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8일자 <자유신문>(“김-여 양씨에 서한 - 하 중장 좌우합작에 기대)과 <동아일보> (”합작 노력에 큰 관심 - 하 장군, 김-여 양씨에 친서)에 하지가 8월 24일 김규식과 여운형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 기사에는 김규식이 받은 편지 내용이 게재되어 있다. 여운형에게 보낸 편지도 같은 내용이었을 것 같은데, 왜 김규식 편지만 공개했을까? 여운형은 이 편지의 공개가 좌익 내 다른 세력에게 나쁜 뜻으로 받아들여질 것을 꺼린 것이 아닐까 싶다. 편지의 끝 부분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든다.


“(...) 나는 좌우를 물론하고 진실한 애국적 지도자라면 소수의 비애국적 불찬성자를 무시하고 국민의 그 위대한 소리에 귀를 기울여 서로 손을 잡고 이 목적을 완성키 위하여 매진하리라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8월 22일 좌우합작위원회 우방(右方)대표단 성명의 마지막 대목과 일치하는 이야기다.


“(...) 어떤 일방의 지령이나 사주를 받아 국가독립을 불원하는 반민족 비애국적 분자를 제외하고 진정한 좌측 지도자와는 본래의 우리의 종지와 기도대로 적극적으로 제휴할 용의를 가졌으며 이렇게 됨으로써 시국의 타개를 희도(希圖)하고 있다.” (<동아일보> 1946년 8월 23일자)


“비애국적” 세력이란 박헌영 세력을 말하는 것이다. 인민당이 박헌영 추종세력에 의해 쪼개지면서 당수직을 사임한 여운형이 8월 19일 귀경한 후 20-21일 사이에 김규식, 장건상과 버치 중위를 만난 사실은 여러 신문에 보도되었다. 좌우합작에 박헌영 세력의 참여를 기다리고 있던 여운형이 이제 박헌영 세력의 태도에 구애받지 않고 좌우합작에 임하겠다는 결의를 이 때 밝혔기 때문에 우방대표단 성명서와 하지의 친서가 나온 것이다.


그러나 여운형은 박헌영 세력의 태도에 구애받지 않겠다는 것이지, 완전히 배제하겠다는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백남운, 김원봉, 장건상 등과 함께 좌우합작회담을 진행해 가면서 박헌영 세력에게도 압박과 설득을 통해 참여를 계속 요구하겠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8월 28일 백남운과 장건상이 김규식을 방문했는데 여운형은 빠졌다. 전날의 인민당 확대중앙위원회 때문에 피로하다는 이유였지만, 너무 급박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 날 오전 기자들과 만나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좌우합작 문제는 쌍방이 원칙만을 제시하였을 뿐 아직 양방에서 이 문제를 전연 포기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지금 상태로는 정식으로 더 진전될 것 같지도 않다. 여기에서 나는 김 박사와의 개인적 친분관계상의 이 문제를 여하히 하였으면 좋을까? 하는데 대하여 순전히 개인적 입장에서 자주 만나고 있으며 백 씨나 장 씨도 역시 나와 같은 입장에서 김 박사와 만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공산당대표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일반이 구구한 억측을 내리는 것은 너무 신경과민한 탓이다. 공산당 내에 반간부파가 있다고 해서 공산당이 둘이 될 수는 없는 것이며 따라서 공산당을 제외하고서는 좌우합작을 논할 수도 없는 것이다. 최근의 우리들의 움직임에 대하여 일반은 너무 각자의 입장에서 선전하고 있는 것 같으나 아직 하등의 구체적 진전도 없으며 앞으로 어떤 결과가 있게 될 시는 민전 의장단의 결의로서 여러분에게 발표하게 될 줄 안다.” (<서울신문> 1946년 8월 29일자)


8월 27일 오후에 열린 인민당 확대중앙위원회는 엄중한 분위기였다. 8월 28일자 <자유신문> “인민당 확위 작일 주시리에 개최” 기사에 따르면 100여 명 위원이 참석하고 여운형이 의장을 맡은 이 회의에 “일체의 방청을 불허하고 각 지방지부 대표 2명씩만이 방청하였다”고 한다.


<서울신문>과 <조선일보>의 8월 27일자와 29일자(어느 신문의 어느 날자 기사인지는 “자료 대한민국사”의 표시가 명확치 않다.) 기사에 따르면 여운형의 당수직 사퇴 문제와 좌익 합당 문제가 맞물려 이 회의에서 토론된 것으로 보인다. 여운형이 사퇴 이유로 당내 분파 행위를 지적했고, 그 대책으로 합당을 보류하면서 여운형도 사퇴를 취소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제기되었으나 결론에 이르지 못했고, 결국 장건상 부위원장, 이만규 서기국장, 김여성 정치국장과 김임수 사무국장이 여운형과의 동반 사퇴를 선언하고 퇴장하기에 이르렀다. 이튿날 속개된 회의에 주요 간부들은 불참했고, 확대중앙위원회는 아무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8월 30일 인민당 감찰위원장 김진우는 박헌영 공산당 책임비서에게 통고문을 보내 인민당에 잠입시킨 ‘합당프락치’의 조속한 철수를 요구했다.


박헌영 일파는 최대의 위기에 몰렸다. 군정청의 탄압과 극우파의 폭력에 맞선다는 명분으로 공산당과 민전의 주도권을 독점해 왔는데, 이제 합당의 과제 앞에서 그들의 독단에 대한 불만이 모든 방면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8월 30일 북조선노동당(북로당) 창립대회의 남조선 좌익 합당에 관한 결정문이 그들을 이 위기로부터 구해주었다.


“남조선에 있어서 삼당의 합동사업은 비상히 지연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할 뿐 아니라 삼당의 합동에 반대하여 반동적 역량을 강화하고 삼당 내에 의식적으로 반대하는 분자가 존재하여 그들은 자기의 종파적 분열적 반당행동을 일으켜서 반동파를 원조하고 있다는 것은 유감된 일이다.

이들 반당분자에 대한 남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은 가장 정당한 것으로 인정한다. 본 대회는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의 합동을 지연시키려는 반당분자에 대한 결정적 대책을 세우고 반당파에 의한 방해행동을 극복하고 삼당합동사업을 신속히 진행시킬 것을 남조선 삼당 당원에 호소한다.” (<서울신문> 1946년 9월 01일자)


북로당의 지지는 이남 좌익에게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이북은 좌익이 심리적으로 의지하는 소련군의 주둔지역이고 이북의 좌익은 임시인위 수립, 제반 개혁의 수행에 이어 북로당 결성에 이르기까지 빛나는 성공의 길을 걷고 있었다. 1946년 들어서는 인적-물적 지원도 이북에서 내려오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북로당이 박헌영 중심의 합당을 지지했다면 그것이 바로 대세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북로당이 박헌영의 손을 들어주었을까? 당의 성격과 노선에 있어서도 북로당은 여운형과 백남운이 주장하는 인민대중정당과 민족통일전선에 가까웠고, 인간적 신뢰도 김두봉과 김일성에게는 박헌영보다 여운형과 백남운 쪽이 두터웠다. 공산당의 당 대회 문제도 박헌영에게 명분이 없었다. 그리고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중앙일보사 펴냄)에 수록된 서용규(가명)의 증언은 김일성과 박헌영의 사이가 줄곧 나빴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그런데 이 결정적 고비에서 북로당이 박헌영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까닭이 무엇일까?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서중석은 <한국 현대 민족운동 연구>(역사비평사 펴냄) 437-438쪽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북로당이 박헌영 지지를 표명한 것은 3당합당을 하루라도 빨리 성사시키자는 의도가 작용하였을 수 있다. 또 북한에는 박헌영 잔존세력이 있었으며, 소련 측에서 박헌영 측을 지지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소군정은 북한에서 간접통치의 방법을 썼지만, 당 문제, 국가 건설 문제 등 중요 문제에 대해서는 결정적인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박헌영이 공산당의 당 중앙을 거의 전적으로 장악해 왔는데, 박헌영파가 무너지게 되면 남한 좌익이 큰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점, 대회파는 당권 경쟁 때문에 박헌영에 대항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었던 점도 북로당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북로당이 박헌영을 지지한 데는 구조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북한의 사회구성과 정권형태가 1945년에서 1946년 사이에 크게 변화하여, 김일성은 여운형을 선호하였고 민족통일전선에도 관심을 보였지만, 북한은 구조적으로 여운형노선보다는 민전 5원칙에 가까웠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 또한 1945년 10월 5도 당대회에서 시사된 민주기지론은 1946년에 들어와 점점 구체화되어 갔다. 민주기지 건설의 ‘기초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북조선노동당 창립에 임해서는 좌우합작에 의한 남북통일을 “미군정의 조종 하에서 남조선 반동 도배들이 시도하는” “반인민적 흉계에 불과”하다고 비난하고, “북조선에서 실현된 모든 민주주의적 개혁들을 존조선적으로 실시해야 할 것”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앞 문단에는 너무 여러 가지 이유가 병렬되어 있어서 서중석 본인도 아주 석연치는 못한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든다. 그에 비해 둘째 문단에서 제기한 두 가지 시각이 깊은 함의를 가진 듯한 느낌이 든다. 북한에 우익이 약화되어 있기 때문에 통일전선의 의미에 대한 감각이 퇴화되었다는 점과 미군정 주도의 좌우합작에 대한 반감. 앞으로의 전개 과정에서도 이 두 점을 계속 면밀히 살펴봐야겠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