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월간바둑>이 ‘탐험대결’이라는 이름으로 당시 유아독존으로 군림하던 조훈현 九단에게 저단진 유망주들을 도전시킨 기획이 있었다. 이때 유창혁 당시 三단이 참신한 기풍으로 주목을 끌었다. 엄살솜씨로 유명한 조九단이 유 三단에게 연패한 뒤, 당시 내제자로 데리고 있던 이창호 소년에게 “창호야, 네가 빨리 커서 형아들 혼내줘라.” 해서 팬들을 웃겼다.


그 해 입단한 이창호가 2,3년 지나면서 진짜로 형아들 혼내주기 시작한 것도 팬들이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는데, 더더욱 뜻밖의 일은 이 소년이 형아들보다 스승님 혼내드리는 데 더 열중하게 된 것이다. 몇 차례나 천하통일을 이뤘던 ‘바둑황제’가 근년 무관의 지경에까지 떨어졌던 것은 순전히 이 제자 때문이었다. 열세 차례의 타이틀전을 같은 상대에게 내리 진 것은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기록이다.


치열한 승부세계에서 자신의 덜미를 꽉 틀어쥐고 있는 옛 제자에 대한 조 九단의 감정은 어떤 것일까. 한 번 조씨가 바둑평론가 박치문 씨와 나누는 한담에서 그 마음의 한 모퉁이를 살필 만한 대목이 있었다. 유창혁 九단과 이창호 九단의 왕위전 도전기에 조씨가 입회한 뒤, 깊은 밤 제주의 한 호텔 로비라운지에서였다.


기풍(棋風)에 관한 얘기 끝에 근래 두각을 나타내는 젊은 기사들에 대해 조씨가 걱정스러운 말을 했다. 승부에만 너무 집착해서 새로운 길을 만들려 하지 않고 남이 만든 길만 달달 외우는 식의 바둑이 많다고. 그렇게 ‘손님 실수 기다리는’ 식으로는 어느 단계를 넘어서서 발전할 수가 없다고.


박씨가 짖궂게 공박했다. 그렇게 승부에 철저한 자세는 바로 당신 제자 창호를 본받은 것 아니냐고. 그런데 이에 대한 조 九단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그래도 창호는 모양을 알어.” 말투마저 평소의 넘치는 재기가 싹 가신 어눌한 한 마디여서 듣는 사람의 마음이 숙연했다.


조씨는 옛 제자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자신이 몸담은 바둑이 더 좋은 모습으로 펼쳐지는 길이라면 패배의 고통도 추락의 수모도 얼마든지 감수하려는 승부사의 자세다. ‘고수(高手)’의 진면목은 뛰어난 전적보다도 사람들의 더 깊은 사랑을 바둑으로 끌어들인 이런 자세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손님 실수 기다리며’ 승부에만 집착하는 정치계에서도 배워갔으면 좋겠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