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리뷰를 시도하는 것은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구조적으로 설명하려는 의도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잘 돌아가는 사회에서도 문제점을 찾아내고 고민하는 것이 원래 먹물들의 본분이기는 하지만, 이 사회에 뭔가 엄청나게 잘못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먹물 아닌 사람들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길거리에 촛불도 나오고 가스통도 나오는 것이다.


이 사태를 놓고 먹물들은 부끄러워해야 한다. 잠수함의 토끼, 갱도의 카나리아처럼, 위험의 기미를 앞서 찾아냄으로써 대다수 시민이 먹고 사는 일에 편안하게 몰두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게 먹물의 밥값인데...


사태가 이리 되었으니 먹물끼리 얘기를 나누던 평소 습관을 벗어나 일반인 상대로도 설명을 해주러 나설 필요가 있다. 노인에서 아이들까지, 한나라당 지지자에서 민노당 지지자까지, 최대한 많은 사람이 납득할 만한 설명을 찾아내야 한다. 문제 해결은 차치하고, 우선 한 집안에서 할배는 가스통 들고 애들은 촛불 들고 길거리로 나서는 상황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다.


나는 역사의 맥락을 통해 설명을 시도해 오고 있다. 한편 저자는 사회과학 이론을 통해 설명을 시도한다. 역사학과 사회과학 사이에는 같은 대상을 바라보는 데도 시각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 책에 실린 글들의 <프레시안> 연재를 읽으며 나는 생각했다. 먹물끼리가 아니라 일반인 상대로 설명을 하러 나서려면 학문분야 사이의 시각 차이 같은 것은 뛰어넘을 필요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이 과제에서 저자는 훌륭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나는 본다. 그가 지적하는 문제 자체는 내가 알지 못하고 있던 새로운 것이 없다. 그러나 설명 방법에 유효적절한 것이 많아서 나 같은 역사학도도 더러 써먹을 수 있었다. 책으로 나온 것을 훑어보니 놀랄 만큼 역사 이야기가 적게 담겨 있다. 역사 이야기 없이도 이만큼 힘 있는 설명을 할 수 있는 거라면 나도 사회과학 공부를 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까지 든다.



사회가 잘 안 돌아갈 때 이것을 기계의 ‘고장’처럼 볼 것인가, 생물체의 ‘질병’처럼 볼 것인가? 잘못된 현상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두 가지 현상 사이에 많은 비유가 행해지고, 그중에는 유용한 것도 많다. 사람의 병을 기계 고장처럼 좁게 들여다봄으로써 효과적인 치료방법을 찾기도 하고, 기계의 고장을 사람의 병처럼 넓게 바라보면 설계의 개선 등 적절한 대책을 찾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두 현상 사이에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 기계의 고장은 생물체의 질병에 비해 원인이 대개 단순하다. 왜 그럴까. 기계는 문제가 하나 생기면 전체 기능에 바로 장애가 일어나 원인이 복잡하게 얽히기 전에 드러나고 만다. 반면에 생물체에는 문제가 웬만큼 있어도 기본 기능을 유지하는 항상성(homeostasis)의 원리가 있어서 문제가 복잡하고 심각하게 진행된 뒤에야 증세가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다.


원래 기계란 인간과 가축의 노동력을 대치하기 위해 생물체를 모방해서 만든 것이다. 아주 간단한 기계는 생물체의 특성을 거의 보이지 않지만, 자동차 정도 복잡한 기계는 약간의 항상성 원리를 갖고 있어서 고장이 복합적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컴퓨터 차원의 복잡성에 이르면 생물체의 특성에 더 접근한다.


한편 생물체도 물질로 구성되기 때문에 기계적으로 설명되는 측면을 갖고 있다. 뼈가 부러진 문제 같은 것은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기계 고장 고치는 것처럼 고치면 된다. 생물체나 기계나 기계론적 측면과 유기론적 측면을 모두 가진 것인데, 그 출발점, 즉 본성이 서로 다른 것이므로 기계 고장은 가급적 단순하게, 생물체의 질병은 가급적 복잡하게 생각하는 편이 적합한 것이다.


인간사회에도 두 측면이 함께 있는데, 근대 들어 기계론적 측면이 중시되기 시작했다. 분석을 통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근대 자연과학의 환원주의가 사회과학의 발생에 영향을 끼친 결과다. 그래서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분석을 통해 개별적 문제를 추출하고 각각의 문제에 개별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근대사회의 일반적 접근방법이 되었다.


현대 한국인은 환원주의적 ‘근대적 사고’에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빈곤 문제는 돈 벌 줄 모르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자살률이 높은 것은 자살자들의 정신건강 문제로 생각한다. 살인적 입시 경쟁도 학생 개개인의 분발로 견뎌내야 하는 것이고 참혹한 주택난도 각자 재테크로 이겨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모든 문제들을 각각 별개의 문제로서 따로따로 대응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 빈곤 대책, 자살률 대책, 과열입시 대책, 주택난 대책을 각각 별개의 과제로 인식하는 것이다. 낡은 자동차를 놓고 우그러진 데 펴고, 브레이크 라이닝 갈고, 엔진오일 바꾸고, 긁힌 데 도색하는 식이다. 여러 문제들이 하나의 큰 병에서 파생되는 증세들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 하나하나의 증세를 치료하는 데보다 근원의 병을 파악하고 전체적 치료방법을 찾는 데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질병 중에는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것들이 있다. 한 인간으로서 내 역할에 근본적인 제약을 주지 않는 한 약간의 고통과 불편을 감수하는 편이 그것마저 없애겠다고 극성을 떠는 것보다 살아가는 자세로서 더 온당한 것일 수 있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약간의 부조리와 불의를 감수하는 편이 완벽한 유토피아를 실현하겠다고 난리를 피우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을 대부분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다면 그 사회는 그럭저럭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죽음이나 불구의 위험이 있는 병이라면 더불어 살 수 없다. 받기 싫은 수술이라도 받아야 한다. 사회 역시 심각한 파국의 위험에 빠질 때는 문제를 해소하거나 최소한 완화하기 위한 노력이 일어나야 한다. 많은 구성원들이 그 노력에 동참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문제에 대한 인식을 공유해야 한다.


그래서 진단이 중요한 것이고 글머리에서 말한 ‘먹물의 밥값’도 여기에 근거가 있다. 일반 사람들이 감지하지 못하는 경미한 증세도 얼른 알아채고 호루라기를 부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이 드물 정도로 증세가 심각할 때라면? 병명(病名)을 잘 붙여줘야 한다. “이름이 발라야 말이 순하다(名正言順)”고 공자도 말하지 않았는가.


인체의 병은 대개 오랫동안 겪어온 것이라서 적절한 이름이 붙어 있는데 근현대사회의 문제들은 새로운 것이 많아서 이름이 잘 붙어 있지 않다. “폐결핵” 한 마디 하면 그에 부수되는 여러 가지 증세들을 쉽게 묶어서 파악할 수 있다. 반면 사회적 문제를 가리키는 용어들은 인체에 비유하자면 발열, 발한, 쇠약감, 식욕부진, 체중 감소, 기침, 객담, 호흡곤란, 흉통 등 증세 하나하나를 따로따로 표시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무한경쟁이...>에서 서상철의 시도는 한국사회에 대해 ‘경쟁병’이란 종합 진단을 내리는 것이다. 이 사회의 여러 문제들이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큰 병에서 파생된 증상들임을 밝히려는 문제의식도 좋고, 그 큰 병의 존재를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인식할 수 있도록 합리적 설명을 제공하려는 목적의식도 훌륭하다. 멀쩡한 사람도 정기적으로 종합검진을 받을 필요가 있는데, 하물며 세상이 갈수록 더 엉망이 된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이 진단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경쟁’이 왜 문제인가? 경쟁 없는 사회란 있을 수 없다. 인간사회만이 아니다. 생명 가진 모든 것에게 경쟁은 생명 자체의 본질적 측면의 하나다. 그 사실을 설득력 있게 밝힌 것이 다윈의 진화론이다. 경쟁이 ‘있다’는 사실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가 나타나는 것은 경쟁이 ‘지나칠’ 때다. 생명의 모든 지표에는 건강의 적정선이 있다. 혈압이 80~120의 범위를 벗어나면 위로 벗어나든 아래로 벗어나든 건강의 불안이 시작된다. 크게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심각한 병이다. 사회의 경쟁에도 이런 적정선이 있고, 그 선을 벗어나면 문제가 시작된다.


경쟁 수준이 적정선을 조금 벗어날 정도라면 구성원들이 고통과 불편을 다소 느끼겠지만 사회가 돌아가는 원리에는 별 지장이 없다. 더불어 살만한 가벼운 ‘잔병’과 같다. 당뇨약 꾸준히 복용하는 정도의 주의만 기울이면 된다. 그런데 너무 크게 벗어나면 사회가 무너져버릴 수 있다. 활동을 중단하고 입원 치료를 받아야 할 ‘큰병’이다.


잔병과 큰병은 어떻게 다른가. 어찌 생각하면 큰병이란 것도 잔병이 쌓이거나 심해진 결과로 볼 수 있다. 한편 그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를 일으키는 임계점(critical point)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잔병은 정상적 생활방식을 지켜도 크게 악화될 염려가 없는 것이라면 큰병은 익숙한 생활방식을 포기하고 힘을 기울여 매달리지 않으면 금세 죽어버린다.


서상철은 이 사회의 경쟁병을 큰병으로 진단한다. ‘지나친 경쟁’ 정도가 아니라 ‘무한경쟁’에 휩쓸렸다는 것이다. 무한경쟁은 맹목적인 경쟁이고 경쟁을 위한 경쟁이다. ‘갑’과 ‘을’이 경쟁해서 누가 이기든 두 사람의 득실 합에 불리한 결과가 아니라면 그 경쟁은 적정한 것이다. 진 사람의 손해가 이긴 사람의 이득보다 적으면 그 경쟁은 지나친 것이다. 그런데 진 사람은 물론 이긴 사람까지 경쟁으로 인해 손해를 본다면 그 경쟁은 지나친 정도가 아니라 크게 잘못된 것이다.


저자의 눈에 띄었다면 아마 활용했음직한 실험 이야기를 어느 책에서 본 생각이 난다.(R Frank & P Cook의 <The Winner-take-all Society>인데 지금 갖고 있지 않아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지 못한다.) 어느 경영학 교수가 세미나 참석자들에게 10달러 지폐 한 장을 놓고 경매를 시킨 것이다. 수십 차례 실험 중 낙찰액이 10달러에 이르지 못한 일이 한 번도 없었고, 최고 64달러까지 올라간 일이 있다고 한 것으로 기억한다. 낙찰 받지 못한 사람의 최고 응찰액을 모두 몰수하는 조건의 실험이었다. 실험을 통해 번 수천 달러의 돈은 공익을 위해 썼다는 해명이 붙어 있었다.


1, 2 달러는 호기심으로 여러 사람이 불러본다. 3, 4 달러를 넘기면서 두 사람 사이의 경쟁으로 좁혀진다. 5달러를 넘기면 출혈이 시작되는 것이지만 경쟁의 논리가 붙잡는 힘이 있다.(“저 사람 하나만 마저 떨구면 조금이라도 이익인데.”) 그러다가 10달러를 넘기면 손해를 줄이기 위해 매달리게 되고,(“기왕 손해 보는 거, 저놈보다라도 적게 손해 봐야지.”) 결국 온갖 열패감 속에 한 쪽이 손을 들게 된다. 이긴 쪽의 열패감도 별로 덜하지 않다. 경쟁을 위한 경쟁이다.


입시 경쟁, 스펙 경쟁에서부터 소득 경쟁, 기업 경쟁에 이르기까지 이 사회의 다양한 경쟁 현상이 잘못된 무한경쟁의 양상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여러 가지 적절한 이론과 실험결과를 갖고 쉬우면서도 분명하게 확인해준다. 그리고 출산율 저하, 자살 증가, 기러기 가족, 빈부 격차 확대, 인권 약화, 묻지 마 범죄 등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문제들이 모두 이 큰병에서 파생된 증세들이라는 사실을 알기 쉽게 보여준다.



나는 저자의 진단에 크게 공감하면서도 완전히 만족하지는 않는다. 무한경쟁보다 더 밑바닥의 문제를 짚어내고 싶은 것이다. 무한경쟁의 배경이 되는 개인주의에서 출발하면 더 넓은 범위의 사회적 문제점들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다. 사회과학과 역사학의 차이에서 오는 욕심일지 모른다.


근대 사회사상에서 개인주의의 지배력이 극심했다는 사실을 근년에 많이 생각하고 있다. 유기론과 원자론은 사회를 바라봄에 있어서 각자 유효한 측면을 가진 관점이며 두 관점을 아우름으로써 사회현상의 온전한 이해가 가능하다고 나는 믿는다. 그런데 근대 사회사상은 원자론의 관점에 너무 치우쳐 있었다고 보이는 것이다.


근대사상에서 ‘개인주의(individualism)’에 대칭되는 요소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말뜻으로만 보면 ‘사회주의(socialism)’와 ‘집체주의(collectivism)’가 떠오른다. 그런데 어느 쪽 말도 개인주의가 원자론적 세계관을 대표한 것처럼 유기론적 세계관을 대표하지 못했다. 집체주의는 개인보다 국가와 민족을 중심에 놓는 파시즘을 지칭하는 데 많이 쓰인 말이고, 그것은 유기론적 세계관이 전혀 아니다. 사회주의도 현실 속에서는 ‘개인의 공헌’을 기준으로 운영된다는 점에서 원자론적 세계관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서상철도 이 책 제1장 “경쟁은 인간의 본성인가”에서 잘 설명했지만 뉴라이트에서 즐겨 들먹이는 명제 “인간은 이기적 존재”는 인간의 전체 모습이 아니라 한 측면일 뿐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에 비해서도 경쟁보다 협력을 중시하는 존재라는 사실은 복잡한 언어를 발전시킨 데서 단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경쟁과 투쟁에는 그렇게 복잡한 언어가 필요 없다. 언어는 협력을 위해 발전한 것이다.


근대의 인간은 원래의 본성과 달리 원자론적 세계관, 개인주의, 경쟁에 치중하며 살아왔다고 나는 본다. 산업혁명 덕분에 낭비가 허용되는 상황 속에서 일어난 일이다. 자원과 환경의 한계에 부딪친 이제는 근대의 습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경쟁지상주의만이 아니라 원자론적 세계관과 개인주의에 치우쳤던 모든 관습과 제도를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


욕심은 그런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는 내 이야기 방식보다 서상철의 방식이 더 효과적일 것 같다. 그는 원자론적 세계관을 인정하면서 그 관점에서 봐도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말도 안 된다는 사실을 명쾌하게 설명해 주지 않은가. 더 밑바닥으로 파고들어가려는 내 방식을 나는 버리지 못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내리는 더 효과적인 진단을 반겨 마지않는다. 병 고치는 건 역시 기초의학보다 임상의학의 몫인가 보다.



[덧붙임] 이 글의 초고를 써놓은 후 염광희의 “유시민-노회찬-심상정이 '떨거지' 안 되려면”을 읽었다. 1등 한 명만 뽑는 선거제도, 바로 그것이 이 사회의 가장 큰 문제의 하나다.


득표율에 상관없이 1등만이 대표자로 선출되고 나머지 2, 3, 4등은 순위에 상관없이 그저 패배자가 되는 제도에서 정책 대결을 기대하기란 배부른 소리이다. 이번 서울 시장 선거에서 보았듯, 1등이 되기 위해서는 정책을 개발해 부동층을 끌어들이는 것보다 상대방을 흠집 내 부동층과 상대방 지지자를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 훨씬 효과적인 선거 전술이다.


아무리 진단을 잘 내려도 치료를 위한 ‘실행’ 과정마저 경쟁의 논리로 일그러져 있으니,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