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 진(秦)나라가 부국강병을 이루고 천하통일에 이르는 데는 법가(法家)의 법치주의가 큰 몫을 맡았다. 제민(齊民)의 원칙 아래 귀족의 세력을 억눌러 절대왕권을 세우고 엄정한 상벌로 효과적 국민동원을 기했던 것이다.


통일을 이룬 뒤 시황제(始皇帝)는 법치주의를 천하에 확장하려 했다. 황제의 호칭을 시황제로부터 2세 황제, 3세 황제로 나아가도록 한 것도 황제의 인격을 배제하고 철저한 법치를 내세우려는 상징적 조치였다.


몇 해 전 프랑스의 젊은 중국사학자 장 레비가 시황제를 소재로 “황제의 꿈”이라는 소설을 써 공쿠르상(역사소설 부문)을 받은 바 있다. 이 소설에서 시황제는 인간의 불확실성을 싫어해 자신을 중심으로 기계와 로봇의 세계를 쌓아나가는 편집광적 인물로 그려져 있다. 그의 극단적 법치를 풍자한 것이다.


시황제가 구축한 정교한 통치체제는 그가 죽자마자 파탄을 드러냈다.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일화로 악명높은 환관 조고(趙高)가 황제의 죽음을 숨긴 채 황제의 뜻을 가장해 황제의 작은 아들 호해(胡亥)를 2세 황제로 옹립하며 자신에게 대항할만한 인물을 몰살시킨 것이다. 얼마 후 통일 이전의 전통을 회복하려는 봉기가 각지에서 일어나자 지도력을 잃은 제국은 삽시간에 와해되어 버렸다.


조고의 발호는 극단적 법치의 폐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통치의 메커니즘이 완전히 형식화돼 있었기 때문에 황제 측근에서 정보를 장악하고 있던 일개 환관이 권력의 공백기를 틈타 천하를 뒤흔들 수 있었던 것이다. 태자 부소(扶蘇)가 조작된 자결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던 것이 시황제가 만든 통치체제의 성격이었다.


시황제는 통일의 위업을 완벽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이 죽은 뒤에도 영원히 유지될 체제를 만들려 했다. 불로장생의 선약(仙藥)을 찾은 것과 같은 욕망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바로 체제의 파탄으로 이어진 사실은 그 체제가 법치의 원칙 못지 않게 그의 개인적 지도력에 의존해 왔음을 반증해 준다.


권력 운용의 난맥상이 드러날 때마다 사람들은 인치(人治)가 법치(法治)로 바뀌어야 한다고들 말한다. 물론 유린돼 온 법치의 원칙은 회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법치의 원칙은 훌륭한 정치를 보장하는 만병통치의 선약(仙藥)이 아니다. 법치원칙 회복과 함께 지도력 육성과 도덕성 강화를 위한 꾸준한 노력을 우리 사회는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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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