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5일자 일기에서 공산당의 내분 이야기를 했다. 그 문제의 이해를 돕기 위해 조선에서 공산당이 어떤 전통을 갖고 있었는지 개관해 본다.


1920년대 들어 조선인의 항일운동에 공산주의 바람이 크게 일어난 데는 몇 가지 조건이 함께 작용했다. 고종의 죽음으로 왕조 회복의 꿈이 사라졌고, 파리강화회담의 결과 앞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환멸이 깊어졌다. 3-1운동의 경험을 통해 독립운동의 이념 강화 필요가 절감되었고, 소련과 코민테른의 지원이 새로운 가능성으로 나타났다.


독립의 목표는 공화국 건설이 되었고, 그 이념으로 사회주의가 널리 고려된 것은 일본의 통치체제와 다른 것을 추구하는 추세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목표를 체계적-조직적으로 추구하는 방법으로 공산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코민테른의 지도와 지원을 받으며 소련의 성공 사례를 학습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공산당’의 이름으로 코민테른의 인정을 받는 것이 공산주의 운동의 가장 중요한 목표의 하나가 되었다.


조선공산당은 1925년 4월 서울에서 결성되었고, 이듬해 3월 코민테른 가입을 승인받았으나 몇 차례 대규모 검거의 결과 조직이 와해된 상태에서 1928년 12월 코민테른의 ‘12월 테제’로 그 승인이 취소되었다. 이 짧은 기간에 책임비서직은 김재봉(1925년 12월까지)에서 강달영(1926년 7월까지), 김철수(1926년 12월까지)를 거쳐 안광천, 김준연, 김세연 등에게 넘어갔다. 대개의 경우 전임자의 체포에 따른 교체였다.


공산당의 가장 기본적인 조직 원리가 민주집중제(democratic centralism)다. 레닌사상의 핵심 요소이기도 한 민주집중제는 당원 총의를 대표하는 당 대회를 모든 당권의 원천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민주’이고, 일단 다수결로 구성된 상급기구에게 모든 하급기구와 당원들이 복종한다는 점에서 ‘집중제’다. 민주집중제는 코민테른이 각국 공산당을 회원으로 승인하고 받아들이는 데도 가장 기본적인 기준이었다.


그런데 조선공산당은 책임비서를 비롯한 당 중앙(중앙위원회)이 3년간 여러 차례 바뀌는 동안 당 대회를 열기 어려웠다. 조직의 민주적 원리가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19명의 야체이카(세포) 대표가 참석했던 1925년 4월 17일의 창당대회 다음의 당 대회가 1926년 12월 6일 16명 대표의 참석으로 열렸다. 당시 책임비서 김철수가 극심한 탄압의 와중에 이 대회를 열기 위해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살펴본다면 1946년 8월 그의 당 대회 소집 요구가 가진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신의주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제1차 공산당 사건으로 창당 중앙위원 7인의 신변이 위험하게 되어 있던 1925년 12월 12일 남아 있던 3인의 중앙위원(김재봉, 김찬, 주종건)이 보선(補選)의 형식으로 강달영, 김철수, 이준태, 홍남표, 이봉수 5인의 새 중앙위원을 선임했다. 주종건과 김재봉은 며칠 후 체포당했고 김찬은 해외로 도피했다. 그래서 강달영이 바로 책임비서에 취임했다.


1926년 6월 초 6-10 만세사건 준비 중 터진 제2차 검거 선풍으로 위의 5인 중 김철수를 제외한 4인이 체포되었다. 그 사이에 중앙위원회에 합류한 전정관과 권오설도 체포되었다. 중앙위원 7인 중 6인이 체포된 것이다. 중앙위원 후보 5인 중에도 3인이 체포되었다. 김철수는 9월 3일 검거를 면한 후보위원 원우관과 신동호를 중앙위원으로 맞아들이고 이들과 함께 오희선, 고광수의 두 중앙위원을 보선으로 끌어들였다. 얼마 후 중앙위원 홍남표와 후보위원 구연흠이 석방되었으나 해외 망명을 원했다. 그리고 12월의 대회 전에 안광천, 권태석과 김준연이 보선되었다.


‘보선’이라면 일부 공석을 다음 당 대회까지 채워놓는다는 뜻인데, 1년 남짓의 기간 중 두 차례 검거 선풍으로 인해 창당대회에서 선출한 당 중앙이 전원 바뀐 상황이 되었다. 책임비서를 맡은 김철수는 하루빨리 당 대회를 열어 민주적 조직 원리를 회복하고 책임비서 직에서 벗어나는 것을 당세 회복과 함께 지상과제로 삼았다.


12월 6일 밤 현저동 주택가에서 열린 조선공산당 제2차 대회는 엄밀한 의미에서 민주적인 대회가 아니었다. 각 지방에서 당원들이 모여 대의원을 선출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11월 28일의 중앙위원회에서 대회 날짜를 정하고 13인의 대의원을 선임했다. 중앙위원회가 지명한 대표들의 모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가 당시에 심각하게 제기되지 않은 것은 당시의 엄중한 상황과 함께 대표성을 최대한 확보하려던 중앙위원회의 노력을 감안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기존 당원 265명(후보당원 포함)의 절반 이상이 검거된 상황에서 문호 개방을 통한 당세 확장이 진행되고 있던 점도 감안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소집 주역인 김철수가(대회 비용을 친구에게서 빌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 대회를 통해 책임비서 직을 내놓은 점도 감안되었을 것이다. 김철수는 코민테른과의 교섭을 위해 대회 열흘 후 서울을 떠났다. (제2회 대회에 관한 지금까지 내용은 임경석,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록>(역사비평사 펴냄) 135-145쪽에서.)


1928년의 12월 테제는 그 해 7-8월의 코민테른 제6회 총회가 끝난 후 조직된 조선문제위원회에서 작성한 것이다. 조선공산당의 승인 취소가 제6회 총회에서 이뤄진 것인지 조선문제위원회의 12월 테제를 통해 이뤄진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12월 테제는 조선공산당의 후계조직을 불허하고 새로운 노선에 따라 재조직할 것을 지시했다.


12월 테제 작성 당시 조선문제위원회에는 조선인 위원이 없었다는 점이 12월 테제가 조선의 현실에 맞지 않는 방향으로 만들어진 한 가지 이유였을 것 같다. 이후 조선의 공산주의 운동에 12월 테제가 의지가 되기보다 족쇄 노릇을 한 면이 더 크다고 서중석은 본다.


12월테제는 ‘일제’의 식민지인 한국의 현실을 충분히 감안하지 않은 좌경 관념주의의 성격이 강하다. 일제의 이식자본주의가 식민경제 수탈구조의 중핵을 이루는 가운데, (...) 노동자계급의식 또한 제한적으로밖에 성장하지 못한 상태에서,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은 항일-반일의식은 강렬했지만, 아직 철저히 볼셰비키화되지 못했고 분파성이 강했다.

(...) 국내에서 무장투쟁은 물론 장기간의 지속적인 지하조직도 갖지 못하게 한 일제관헌의 탄압 능력을 고려해 볼 때, 한국에서의 민족해방과 혁명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 제기된 바 있는 짜르 치하의 러시아와 같은 제국주의국가 또는 사회혁명만이 요구되는 ‘독립국가’, 그리고 독자적인 해방구와 무장력을 가질 수 있는 중국과 같은 광대한 반식민지국가와는 달리, 한국의 특수성에 맞게 적용되어야 했다. 그것은 농민-노동자의 사회운동이 기본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가운데, 3-1운동에서 표출된 바 있는 각계각층의 반일 민족감정을 최대한 활용하여, 변혁을 수반하는 민족해방운동에 모든 민족적 역량이 결집되는 통일전선의 형성에 있었다. (<한국 현대 민족운동 연구> 126쪽)


<Wikipedia>의 “Comintern”조에도 1928년 제6차 총회에서 1935년 제7차 총회 사이의 ‘코민테른 제3기’의 극좌 노선 득세가 설명되어 있다.


1928년 (2월) 집행위원회 제9차 총회로부터 이른바 ‘제3기’가 시작되어 1935년까지 이어진다. 코민테른은 자본주의 체제가 최후의 붕괴 단계에 접어들었으며, 이런 상황에서 공산당의 올바른 행보는 고도로 공격적이고 투쟁전인 극좌노선이라고 선언했다. 특히 코민테른은 모든 온건한 좌익 정당을 “사회주의 파시스트”로 규정하고 모든 공산주의자가 온건 좌파의 파괴에 전력을 기울일 것을 촉구했다.

1930년대 독일의 나치 운동 흥기에 따라 이 노선에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나섰다. 역사학자인 폴란드 공산주의자 이사악 도이처가 사회민주당을 주적으로 간주한 독일 공산당의 전술을 비판한 것도 그런 예다.

식민지세계의 통일전선 정책도 제6차 총회에서 수정을 겪었다. 1927년 중국 국민당의 공산당 공격을 계기로 식민지에서 민족부르주아지와 연대를 맺는 정책이 재검토의 대상이 된 것이다. (필자 번역)


1928년은 소련과 코민테른 지도자들이 대공황을 ‘세계혁명의 기회’로 반기고 있을 때였다. 급속한 혁명을 위해 좌익의 결집을 강조하는 분위기에서 비타협적 극좌노선이 나왔다. 그러나 1935년에는 이탈리아와 독일 등지의 파시즘 대두에 위기감을 느낀 코민테른이 극좌노선을 포기하고 연합전선 정책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코민테른 좌경기에 나온 12월 테제로부터 해방 때까지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1935년 이후의 바뀐 노선을 받아들일 주체로서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 공산당 ‘재건’에서 12월 테제의 연장선에 있는 박헌영의 8월 테제가 중심적 역할을 한 것도 그 때문이다.


박헌영은 12월 테제가 완성되기 몇 주일 전인 1928년 11월 모스크바에 도착했고, 몇 달 후부터 조선문제위원회에 위원으로 참여했다. 그가 모스크바에 체류한 3년간은 연합전선을 거부하는 코민테른의 극좌노선이 맹위를 떨치고 있을 때였다. 그는 해방 후에야 소련영사관에서 극좌노선을 폐기한 1935년 제7회 총회의 상황을 조사했지만, 그의 공산당 운영은 끝내 극좌노선을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