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은 박헌영에게 몹시 힘든 한 달이었다. 8월 3일 인민당 중앙위원장 여운형의 3당 합당 제안서를 접수할 때까지는 좋았다. 이튿날 아침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연 중앙위원회에서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6인의 원로-중진 중앙위원들이 당 대회 소집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었다.


이른바 대회파의 대회 소집 요구를 표결로 눌러놓고 오후에 인민당으로 제안 수락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이튿날인 5일 대회파가 자기네 주장을 당 기관지 <청년해방일보> 호외 형식으로 발표했다. 이 성명서에는 그 동안 당 대회를 열지 않은 문제, 합당을 앞두고는 대회가 꼭 필요하다는 주장 외에 박헌영 일파가 그 동안 중앙위원회 등 공식 기구를 거치지 않고 자기네가 장악하고 있는 간부직을 통해 당을 자의적으로 운영해 온 문제가 지적되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놓고 박헌영 일파는 ‘간부파’로 불리게 되었다.


박헌영은 7일 중앙위원회를 다시 열어 대회파를 반당분자로 규정하고 제명, 정권 등 제재 조치를 결정했다. 힘으로 밀어붙인 것이었다.


박헌영의 정면돌파 방침이 당내에서는 반발의 길을 틀어막았다. 반대파에게는 제명당하거나 탈당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합당 상대인 인민당과 신민당의 자세에 동요가 일어났다. 이북에서는 공산당과 신민당이 일방적 흡수 아닌 대등한 통합이 되도록 애쓰고 있었고, 이남의 3당도 대등한 통합을 내걸고 있었다. 그런데 공산당에서 소수파의 합리적 요구를 당권으로 억누르는 것은 통합 후의 당권 운영 방식을 걱정스럽게 만드는 일이었다.


인민당에서 문제가 먼저 불거졌다. 16일로 예정된 인민당 확대중앙위원회에 영향을 끼치기 위해 박헌영이 자신을 지지하는 인민당 간부들에게 친서를 보내고 그들이 비밀리에 준비회의를 가졌다. 이 움직임을 감지한 여운형은 위원장직 사임 의사를 밝히고 시골로 잠적했다. ‘당 안의 당’처럼 움직이는 분파주의를 봉쇄한 뒤에 당이 신중한 자세로 합당에 임하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나 인민당의 박헌영 지지파는 16일 회의에서 여운형의 친필 사직서가 없다는 이유로 위원장 사직 문제를 묵살하고 합당 안건의 즉각 표결을 요구해 48 대 31로 우세를 과시했다. 19일에 귀경한 여운형은 정식으로 사직서를 제출하고 27일에 확대중앙위원회를 다시 열어 직접 주재했다. 이 회의는 무조건합당파와 합당 신중파의 대립을 절충하지 못하고 결론 없이 끝났다. 그 동안 신민당에서는 문제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고 있었지만 인민당과 비슷한 대립이 당내에 빚어지고 있었다.


8월 27일 시점에서 박헌영은 공산당 창당 이래 최대의 위기에 몰려 있었다. 작년 10월 책임비서인 자신의 휘하에 만들었던 북조선분국이 그 동안 실력을 키워 실질적인 ‘큰 집’ 노릇을 하다가 이제 북로당을 만들며 형식적인 종속관계를 벗어나고 있는 판에, 자신은 보조를 맞추기도 힘든 판이다.


북로당이 김두봉을 간판으로 세운 틀을 따라가려면 남로당에서는 여운형을 내세워야 하는데, 김일성이 김두봉의 협력을 얻는 것처럼 여운형의 협력을 얻을 자신이 박헌영에게는 없었다. 여운형이 남로당 당수가 된다면 김두봉과 달리 실권을 장악할 공산이 컸다. 남로당에서 자기 영도력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온갖 적극적인 공작이 필요한데, 그에 대한 반발이 공산당 내부에서 시작해 다른 두 당으로 파급되고 있었다.


그런데 8월 30일 박헌영에게 구명줄이 날아왔다. 북로당 창당대회의 남조선 합당 문제에 대한 결정문이었다. 공산당 대회파를 반당분자로 규정한 이 결정문은 다른 두 당에 대해서도 즉각 합당에 동의할 것을 요구하는 뜻을 함축하는 것이었다. 이에 고무된 박헌영은 공산당 확대중앙위원회에서 이런 내용을 담은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은 김남식, 심지연 <박헌영 노선비판> 271-273쪽에 전문이, 그리고 임경석 <이정 박헌영 일대기> 367쪽에 일부가 <청년해방일보> 1946년 9월 2일자로 표시, 게재되어 있는데 회의 날자는 밝혀져 있지 않다. 여기에는 <박헌영 노선비판>에서 재인용하면서 말을 약간 다듬었다.)


남조선에서 3당의 합당 문제는 이제는 그 원칙 찬성 운운의 시기에서 실현과정에 돌입하여 어떻게 하면 신속히 이것이 실현되는가 하는 조직과정에 들어갔다. 반간부분자들은 합당을 당대회에서 결정하여야 한다고 하나 이것은 합당공작을 지연시키는 외 다른 것이 아니다. 완전히 옳으냐 그르냐 하는 문제는 벌써 결정적으로 누구를 물론하고 진정한 민주주의자라면 이것을 지지하고 있는 금일에 새삼스럽게 대회 결정을 주장함은 형식에 구애되어 일을 실패케 하는 결과밖에 아니 가져온다.

당대회 소집설을 주장하는 분자들의 의도는 물론 다른 데 있는 바로 현 간부 타도의 구호를 들고 만일 대회를 소집한다면 그 시일이 지연됨은 물론이요 대회에 가서 당내투쟁으로서 일대분규가 아니 일어날 수 없는 것인즉 이 대회는 결국 당싸움을 대규모로 확대시키고 따라 합당을 파괴하는 결과가 올 것은 명백한 일이다. 합당이 옳으냐 그르냐는 이미 결정적인 이상 앞으로 할 일은 새 당을 어떻게 결성시키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다. (...)


문학자연맹, 전평, 전농, 부총, 민청 등 좌익계 대중단체로 구성된 3당합동촉진위원회에서도 합당의 조속한 진행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3당합동에 관하여 북조선노동당창립대회가 채택한 결정은 3당합동에 반대하는 자는 조선민주화와 자주독립의 적이며 조선인민의 원수라고 규정하였다. 공산당 내 반당분자가 인민당 및 신민당 내의 동요분자에게 합당을 주저 회피할 호개의 구실을 제공하고 의식적으로 각당 내의 □□분자를 규합하여 3당합동을 적극적으로 파괴하는 공작을 공공연히 추진하여 반동진영에 거대한 이익을 주고 있는 사실에 감하여 지극히 정당한 평가라고 인정하는 동시에 이러한 개인이나 분파는 행동을 즉시 정지하고 그 분파를 즉시 해체할 것을 우리 단체들의 이름으로 엄중히 경고한다. (<서울신문> 1946년 09월 03일자)


이런 분위기 속에서 9월 4일 3당 합동 준비위원 연석회의를 열어 선언과 강령 12개조를 채택하고 3당 합동 준비위원으로 남조선노동당 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북조선공산당과 신민당이 북조선노동당으로 합동 신발족한 데 감하여 남조선에 있어서도 신민당 인민당 공산당의 합동공작이 진전되고 있는 바 4일 하오 6시부터 신민당 회의실에서 3당 합동 준비위원 연석회의를 개최하고 각 대표로부터 합당에 대한 최후적 결정보고가 있은 다음 합당결정서를 정식 가결하고 한편 기초위원이 제출한 선언 및 강령(초안)도 토의 결정하였다 한다. 그리고 3당 합동 준비위원으로 남조선노동당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결당준비공작을 적극적으로 착수하게 되었다고 하며 5일 다음과 같은 결정서와 강령(초안)을 발표했는데 일방에 인민당 유지 간부의 성명서에 의하면 인민당은 즉시 합동파로써 대표를 파송하였던 것을 알 수 있고 여 당수 이하 유지 간부의 태도는 미정인 것을 알 수 있다.

◊ 결정서

조선인민당 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의 3당 합동 준비위원 연석회의는 각당 대표의 합동결정에 대한 보고를 듣고 그것을 전면적으로 찬성하는 동시 3당이 다음과 같은 선언 및 강령(초안)을 기본으로 하여 남조선노동당으로 합동할 것을 결정한다.

1946년 9월 4일 조선인민당 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 3당 합동 준비 연석회의

(<조선일보> 1946년 9월 06일자)


이 전격적 조치에 인민당과 신민당은 호떡집에 불난 꼴이 되었다. 9월 7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백남운과 장건상의 인터뷰 기사가 양당의 반응을 잘 보여주는 것이므로 길지만 그대로 옮겨놓는다.


“주목할 좌익의 귀추 - 합당은 당수도 모르는 돌발사”

좌익3당 합동은 조공 인민 양당의 내홍으로 말미암아 그의 안정과 해결이 있을 때까지 보류하기로 되었던 바, 돌연 지난 4일 합당추진파에서는 3당합동준비위원회연석회의를 개최하고 선언 강령 초안 등을 발표하였다. 이에 대하여 인민당 신민당의 책임자는 전연 알지 못하는 의외의 돌발사로서 과연 이것이 민주원칙에 입각한 대중당으로서의 합당인가 그렇지 않으면 공당독재의 지령에 움직이는 일련의 사실로 볼 수 있을까. 여하튼 당수도 알지 못하는 합당문제를 중심으로 금후 좌익정계의 귀추는 자못 주목된다.


◊ “책임질 수 없다.” 신민당위원장 백남운 담: [합당추진파가 결정 발표한 소위 선언 강령 등은 신문을 보고야 비로소 알았으며 이에 대하여서는 책임질 수 없다고 신민당위원회 백남운은 혜화정 자택에서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합당을 추진시키기 위하여 우리 신민당에서는 다음과 같이 4단계로 나눠 노력하여 왔다.

1) 합당은 절대 필요하다. 그러므로 이를 찬동하여야 한다는 것을 지방지부에 주지시키도록 노력하였다.

2) 합당의 시기는 양 우당의 내부적 통일을 기다려 합당을 촉진할 것.

3) 우당 내부의 분규가 확대되고 있으므로 양 우당 중 어느 우당이고 먼저 내부가 통일되는 대로 신민당으로서 합당준비를 개시하려고 하였다.

4) 지난 3일 신민당 상임위원회 석상에서 합당촉진책으로서 두 가지 결정한 바 있었다.

첫째 이미 구성된 준비위원회로서는 합당촉진을 위한 문서를 작성할 것.

둘째 대외적으로는 양당 내부의 대립관계를 되도록 거중 조정할 것.

4일 밤 연석회의라는 것은 거기에 대한 신민당으로서의 제1차 준비회합으로 추측이 될 뿐이고 최종적 결정회합으로 생각지 아니 하였던 만큼 신병으로 출석도 못하였다. 따라서 소위 선언 강령 등은 신문지를 통하여 비로소 알았다.

요컨대 근로대중의 복리와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엄숙한 정치적 신발족으로서 규정할 수 있는 합당인 만큼 보다 더 합리적인 합당공작을 추진하여야 할 것인데 부지중에 너무도 조급히 발표된 점에 있어서 최종의 합당책과는 배치되므로 나로서는 아직 책임을 질 수 없다. 다만 합당을 되도록 빨리 촉진시켜야만 할 것은 물론이다.


◊ “간부 몰래 합당 결정” [인민당 부당수 장건상 담: 인민당 부당수 장건상은 6일 오전 11시 본정 신민관에서 기자단과 회견하고 합당추진파의 합당결정 발표에 대하여 당수와 중요간부도 모르는 합당은 있을 수 없다고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1) 3당합동 결정 및 남조선노동당 강령발표에 대하여 인민당으로서는 위원장은 물론 본인도 또한 중요간부들도 전연 모르는 일이다.

1) 3당합동을 원칙적으로 찬성하므로 위원장이 제의한 것이 사실이다. 그 후 공산당 내부분열로 소기의 목적을 달키 어려워 일시 보류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어 인민당 내는 상당한 대립이 있어 위원장 사표까지 내었으므로 이 대립이 통일되어 위원장 사임문제가 해결되기까지는 합동문제를 일방적으로 추진시키지 않고 당내 통일을 기하자고 타협해 오던 중인데 아무 양해도 없이 이런 결정 발표를 하는 것은 이해키 곤란하다.

1) 위원장이 시골 간 후에 모든 문제는 본인에게 결정하라고는 하였으나 문제가 중대하니만치 내 자의대로 이 이상 발표할 길 없고 위원장께 이 사실 보고차 사람을 보냈으니 지시가 오는 대로 다시 발표하겠다.


신민당에서는 3당 합동 준비위원을 뽑아라도 놓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9월 7일자 <동아일보>에는 백남운 위원장의 사임 소식과 함께 4일 연석회의에서 신민당 준비위원들의 행동에 대한 책임 때문이리라는 추측을 곁들이기도 했다. (이 기사에서는 백남운이 5일에 사의를 표명했다고 하는데, 서중석 <한국 현대 민족운동 연구> 436쪽에는 “9월 2일 박헌영과 회견한 백남운은 9월 3일 사의를 표했”다고 되어 있다. 확인을 못했다.)


반면 인민당에서는 준비위원도 뽑아 놓지 않았던 모양이다. 9월 7일자 <서울신문> 기사에 따르면 인민당의 무조건합당파를 이끈 현우현 등 중앙위원 3인이 “3당 합동 준비위원 연석회의에 본인들이 인민당 대표로 참석하였다고 일부에서는 보도되고 있으나 본인들은 인민당의 합동 준비위원이 아닌 만큼 연석회의에 참석할 리 만무”라고 해명하였다 한다. 과연 이 연석회의에서 인민당을 대표한 준비위원들이 누구였단 말인가?


현우현은 건국동맹의 핵심 인물이었다. 1944년 8월 10일 건국동맹의 발족이 현우현의 집(삼광한의원)에서 이뤄졌다. 그에 관한 상세한 자료를 입수하지 못했지만 대충 짐작이 간다. 공산주의자로서 건국동맹에 참여하고 그 인연으로 인민당 간부가 된 사람들은 여럿이었다. 그들 중에 공산당에도 가입한 사람들이 있어서 인민당에 2중 당적 문제가 일어나곤 했다. 합당의 당위성을 굳게 믿고 있던 그들이 박헌영의 강력한 무조건 합당 지시를 받았을 때, 여운형이 뭔가 일시적 오판을 한 것으로 생각하고 박헌영의 지시에 따랐을 수 있다. 8월 16일의 확대중앙위원회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즉각 합당’에 찬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9월 4일의 조작된 연석회의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음을 밝히고 나선 것으로 생각된다.


당 대회 소집을 위해 소집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던 공산당 대회파도 9월 4일 연석회의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지난 5일에 발표한 합당이란 것은 아당과 우당의 당수 및 당내대중의 절대 다수를 배제하고 각 당내 소부분만이 분열적 합동을 발표한 것이다. 이러한 것은 사실에 있어서 3당 전체를 분열하게 하는 것이고 합당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인정한다. 이때 우리는 합당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칙을 다시 한 번 주장하려고 한다.

1) 우리의 합당은 3당당원의 전체적 합당이 되어야 할 것.

2) 우리의 합당은 각당 및 각당 내부의 자색주의와 분파를 청산하여야 할 것.

3) 우리의 합당은 한 개의 당이 타당을 흡수하고 영도하는 것이 아니라 3당이 평등한 위치에서 공평하게 합당할 것.

이러한 원칙을 어느 일파는 완전히 무시하고 합당의 이름으로 기실은 분열을 실천하고 있다. 우리는 완전하고 전체적인 합당을 급속히 수행하기 위하여 이상의 원칙에 의한 기존방침대로 추진할 뿐이다.

1946년 9월 7일 조선공산당대회 소집준비위원장 윤일

(<동아일보> 1946년 9월 8일자)


오늘은 이 정도로 3당 합당과 관련된 9월 초순의 상황을 정리해 둔다. 11월 23일 남로당 결성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남조선 좌익의 기구한 드라마는 계속된다. 그 와중에서 주도권을 지켜가는 박헌영 일파의 노선 성격을 서중석은 이렇게 정리했다.


일제시기 한국에는 대중정당이 존재해본 적이 없었고, 12월테제의 영향 아래서 지하활동 또는 투옥생활만 하였기 때문에 대중정당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박헌영 등 조선공산당 지도부는 인민당, 신민당과 합당하는 문제가 한국의 상황이 요구하는 대중노선의 차원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할 수가 없었고, 그들과 무조건 합당하면 당을 격하시키는 것으로 판단하여, 자신들의 프락션인 인민당과 신민당 내의 좌파세력만 흡수해가려는 입장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박헌영 등 간부파는 기존의 당조차 민주적으로 운영하지 못하여 대회파의 반발을 샀고, 우당에게는 프락치를 심어 여운형-백남운을 견제하여 여운형-백남운과의 불편한 관계를 심화시켰던 것이다. (<한국 현대 민족운동 연구> 483-484쪽)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