한밤중 경북 하양의 강씨 집 부근 일본인 부대에서 느닷없는 기관총 소리가 터져 나와 인근 주민을 공포에 떨게 했다고 한다. 나중에 들으니 남는 실탄을 소진시킨 것이라고 부대장이 대답했다는데, 이것을 사람들은 “그건 하나의 변명이고 사실은 겁을 주려고 한 것이다. 일본인들이 생명에 상당한 위협을 느끼니까, 자기 교민들 보호하고 조선인에 대해서는 위협을 하려고 한 것이다.” 해석했다고 한다.


남에게 겁을 줄 필요는 자기가 겁을 먹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아직 총과 도장을 쥐고 있기는 하지만 일본인들은 질서 유지에 목숨이 걸려 있었고, 자기네 질서 유지 능력은 사라지고 있었다. 경기도 이천에서 순사로 근무하던 홍순복의 같은 책에 실린(232-233쪽) 회고에는 조선인 순사들은 다 도망가고 없었으며 이웃 주재소의 한 일본인 순사는 가족과 함께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점령군의 입국 이후에도 그 손길이 닿을 때까지 지방의 권력 공백 상태는 계속되었다. 명목상의 권력을 쥐고 있던 일본인들은 새로운 권력으로 나타나는 주민의 자생적 조직을 극단적으로 적대할 수 없었다. 정무총감이 여운형에게 부탁한 것처럼 지역의 유력 인사나 유력 조직에게 협조를 부탁할 수 있는 상황이 모든 곳에서 펼쳐졌다.


주민의 자치 조직을 위한 모처럼의 기회가 각 지역의 조건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활용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른 지역과의 연계를 통한 조직의 확장이 모색되었고, 그 과정에서 조직 형태도 표준화의 압력을 받았다. 이남의 건준과 인공, 그리고 이북의 소련군의 유도와 권장에 따라 ‘인민위원회’라는 이름을 지방의 자생적 조직들이 널리 쓰게 되었다.


인민위원회에 대해 소련군과 미군은 상반된 태도를 보였다. 소련군은 ‘점령’의 의미를 최소한으로 해석해서 주민의 자치 노력을 도우려 했고, 미군은 최대한으로 해석해서 자치 노력을 막으려 들었다. 소련군의 점령은 ‘해방’이었고, 미군의 점령은 ‘지배’였다.


‘해방’과 ‘지배’의 차이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치스차코프와 하지의 인품 차이도 약간의 원인이 되었을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위치에 따른 지정학적 차이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국경을 접한 소련은 한국과의 사이에 민중 차원을 포괄하는 전면적 관계를 기대하고 있었던 반면 태평양 건너편의 미국에게는 한국과의 관계를 소련처럼 풍성하게 발전시킬 길이 없었다. 한국에 대한 영향력 확보를 위해 미국은 강력한 지배구조를 필요로 했다.


1990년대 들어 많은 소련 자료가 새로 발굴되면서 1945년 당시 소련이 한국에 대해 적극적 야욕이 없었다는 사실에 연구자들의 합의가 모여 왔다. 소련은 공산주의운동의 국제적 발전을 위해 유럽에 노력을 집중하고 있었고, 중국, 한국 등 동아시아 지역에는 당장의 위협만 피하면 된다는 소극적 태도로 임했다는 것이다. 소련군의 점령정책이 미군에 비해 적극적 개입을 피한 것도 이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이북 지역 주민들은 이남 주민들과 달리 점령군의 억압보다 지원을 받으며 자치조직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소련군 진주 직후 치안-행정권을 넘겨받을 때의 도 단위 자치조직은 형태도 구성도 다양했다. 그러나 차츰 인민위원회 구조가 안정되어 갔고, 시-군 단위에도 이에 상응하는 조직이 발전해 갔다. 10월 8-10일의 5도 인민위원회 연합회의에서 110명의 지역 대표가 모여 이북 지역의 인민위원회 구조를 표준화했다.


지역 조직이 갖춰진 이제 다음 과제는 중앙 조직이었다. 수도 서울이 38선 이남에 있다는 사실로 인해 이북 지역의 정치활동과 자치활동에는 중앙 조직이 걸림돌이었다. 공산당이 북조선 ‘분국’의 형태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그런 예다. 서울의 인공을 이북의 인민위원회들은 ‘중앙’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38선 장벽 문제만이 아니라 인공의 조직-운영 방법을 ‘민주적’이라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민위원회 연합회의는 이북 지역 인민위원회 활동의 총괄조직을 만들 결정을 내렸고, 이에 따라 11월 19일까지 행정 10국을 갖춘 북조선 5도행정국이 만들어졌다. 산업, 교육, 보안, 사법, 교통, 농림, 재정, 체신, 보건, 상업의 10국이었다. 11월 24일에는 체신관리국이, 27일에는 전기총국이 신설되었다. 5도행정국 위원장에는 조만식이 위촉되었으나 본인의 사양으로 공석이었다고 한다. (김용복, ‘해방 직후 인민위원회의 조직과 활동’ <해방 전후사의 인식 5> 214-216쪽)


5도행정국을 “사실상 북한의 태아적 정권”이라느니 “북한의 단독정권 수립의 첫걸음”이라느니 (위 책 217쪽에 인용된 김학준, <한국문제와 국제정치> 및 스칼라피노-이정식, <한국공산주의운동사 2> 내용) 5도행정국의 정치적 의미를 해석한 연구자들도 있는데, 이것은 분단의 책임을 미루려는 냉전시대의 시각에 치우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규모의 행정조직에 정치적 의미가 전혀 개재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자치적 치안-행정 활동이 순조롭게 발전한 당연한 결과이며 정치적 의미는 부차적인 것으로 봐야겠다.


김용복의 위 논문 216쪽에 인용되어 있는 설명이 무리하지 않은 것 같다. 이런 정도의 총괄조직 없이 각 도 인민위원회의 활동을 어떻게 조율한단 말인가? 위원장이 공석이었다는 사실도 그 비정치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행정국의 명령과 지령은 전 북조선 행정 및 경제기관 주민들에게 있어서 의무적이다. 주민의 생활형편을 향상시키고 북조선 각 도 간의 기관 및 개인 간의 경제 연락을 설정함에 필요한 전 방책은 오직 행정국만을 경유하여 해결되며 실천된다. 행정국들의 사업은 새 조선 건설, 국내의 경제생활 건설, 민족문화 발전 및 인민의 생활형편을 향상시킴에 방향을 둔 것이다.


정말 “북한 단독정권 수립의 첫걸음”이라면 65년 전 오늘 성립이 선포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임시인민위)를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임시인민위원회는 2월 8-9일간 열린 “북조선 각 정당, 사회단체, 각 행정국 급 각 도, 시, 군 인민위원회 대표확대협의회”의 결정으로 설치된 것으로, 대표성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의미에서 ‘임시’라는 딱지를 붙이기는 했지만, 당시 서울에서 만들어지고 있던 ‘남한국민대표민주의회’에 비하면 월등한 대표성을 확보한 조직이었다.


결과적으로 북한 ‘단독정권’의 출발점이 되기는 했어도 임시인민위의 설립이 분단 건국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해방 후 반년이 지난 그 시점까지 북한에서는 인민의 대다수가 동의할 만한 개혁 추진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바로 다음 달 시행되어 놀라운 성과를 거둔 토지개혁을 비롯해 노동법령과 남녀평등법의 제정, 주요 산업의 국유화 등 제반 ‘민주개혁’을 책임질 정권의 존재가 필요한 단계에 와 있었다. 임시인민위는 이 필요에 부응하기 위한 최소한의 요건을 갖춘 정권이었다.


 

 

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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