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6일의 3신문 정간 및 이튿날의 공산당 간부 체포령은 군정청 법령 위반 문제가 아니라 맥아더 포고령 관계라고 했다. 그래서 군정청과 경찰은 주둔 미군 사령관 하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 뿐이지, 판단과 결정의 주체가 아니었다. 이런 방침은 8월 21일 러치 군정장관의 성명으로 천명되어 있던 것이었다.


“공평한 진언 환영하나 군정 훼상의 성명은 엄벌”

러-치 군정장관은 21일 군정청의 활동을 방해하는 개인이나 단체는 포고령 제2호에 의거 처벌하겠다고 대략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군정청으로서는 조선인의 행정에 관한 건설적이며 공평한 비판을 환영하며 이를 적당한 방법으로 제출하는 비판은 감사히 접수하여 불평의 원인을 일소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개인 혹은 단체가 사실상 전혀 근거 없을 뿐 아니라 군정을 훼상 방해하는 성명을 공적 또는 사적으로 하는 일이 있다. 이에 인하여 군정청 관리들이 방금 취하고 있는 행동과 이에 관련된 사실을 철저히 조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결과 만약 고의로 군정의 활동을 방해하고자 계획한 개인이나 단체가 발각되었을 때에는 미 군법회의에 부하여 태평양미국육군총사령부 포고 제2호 위반죄로 처벌을 당할 것이다.” (<자유신문> 1946년 8월 22일자)


“태평양미국육군총사령부 포고 제2호”란 어떤 것인가? 1945년 9월 7일 하지가 이끄는 제24군단의 조선 상륙에 임해 태평양미국육군총사령관 맥아더의 이름으로 조선 점령에 관한 3건의 포고가 발포되었다. 제1호 포고는 미군이 38선 이남 지역 행정권을 행사한다는 내용이고 제3호 포고는 조선의 미군 점령지역에서 사용할 화폐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제2호 포고가 범죄와 법규 위반에 관한 것이었다.


본관은 본관 지휘 하에 유한 점령군의 보전을 도모하고 점령지역의 공중치안질서의 안전을 기하기 위하여 태평양미국육군최고지휘관으로서 좌기와 여히 포고함.

항복문서의 조항 또는 태평양미국육군최고지휘관의 권한 하에 발한 포고 명령 지시를 범한 자 미국인과 기타 연합국인의 인명 또는 소유물 또는 보안을 해한 자 공중치안 질서를 교란한 자 정당한 행정을 방해하는 자 또는 연합군에 대하여 고의로 적대행위를 하는 자는 점령군군율회의에서 유죄로 결정한 후 동회의의 결정하는 대로 사형 또는 타 형벌에 처함. (<매일신보> 1945년 9월 11일자)


러치의 8월 21일자 성명은 미군정을 비판하는 공산당 측의 성명서를 “연합군에 대하여 고의로 적대행위를 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합당한 사법정책일까?


제1호 포고의 마지막 조인 제6조는 “이후 공포하게 되는 포고 법령 규약 고시 지시 급 조례는 본관 또는 본관의 권한 하에서 발포하여 주민이 이행하여야 될 사항을 명기함.”이란 내용이었다. 1945년 9월의 1~3호 포고는 ‘약법 3장’과 같은 것이었다. 항복 접수가 진행되고 있던, 아직 전쟁 마무리가 덜 된 상황에서 일본 지배체제를 대신할 기본 원칙만을 내놓은 것으로서 군정이 자리 잡기까지의 임시조치였다.


군정청이 설치된 후 많은 법령과 포고문을 발포했고, 많은 사건들이 그에 따라 처리되었다. “자료 대한민국사” 검색으로는 1945년 9월의 맥아더 포고령을 적용한 사례가 없었다. 임시조치로서 포괄적으로 제시된 맥아더 포고령 대신 군정청 법령과 포고문을 준거로 삼게 된 것은 적어도 형식적 의미에서는 ‘법치’의 발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1년 전 임시조치로 발포된 포고령이 1946년 9월 군정청의 정상적 사법 기준을 넘어서는 ‘도깨비방망이’로 되살아난 것이다.


군정청의 ‘정상적 사법 기준’도 법치의 기준에서 그리 훌륭한 것이 아니었다. 8월 29일자 일기에서 적은 바, 정판사사건 피의자들의 불법유치에 대해 “미군 경무부장의 명령으로 경찰에서 계속 취조 중이었으니 위법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검사가 당당히 응답하는 것이 단적인 예다. 군정청의 사법 운영은 하지 사령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다른 기준과 처리방법을 끄집어낸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확실한 근거가 없으니 약간의 추측만 해둔다. 9월 6-7일 시작된 공산당 탄압이 사법조치가 아니라 정치적 조치였으리라는 것이다. 군정청, 특히 경찰에 탄압을 맡기면 좌익 전체를 대상으로 삼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하지는 좌익 강경파를 배제하면서 온건 좌익을 좌우합작에 끌어들이고 싶었다. 그래서 이 일을 군정청-경찰에 맡기지 않고 주둔군 사령부에서 직접 관리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짐작이 드는 것이다. 폭격에도 ‘정밀폭격’이 있는 것처럼 탄압에도 ‘정밀탄압’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지.


7월 4일자 일기에서 공산당의 ‘신전술’을 언급했다. 비합법투쟁, 즉 정면대결을 추구하는 이 노선을 박헌영이 6월 말 평양 방문 때부터 주장했다는 서용규(가명)의 진술이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34-235쪽에 실려 있는데, 뒷받침하는 별도의 증거가 없어도 대략 정황에 맞는 진술로 보인다. 신전술의 적용은 7월 27일 좌우합작에 대한 민전의 ‘5원칙’ 요구로 시작되었는데, 5월 초순의 정판사사건 이래 공산당이 강경노선으로 돌아설 여건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민전 5원칙 중 미군정에게 가장 자극적인 내용은 인민위원회로의 행정권 즉각 이양을 요구한 제4조였다. 박헌영은 8월 3일 하지에게 보낸 편지에서(8월 6일에 발송했다는 신문 보도도 있었다.)도 이 주장을 내놓았다. 미군 정보기관은 이 편지 내용을 이렇게 요약해 놓았다고 한다. (G-2 Periodic Report, No. 302, 임경석, <이정 박헌영 일대기> 355-356쪽에서 재인용)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의장 박헌영은 하지 장군에게 보내는 1946년 8월 3일자 편지에서 점령 후 1년이 지난 현재의 남조선 상황과 관련해 군정을 비난했다. 박은 이 난관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인민에게 그리고 민족해방투사들의 대표로 구성된 인민위원회로 정권을 이양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는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정치무대에서 모든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축출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는 입법기구 설립 문제에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섰는데, 왜냐하면 이 기구의 역할이 군정 및 나아가 ‘친일파’와 ‘반동’분자들에게 힘을 좀 더 실어주는 것뿐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행정권을 내놓으라는 것은 군정청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것이고, 입법기구 설립 반대는 미군정의 의도를 의심한다는 것이다. 입법기구 설립이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부당한 것이라는 근거를 대는 것이 아니라 나쁜 의도일 것 같아서 반대한다는 것이니, 상대방을 협력 상대로 인정하지 않는 자세다. 박헌영과 공산당은 그 동안 우익과 경찰을 비난했을 뿐, 미국과 미군에 대한 비판은 절제해 왔는데, 7월 하순부터 미군정 자체를 적대시하는 ‘신전술’로 돌아선 것이다.


그러나 신전술은 9월 초까지 선전활동에 그쳤을 뿐, 실제 행동은 없었다. 한 달 여에 걸친 적대적 선전활동이 9월 6-7일 시작된 전면적 탄압의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었을까? 서중석은 <한국 현대 민족운동 연구> 443쪽에서 박헌영 체포령을 놓고 “미군정이 계산하였을 정치적 이유도 애매한 점이 있다.” 하고, 이어 “박헌영이 체포령이 내린 뒤 북한으로 피신한 것은 그 적절성에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고도 했다. 미군정이 체포령을 내린 데도, 박헌영이 이북으로 도주한 데도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는 것이다.


이 때 체포된 이주하는 후에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행동이 아닌 선전활동에 대한 징벌은 그 수준을 넘어설 수 없었다. 박헌영이 체포되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 정도 사소한 혐의를 놓고 주요 정당의 수뇌부를 몽땅 잡아넣겠다고 온 서울을 발칵 뒤집어놓는다는 것은 정말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박헌영의 도주도 그렇다. 신전술을 채택했다면 상당한 갈등을 예상했을 것인데, 무리한 체포령이 내렸다 해서 현장을 버린다? 3당 합당, 그리고 실제로 벌어질 총파업과 민중항쟁을 앞둔 상황에서 그가 체포되어 법정투쟁을 벌이는 길, 지하에서 항쟁을 지도하는 길을 모두 버리고 이북으로 건너간 것 역시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그래서 여기에도 약간의 추측을 남겨두는 수밖에 없다. 하지와 박헌영 사이에 모종의 합의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다. 7월 5일자 일기에서 두 사람 사이의 비밀 관계에 대한 생각을 적은 일이 있다. 북한의 숙청 과정에서 나온 그의 ‘진술’ 가운데 어느 정도 사실도 담겨 있지 않을까 하는 판단에 근거를 둔 생각이다.


성급한 정면대결로부터 두 사람이 어떤 이득을 바라볼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는 정도에서 추측을 멈추겠다. 하지는 공산당의 정상적 정치활동을 봉쇄함으로써 입법기구를 목표로 한 좌우합작에 온건 좌익의 참여를 순조롭게 할 전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박헌영에게는 북로당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가라앉지 않는 좌익 내부의 반발을 피할 수 있는 길이었다.


박헌영의 월북 경위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엇갈리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9월 29일 서울을 떠나고 10월 6일 평양에 도착했다는 <스티코프 비망록> 내용이 널리 받아들여진다. (<이정 박헌영 일대기> 375, 381쪽) 9월 29일까지 박헌영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원래 10월로 예정되어 있던 전평의 총파업을 9월 24일 철도, 26일 경성전기, 기타 부문 28일로 일정을 앞당기는 결정이 체포령 직후인 9월 10일경 내려졌다는 사실을(<한국 현대 민족운동 연구> 449쪽) 유의할 일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