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1년이 지나고도 수백만 재외동포가 귀국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주와 일본에 가장 많은 동포가 남아 있었다. 만주에서는 2백만 이주민 가운데 절반가량이 돌아오고 절반가량이 현지에 남았다. 해방 얼마 후부터 소련군 점령지역인 만주의 구석구석에 공산군이 자리 잡으면서 이주 조선인의 잔류를 보호하는 정책을 폈기 때문에 귀국해도 생활근거를 새로 만들기 힘든 이주민들은 만주에 남기로 결정하게 된 것이다.


소련군이 1946년 봄까지 만주에서 철수할 때 행정권을 넘겨받은 것은 국민당정부였다. 그러나 국민당의 실효적 지배는 대도시에 그쳤기 때문에 어느 도시의 시장은 여차하면 튀기 좋도록 열차 차량 안에 집무실을 차렸다고 한다.(<자유신문> 1946년 2월 14일자 “불원활한 만주 접수”) 1946년 2월 17일자 <자유신문>에는 당시 만주 지역의 상황을 보여주는 기사 하나가 실렸다.


“조선의용군 전모 - 귀국한 관계자 좌담회”


본사: 8-15 이후 조선의용군의 동향은 어떻습니까?


고찬보: 일본 항복의 소식을 듣자 조선의용군은 즉시 연안을 진발하였습니다. 일부 간부들은 8-15 전에 벌써 열하로 점차 진격을 개시하고 있었으니까요.


이일청: 지하공작은 열하와 만주에 전면적으로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유명한 우심광산 습격, 성북광산 파괴사건이 즉 조선의용군 편의대(便衣隊)의 민주 진격의 첫걸음입니다.


고찬보: 8-15를 당하게 되니 북경, 천진 등지의 중학생들이 모두 의용군으로 몰려오고 그 동안 기회만 엿보고 있던 화북 일대의 조선 병사들이 일제히 영창을 깨트리고 의용군으로 달려와 8-15 이후 의용군은 급작스럽게 증가하였습니다.


본사: 그러면 총세가 상당히 많았겠습니다.


고찬보: 작년 11월 중순에 약 8만가량이었습니다.


본사: 그들이 전부 화북에 남아 있습니까?


박훈: 작년 11월 만주까지 왔던 일부가 신의주까지 왔다가 북만 각지 동포들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다시 만주 각지로 파견되어 갔습니다.


고찬보: 만주에는 일본 패잔병이 토비로 변하여 동포들의 생명 재산을 위협한 일이 많았습니다.


이일청: 작년 11월 18일 조선의용군 통화현 경비대가 일본 패잔병 3백여 명을 무찌른 꽤 대규모의 전투가 있었습니다. 아주 비적단으로 화해 버린 왜군 3백이 산속을 근거로 약탈과 폭행을 마음대로 하고 있는 것을 의용군 백여 명이 불시에 습격을 하여 30 명을 격멸하고 270여 명을 포로로 하였는데 이쪽은 부상자 하나 안 났습니다.


박훈: 역시 패잔병들이라 심리적으로 벌써 문제가 안 되어 이쪽의 일격에 손을 들어버린 것입니다.


이일청: 8-15 직전에 산해관 근처에서 있었던 전투는 참으로 극적인 전투였지요. 즉 간도에 있는 조선사람으로만 조직 훈련시킨 간도특설부대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 부대를 왜놈들이 산해관까지 출동을 시켜 우리와 싸우게 하였습니다. 만 사흘 동안을 개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맹렬한 전투를 하였는데 차차 진지가 가까워 오니 양쪽에서 군호하는 것이 다 조선말이란 것이지요. 즉각적으로 조선사람끼리라는 것을 알자 양쪽이 일시에 총을 버리고 개천으로 뛰어들어 서로 얼싸안았습니다. 그때의 눈물겨웠던 이야기는 말할 수 없습니다.


박훈: 그때 간도특설부대 지휘관이 아마 김 소좌란 분이지요.


이일청: 그렇습니다. 그 부대가 바로 우리 부대와 함께 금주의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키고 화북에서 큰 활약을 하였습니다.


고찬보: 내가 최근에 가장 감격한 것은 작년 11월 7일 봉천에서 거행한 조선의용군의 행진이었습니다. 이 날 10월혁명을 기념하여 적군, 조선의용군, 중국군, 몽고군. 시민들의 순서로 행진을 하였는데 가장 질서정연하고 외기가 늠름한 군대는 가장 남루한 의복을 입은 우리 조선의용군이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 보기에도 그러했던 모양으로 중국사람들도 모두 칭찬을 해주었습니다.


박훈: 더구나 우리 동포들은 감격이 지나쳐 박수도 못하고 그냥 멍하니 서서 눈물만 흘리고 있었습니다. 난생처음으로 완전무장을 한 1만여 명의 우리 군대가 보무당당하게 승리의 행진을 하는 것을 보고 너무 감격했던 모양입니다.


심운: 그들의 늠름한 자태를 국내 동포에게 보여줄 때가 언제일지 모르나 우리는 언제나 “忍心說服 親切和平”을 표어로 하는 민중공작에 온갖 힘을 쓸 작정입니다.


본사: 전연 동감입니다. 바쁘신 시간을 내어 여러 가지 참고될 이야기와 궁금을 풀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중경 임정은 항복한 일본군의 조선인 장병을 국민당정부의 중국군에게 넘겨받아 광복군을 확충하려다가 실패했다. 이에 비해 조선의용군은 중국 공산군의 도움을 받아 상당수 조선인 포로를 흡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1945년 11월 말에서 12월 초에 걸쳐 신의주에 도착한 의용대원의 대부분은 소련군의 무장해제 요구에 입국을 포기하고 만주 지역에 남았는데, 군대 기능을 유지해서 만주의 교민들을 보호해 주며 그 지역에 정착의 기회도 얻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상당수는 중국 공산군에 들어가 공산군의 남진에 참여하기도 했다.


만주 지역의 조선인은 중국 공산당의 포용정책으로 잔류의 길을 얻은 반면 일본을 점령한 미군은 조선인을 귀국시키는 정책을 취했다. 1946년 9월 4일자 <서울신문>에 130만 명의 조선인이 귀환하고 64만 7천 명이 아직 일본에 남아 있는 것으로 집계되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동경 2일발 해방] 오무라 내무대신은 조선인과 대만성민의 귀국상태를 이번 의회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백30만의 조선인은 이미 3월 말일까지 본국에 귀환하였다. 재일 조선인 수는 각 지방의 보고를 종합하면 64만7천 명인데 그중 귀한을 희망하는 자는 약 51만4천 명이고 남아있기를 희망하는 자는 30만이나 된다. 또 대만성민은 현재 일본에 1만2천명이 남아있는데 그중 8천명이 본국에 귀환을 희망하고 있다. 조선인 본국송환은 금월말까지로 완료할 예정이었던 바 콜레라 그밖의 사정으로 송환은 일시 중지되어 11월말까지는 완료할 계획을 하고 있다. 본국에 귀환한 조선인이 최근 밀입국을 하는 자가 나날이 증가되어 가고 7월에는 8천9백 명에 달하였다. 이러한 밀입국자를 방지하기 위하여 경찰과 민간의 협력에 만전을 기하고 있으나 아직 충분치는 않다.”


1946년 여름이 되면서 조선인의 일본 역류가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1일 일본내무성에서는 조선인의 일본밀항자 취체를 한층 강화하게 되었다. 이들 조선인 밀항자는 6월에는 1천2백 명 7월에는 9천 명 8월에는 1만5천 명에 달하였다. 이러한 밀항자는 조선에서 생활난으로 일본에 밀항한 것인 만큼 모두 암취인 혹은 강도로 변하는 상태라곤 한다. 또 이러한 밀항자에 사용한 선박은 귀로에는 공작 기계 자전거 자동차 농업기구 등을 가지고 가는 모양이다.

이리하여 일본내무성은 북구주 산음지방 해안에 감시소를 설치하고 육상에는 순라대를 강화하며 한편 연합군에 요청하여 해안을 정찰케 하여 최근에는 대부분을 체포하였다. 그러나 일본내무성은 한층 취체를 강화하기 위하여 해안지방의 일반 주민의 협력을 구하는 동시에 연합군의 협력을 요청하여 조선의 해안선을 취체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서울신문> 1946년 9월 5일자)


[동경 14일UP발 조선] 대마해협을 초계중인 영·미 함선은 지난 1개월 반 동안에 불법으로 일본에 다시 건너가려는 1만5천 명의 조선인을 검속하였는데 그중 1만5백 명은 사세보에 억류되어 있으며 9월 말까지 이들은 조선으로 송환되리라고 한다.

(<서울신문> 1946년 9월 15일자)


밀항자 수가 6월 1,200 명에서 7월 9,000 명으로 뛰어올랐다는 것을 보면 이것은 체포된 밀항자 수인 것 같다. 기사에서 “최근에는 대부분을 체포”했다는 것을 보면 최근에 취체가 강화되어 체포된 수가 급증한 것이다. 실제 밀항자 수도 6월과 7월 사이에 다소 늘어났는지 모르지만, 밀항자 수는 6월 이전부터 월 1만 명을 넘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월 10일자 일기에서 패전 후의 일본이 얼마나 참혹한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소개했다. 그런데 그런 일본으로 도로 돌아가겠다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것이 어찌된 일인가? 조선의 상황이 일본보다도 더 참혹했던 것일까? 해방된 나라의 상황이 패전한 나라보다도 못하다니 어이없는 일이다. (이 달 중 발간 예정인 김효순의 책 <역사가에게 묻는다>(가제)의 원고에서 한 가지 고려할 점을 찾은 것이 있는데, 발간된 뒤에 상세히 소개하겠다. 정치활동과 조직활동의 여건이 일본 쪽에 나은 면이 있었다는 점이다.)


밀항자는 조선인만이 아니었다. 남조선 군정청은 맥아더사령부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남조선의 일본인 귀환은 순조로웠다. 8월 17일에 군정청 외무처는 남조선에 남아있는 일본인 수가 3백여 명에 불과하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소련군이 점령한 북조선에서의 일본인 귀국은 훨씬 힘들었다. 9월 4일에 군정청 외무처는 북조선에 남아 있는 일본인 수를 약 8만 명으로 발표했는데,(<조선일보> 1946년 9월 5일자) 일본 의회에서는 8월 8일에 북한 재류 일본인 수를 14만7천여 명으로 발표했다.(<조선일보> 1946년 8월 10일자) 그 차이는 군인을 포함했는지 여부, 만주 귀환자를 포함했는지 여부에서 생긴 것이 아닐까 싶은데, 아무래도 적지 않은 숫자였다. 그들도 밀항의 기회를 찾고 있었다.


당지 미 점령군 당국 발표에 의하면 남조선미점령군총사령관 존 알 하지 중장은 8월 중 2차나 증가되고 있는 북조선으로 부터의 일본인 남조선불법입경에 대하여 북조선소련점령군 총사령관에게 항의를 제출하였다는데 아직까지 이에 대한 회답이 없다고 한다.

이에 관련하여 미 측 장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미군이 남조선에 상륙한 이래 북조선으로부터 남조선에 불법 입경한 일본인수는 19만 명인데 이는 모두 일본에 송환되었다. 또 현재 1만5천 명은 아직까지도 남조선에 머물러 있으며 6만 명의 일본인이 남조선에 입경하려고 대기 중이다. 하여간 야간을 타서 남조선에 불법 입경하는 일본인은 호열자 장티브스 등을 만연시킬 염려가 있으므로 매우 우려되는 바이다. 그러나 미 측은 이 이상 소련 측에 항의를 제출할 의사는 없다.”

(<동아일보> 1946년 8월 23일자)


25일 밤을 타서 38이북에서 일인 1천9백34 명을 목선 열한 척에 싣고 신의주를 떠난 밀선이 인천에 입항하였는데, 이들은 안동현과 신의주에 집결되어 있던 일인 8만 명 가운데에서 떠난 것으로서 그들은 이와 같이 계획적으로 대선단을 조직하여 38이북서 들어온 것은 처음으로 앞으로도 남아있는 일인들의 행동이 주목되는 바이다.

그런데 대선단이 인천부두에 들어오자 수상경찰에 발견되어 주범은 곧 인치되어 엄중 취조 중인데 이 배는 신의주 동화공사 사장 유동구의 소유로써 그는 일인들에게 일인당 천 원내지 7천 원씩을 받아 이번에 받은 것만도 무려 2백만 원의 거액이라 하며 일인들은 25일부터 29일 네 차례로 나뉘어 미군의 후의로 서울 일본인세화회로 이송하였다 한다.

(<서울신문> 1946년 9월 1일)


일본이 패전으로 투항하자 만주에 흩어져 있던 일본인들은 신의주 안동현 일대에 집결되어 있다는데 그 수는 약 6만가량이라고 하며, 그들은 패전국민의 쓰디쓴 고초를 맛보며 어언 1년간이나 지내오더니 최근에는 앞으로 38이북의 엄동이 무서운지 밀항선을 타고 인천항에 들어오는 자들이 매일같이 계속되고 있다. 돈에 어두워 엄청나게 많은 돈을 받고 그들을 수송하는 악질 모리배들의 암약은 저윽이 한심스러운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전문한 바에 의하면 남아 있는 일인들은 조직적으로 대선단을 만들어 오리라는데 이것에 대한 경찰당국의 활약이 요망되는 바이다.

7월 20일부터 9월 8일까지 인천에 들어온 일인의 수는 다음과 같다.

7월 20일 64명, 8월 1일 62명, 8월 16일 515명, 8월 25일 644명, 8월 26일 42명, 8월 27일 972명, 8월 28일 372명, 9월 3일 78명, 9월 8일 56명 계 2,906명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6년 9월 12일자)


밀수와 밀항이 성행하다 보니 해적까지 나타났다. 육상의 치안도 변변찮은데 해상에서야 오죽했겠는가.


“강화 근처의 해적, 살인횡행타 피체”

[강화지국 특전] 강화 근해에 미식 권총을 가진 해적이 출몰하여 수사당국을 괴롭히고 있었는데, 지난 20일 재령에 사는 김두형(34)과 김남준(20)은 쌀을 구하려고 배를 타고 밤늦게 연안 근해를 항해하던 중 돌연 장총을 가진 해적이 나타나서 김두형을 쏘아죽이고 김남준에게는 중상을 입힌 다음 현금 2만8천 원과 옷 15 점을 탈취 도주하였는데 강화경찰서에서는 미식 장총과 실탄 55발과 진범인 강화도 길상면 선두리 심상범(33)을 체포하였다.

(<자유신문> 1946년 8월 8일자)


작년 10월경부터 한강과 인천 근해에 출몰하여 부근 주민과 해운계에 일대 위협을 주던 해적일당 9명중 7명이 체포되었다. 주소부정의 수범 장희근 외 8명은 작년 10월경부터 일당이 되어 마포 나루터와 서강에 근거를 두고 연백 강화 김포 혹은 남조선일대에서 곡식과 해산물을 싣고 오는 배를 권총 등 무기로 협박하여 이를 탈취하여 팔아먹어 오고 있는데 28일 오후 이를 탐지한 마포서 형사대에게 주범 장희근 외 6명이 체포되어 무기 등을 압수하여 엄중 취조 중인데 현재 판명된 피해액만도 약 1천만 원에 달한다고 한다.

(<서울신문> 1946년 9월 7일자)


그런데 이 강안(江岸) 해적단의 피해자 이야기를 들으면 모종의 권력을 배경으로 활동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강안 해적단 피해 속속 탄로 피해 심대”

마포서에 검거된 해적단은 지난 3일 송국되었는데 피해자가 마포서에 속속 출두하고 있다. 즉 종로구 훈정정 95 김병수는 지난 7월 31일 오전 9시 서강안을 떠나 인천 순위도 부근에 이르렀을 때 경기도 방역반 기를 단 배가 쫓아오더니 물품을 검사하고 자기네 배에 옮아타라 하여 바다로 약 다섯 시간 동안 끌고 들어가서 결박을 지어 놓고 권총으로 협박하고 물건과 돈을 빼앗고 어디론지 사라졌으므로 오후 3시경에 알몸으로 옹진에 도착하였다는데 그날 피해만도 약 50만 원이나 된다 한다.

(<자유신문> 1946년 9월 5일자)


이 무렵 시작한 해적단이 2년 후 적발된 기사에서 당시 해적질의 일반적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것 같다.


“해적단 행장기 - 38선 재민들 구출한답시고 악행”

정치단체 간판 밑에서 해적질하다 피체 - 본적을 연백군 청룡면에 둔 X일X은 재작년 4월 초순부터 시내 남대문로 1가 대동여관에다가 한국철혈단이란 간판을 붙이고 동지 8명과 결탁하여 강도질할 계책을 세워오던 중 (...) 형 X재X이 어업조합 이사로 있는 것을 기화로 발동선을 빌어 방역반이란 기를 달아 관헌의 눈을 피하여 가며 동 15일 마포강을 출발하여 38선으로 가는 도중 해상에서 남부여대하고 목선으로 월경하여 오는 동포들을 권총으로 협박하여 소지한 물품 약 90만 원 어치를 강탈한 것을 비롯하여 그간 수백만 원에 달하는 물품을 강탈하였었는데 얼마 전 이것이 XX서에 발각 체포되었다 한다.

(<자유신문> 1948년 6월 25일자)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