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전’이란 전기 중에서 저자의 비평이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사실 저자의 비평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 전기란 없다. 객관적 사실의 서술에 비해 주관적 비평의 측면에 의도적으로 비중을 둔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 ‘평전’이란 말을 쓴다.

주관적 비평을 최소화하고 객관적 서술 자세를 지키는 것도 전기문학의 미덕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출판계에는 평전을 너무 좋아하는 풍조가 있어서 ‘전기’라는 말은 책 제목에서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평전’을 ‘전기’의 동의어로 여기는 이들까지 있는 것 같다.

김윤희의 <이완용 평전>에 ‘평전’이란 말을 쓴 것도 그런 예로 보인다. 나는 이 책에서 ‘비평’이라 할 만한 내용을 찾지 못했다.

목차에서부터 분명히 드러나는 사실이다. 첫 장의 첫 절에서 출생과 입양의 상황을 설명했고, 마지막 장 마지막 절에서 죽음의 상황을 설명했다. 사실 서술을 넘어 저자의 견해를 주관적으로 내놓은 것은 마지막 절에서도 마지막 문단 하나뿐이다.

머리말에서 이 작업을 둘러싼 저자의 소감을 밝히는 가운데 이완용에 대한 생각 약간을 적은 것이 있기는 하지만, 머리말은 비평의 본체를 담을 자리가 아니다. 여기에서 “배제의 정치성”, “도구적 합리성”, “동양 문명화론” 같은 개념 몇 가지가 제시되어 있는데, 이런 것은 비평의 실마리일 뿐이다. 본문이 시작되어 끝날 때까지 이 개념들은 간간이 반복적으로 나타날 뿐, 더 펼쳐지지 않았다.

이완용에 대한 비현실적일 정도로 극단적인 평가가 세상을 휩쓸어 의미 있는 비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세태를 안타깝게 여길 수는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회에는 이완용의 ‘평전’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러나 미숙한 세태를 손가락질하는 것만으로 ‘평전’이 되지 않는다. 실질적인 이해가 뒷받침해야 한다.


이완용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역사 인식에는 미숙한 점이 많다. 민족의 자랑을 내세우고 부끄러움을 감추는 데는 맹목적 흑백론이 위세를 떨친다. 전문 연구자들까지 그 위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이완용이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있어’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발칙한 한국사 연구자가 되기 십상”이라는 저자의 말이 바로 이 현실을 보여준다.

이런 세태의 미숙성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잉민족주의를 반성하는 추세다. 그런데 근년 들어 이 반성의 추세를 엉뚱하게 이용하는 움직임이 있다. 뉴라이트다.

과잉민족주의를 반성하는 사람들에게 뉴라이트 논설은 쿨~하게 들리는 면이 있다. 일본의 식민지 착취에 대한 일방적인 비난만을 자나 깨나 들으며 살다 보면 지겨운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가 “착취의 측면도 있었지만 혜택의 측면도 있었지. 인간사란 다 양면성이 있는 것 아닌가? 일본 식민지배를 통해 근대화가 이루어진 측면에서 착취보다 더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얘기하면 새로운 소리라는 이유만으로도 반갑게 들릴 수 있다.

뉴라이트 논객들은 (그들 중에 박사도 있고 교수도 있지만 그들의 뉴라이트 활동은 학술활동 아닌 논설활동이라고 나는 보기 때문에 ‘학자’라 하지 않고 ‘논객’이라 한다.) 그런 식의 신기한 이야기들을 꽤 많이 쏟아냈다. 과거의 미숙한 통념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그 노력을 치하한다. 그러나 그 신기한 이야기들도 미숙성이라는 점에서는 과거의 통념과 차이가 없다. 정치적 편견에 묶여 미숙성의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없기는 피차 마찬가지다.


뉴라이트 논객들이 아직까지 이완용 복권에 나서지 못하고 있는 까닭을 나는 정확히 모르겠다. 민족분단의 원흉 이승만을 ‘국부’로 떠받드는 그들이 매국노 이완용을 ‘문명화의 영웅’으로 둔갑시키지 못할 이유가 없다. 예상되는 역풍이 워낙 거세기 때문에 감히 ‘아직’ 발설하지 못하는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한일합방을 문명화의 은혜로 보는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이완용이 매국노의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

뉴라이트 논설의 미숙성은 그 흑백론에서 제일 먼저 드러난다. 식민지배를 너무 죄악으로만 몰아붙여 그 실상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죄악’의 딱지를 좀 떼어놓고 보자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 뉴라이트는 ‘죄악’ 딱지 대신 ‘은혜’ 딱지를 꼭 붙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하면 이완용에게도 ‘역적’ 딱지 대신 ‘영웅’ 딱지를 바로 붙이게 된다.

김윤희가 이완용에게서 ‘역적’ 딱지를 떼어놓고 보겠다고 나선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렇게 해서 딱지 없이 이해할 만한 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면 좋다. 그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자기 시대를 어떻게 받아들인 사람인지 보여주면 좋다. 그런데 이 책은 이완용의 일생을 통해 한 번도 그가 진지한 고민에 빠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어쩌다 나타나는 고민이라면 세속적 이해관계에 관한 고민뿐이다.

절도범의 변호사가 “저 사람이 큰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일념으로 저지른 일이니 이해해 주십시오. 잘 살겠다는 마음은 누구나 가진 것 아닙니까?” 해서는 변론의 효과가 없다. 이기심은 절도죄의 상식적인 근거인데, 그것을 부각시킨다 해서 절도 행위의 의미가 달라지지 않는다. 배심원들이 모르고 있던 새로운 것을 들고 나와야 한다. 노모 약값이 없어서 명이 경각에 달렸다든지...


저자는 ‘합리성’이라는 키워드에 스스로 현혹된 것 같다. “합리적 근대인”이란 말이 거듭 나온다. 합리성이 인간사의 설명에 어떤 한계를 가진 개념인지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완용이 탐욕스러운 인물도 아니었고, 근대적인 주권 개념이 없는 전통적인 관료도 아니었으며 합리적인 근대인이라고 했다. “자신을 포함한 다수가 문명화의 혜택을 누리기 위해 절대로 분노하지 않는 이성적 인간이었다.”고도 했다. (12-13쪽) 마지막 쪽에서도 “그는 100년 전 다른 양반 관료들과 달리 선진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사고를 가진 인물이었다.”고 했다. 분명히 합리성을 바람직한 미덕으로 본 것이다.

이것이 저자 본인에게도 좀 불편했던 모양이다. <조선일보> 인터뷰에서(5월 28일자) “합리적이어서 긍정적이라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근대인의 도구적 합리성이 가진 맹점을 보여줬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근대적 합리성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가졌다고 저자는 주장하지만, 책 어느 구석에서도 비판적 시각이 힘을 쓰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 맹점에 저자 자신이 빠진 모습을 보여줬다는 뜻일까?

합리성은 가치중립적인 개념이다. 능률의 척도는 되지만 도덕의 척도는 되지 못하는 개념이다. 도덕적 인간이든 부도덕한 인간이든 합리적 행동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부도덕한 인간이 합리성마저 무시하면 그 당장의 행동이 어떤 해악을 일으킬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두려움이 있다. 반면 부도덕한 인간이 합리성을 갖추면 그 해악이 억제되기 어려워 더 크게 자라날 위험이 있다.

한 인간에 대한 비평에 도덕적 관점이 꼭 필요한 것일까? 필요하다고 나는 본다. 돈을 숭배하는 독자를 위한 카네기 전기에서는 카네기의 돈 버는 기술만 보여주면 됐지, 그의 도덕성을 건드릴 필요가 없다. 그러나 기술에 대한 설명은 ‘비평’이 아니다. 대상 인물의 가치관을 보여주지 않는 설명은 ‘평전’이 될 수 없다.


도덕적 비평이라면 결국 ‘매국노’ 얘기로 돌아가야만 하나? 아니다. ‘매국노’론의 한계는 한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는 여러 도덕적 관점 중 단 하나에만 얽매인다는 점에 있다. 무엇보다도 이완용이 처해 있던 ‘전환기’의 특성을 포착하지 못하는 데 결정적 한계가 있다. 전환기의 인간은 앞 시기의 규범과 뒤 시기의 규범 사이에 치어 있는데, 이완용을 매국노로 보는 것은 앞 시기의 규범이다.

전환기의 인물에 대한 적절한 비평의 사례로 <사기> 권86 “자객열전”에 나오는 예양 이야기를 소개한다.


예양(豫讓)은 춘추시대 말기의 진(晉)나라 사람이었다. 당시 진나라에는 귀족의 힘이 강해서 여섯 귀족 집안이 나라를 쪼개 다스리고 있었다. 예양은 범(范)씨와 중항(中行)씨의 가신을 거쳐 가장 세력이 강하던 지(智)씨의 수장 지백(智伯)을 모시게 되었는데, 지백이 범씨와 중항씨를 멸망시켰다. 지백이 뒤이어 조(趙)씨를 공격하려 하자 조씨의 수장 조양자(趙襄子)는 남은 두 집안 위(魏)씨와 한(韓)씨를 설득, 힘을 합쳐 지씨를 멸망시켰다. 그래서 한, 위, 조 세 집안이 진나라를 쪼개 다스리게 되었고, 몇 십 년 후에 각자 주나라 천자의 책봉을 받고 제후가 되면서 진나라는 사라졌다.

지백이 죽은 후 예양은 주군의 복수를 위해 조양자의 목숨을 노렸다. 복수를 다짐한 그의 말이 후세에 널리 전해졌다. “선비는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던지고 여인은 아껴주는 사람을 위해 모습을 꾸민다. 지백이 나를 알아주었으니 내가 그 원수를 갚고 죽음으로써 보답한다면 혼백이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예양이 노력 끝에 조양자의 신변에 접근했지만 발각되어 붙잡혔다. 부하들이 죽이려는 것을 조양자가 말리고 풀어주게 했다. 보답을 바라지 않고 주군의 원수를 갚아주려는 예양이 의롭고 어진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예양은 그래도 복수의 뜻을 버리지 않았다. 몸에 옻을 발라 문둥이로 모습을 바꾸고 숯을 삼켜 목소리를 바꿨다. 그의 눈물겨운 고생을 측은히 여긴 친구가 보다 쉬운 길을 권했다. 조양자가 예양을 높이 평가하니 조양자의 가신으로 들어가면 복수의 기회를 쉽게 잡을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예양을 서서히 포섭하기 위해 조양자의 부탁을 받은 친구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에 대한 예양의 대답이 또한 후세에 널리 전해졌다.

“예물을 갖춰 누군가의 신하가 되어 섬기면서 그를 죽이려 한다면 이것은 두 마음을 품고 주인을 섬기는 짓일세. 내가 하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게 하는 까닭은 천하 후세에 두 마음을 품고 주인을 섬기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라네.”

예양은 조양자에게 다시 접근을 시도하다가 또 붙잡혔다. 조양자는 예양의 의기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면서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예양이 조양자에게 간곡하게 청했다. “제가 듣건대 밝은 군주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가리지 않고 충성스러운 신하는 이름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앞서 군주께서 저를 너그러이 풀어주심에 천하 사람들이 모두 군주의 어짊을 칭송했습니다. 오늘의 일인즉 제가 죽임을 면할 수 없는데, 군주의 저고리를 제게 주셔서 이것을 침으로써 복수의 뜻을 이루게 하여 주신다면 비록 죽더라도 한이 없겠습니다. 감히 바랄 수 없는 일이지만 마음을 털어놓을 뿐입니다.”

조양자가 저고리를 벗어주자 예양은 칼을 뽑고 세 차례 몸을 날려 저고리를 후려친 다음 “지백의 은혜를 갚았도다!” 외치고는 칼날 위에 몸을 덮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의 ‘시대 전환’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 이 이야기 중에 있다. 예양이 두 번째 붙잡혔을 때 조양자가 예양에게 따졌다. “그대는 일찍이 범씨와 중항씨를 섬기지 않았는가? 지백이 그들을 멸했는데 그대는 그들을 위해 지백에게 복수하기는커녕 오히려 지백을 섬겼다. 이제 지백이 또한 죽었는데 유독 그를 위해 복수하려는 마음이 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예양의 대답이 이랬다. “범씨와 중항씨를 섬겼으나 그분들은 저를 보통사람(衆人)으로 대접했기 때문에 저도 그분들을 보통사람의 태도로 모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백께서는 저를 큰 선비(國士)로 대우하셨기 때문에 저도 큰 선비의 태도로 그분을 모시는 것입니다.”

춘추시대에 강고했던 혈통과 신분의 구속력이 약해지면서 실력과 실리에 따라 군신관계가 새로 형성되는 것이 전국시대로의 변화였다. 예양은 “한 번 주군은 영원한 주군”이라던 춘추시대의 규범을 벗어났기 때문에 옛 주군들을 죽인 지백을 섬길 수 있었다. 그리고 ‘지은(知恩)’에 입각한 새로운 형태의 충성을 마음속에 키웠다.

예양 같은 사람들은 앞 시대의 선비들과 달리 주군을 선택하는 ‘자유’를 누렸지만 그만큼 더 투철한 충성으로 자유에 대한 책임을 졌다. “두 마음” 품는 자세를 절대 배척한 것이다. 그래서 춘추시대보다 혼란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나름대로 지속가능성을 가진 전국시대의 질서가 세워진 것이었다. 시대의 변화가 옛 질서의 붕괴를 가져오는 가운데 예양과 같은 사람들이 새 질서를 위한 규범을 일으켜 세운 것을 사마천이 높이 평가한 것이다.

예양의 비극은 지백의 지은에 보답하는 과정에서 원수인 조양자의 지은을 입었다는 모순에 있었다. “두 마음”을 품지 못하는 그에게 두 지은은 서로 융화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두 번째 암살 시도는 조양자의 살해가 목적이 아니라 상치하는 두 지은에 동시에 보답하려는 뜻으로 나는 이해한다. 지백을 위해 상징적인 복수를 행하면서 조양자의 명예를 드높이려는 목적. 이 목적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쳐야 했다.

조연을 맡은 조양자도 손발이 척척 맞았다. 다른 사람의 신하로서 자기 목숨을 노리는 사람의 의로움과 어짊을 한껏 치켜 올려줌으로써 자기 신하들에게도 같은 수준의 충성을 고무했다는 ‘합리적’ 설명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예양과 조양자의 어울림이 일으킨 진짜 의미는 옛 시대의 가치관과 새 시대의 가치관을 연결시키는 ‘도덕적’ 과업에 있었다.


전환기를 산 사람들의 행위를 평가하는 시각은 앞에서 보고 뒤에서 보는 사이에 차이가 없을 수 없다. 이완용의 뒤에는 유교국가 조선이 있었고 앞에는 자본주의 세계가 있었다. 이완용을 ‘매국노’라 욕하는 것은 유교국가의 기준이다. 자본주의 세계의 관점으로는 그를 ‘합리적 근대인’으로 볼 수도 있다.

전환기의 인물을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시대 변화의 의미를 배경으로 삼아야 한다. 전통시대의 조선과 식민지시대 이후의 근대 한국 사이의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어느 한 쪽에 일방적으로 매달리게 된다.

이완용을 매국노로 보는 우리 사회의 강고한 통념은 이 점에서 미숙한 것이다. 암묵적으로 이미 나와 있는 뉴라이트 관점도 똑같이 미숙한 것이다. 양쪽 다 전통시대와 근대 사이의 관계를 실질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다. 그런 노력 없이 어느 한쪽에만 매달리는 것은 역사 공부가 제대로 되지 않은 탓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조선의 망국에 임해 옛 질서와 새 질서 사이의 연결을 위한 온갖 노력이 있었다. 그 연결을 명확히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사람 노릇’ 제대로 하려는 성실한 노력이 모두 새 질서에 이바지하는 것이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 의병으로 나선 사람들, 출세를 포기한 사람들, 그 한 사람 한 사람은 뜻을 이루지 못한 무의미한 희생으로 보일 수 있다. 시대 변화를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들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시대 변화를 주체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고민한 것이었고, 밀알 하나가 죽어서 싹을 티우듯, 새 시대가 조금이라도 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시대가 되도록 애쓴 것이다.

1910년 8월 29일 저녁에 금산 군수 홍범식은 객사 뒤뜰 소나무 가지에 목을 매고 죽었다. 객사 벽에 남긴 “나라가 깨지고 임금이 없어졌으니 죽지 않고 무엇하리(國破君亡 不死何爲)”라는 간단한 유언에서는 그의 마음속에 정말 어떤 생각이 들었었는지는 알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나는 이 죽음이 당시 23세이던 아들 홍명희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홍명희의 활동을 통해 민족사회에 큰 작용을 했다고 생각한다. 군수 홍범식의 ‘비합리적’ 자살이 총리대신 이완용의 ‘합리적’ 처신보다 조선사회의 변화에 더 의미 있는 공헌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완용은 일생을 통해 자기 이익을 늘리고 지키는 것 외에는 아무런 고민의 흔적을 보이지 않았다. 김윤희는 왕실에 대한 그의 충성만은 확고한 것처럼 생각한 모양이다. 이완용을 일방적으로 옹호한 문서 <일당기사>의 “사정이 허락하는 한 조금도 자신을 돌보지 않고 충심을 다하여 늘 (임금과) 근심을 같이 할 것을 다짐했다.”는 대목이 단지 미사여구만은 아니라고 한다. “을사조약과 정미7조약 때 ‘시세의 흐름으로 힘이 미치지 못하여 어쩔 수 없었던’ 적이 있었지만, 그때에도 이완용은 고종의 권한과 지위를 위해 황실의 보존과 안녕에 대한 약속을 얻어냈다.”고 한다. (278-279쪽)

나는 그런 데서 이완용을 평가한다면 그의 사기 치는 수법을 평가하지, 충성 같은 것은 떠오르지도 않는다. 고종은 이완용이 득세와 치부를 위해 이용한 매우 요긴한 인물이었다. 두 사람은 나라 팔아먹은 공범이다. 등기가 고종 앞으로 되어 있고 이완용은 관리자 중 한 명이었다. 이완용은 자기 위치에서 최대의 몫을 챙기기 위해 어리버리한 물주의 신뢰를 얻어내고자 애쓴 것으로 나는 본다.

이완용을 개혁파로 보는 저자의 시각도 납득이 안 된다. 그가 친러, 반러, 반일, 친일 사이를 오락가락한 행적을 놓고 “그러나 고종의 통치권을 회복하여 조선을 개혁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던 이완용에게 그것은 변신이 아니었다.”고 단정한다. (144쪽) 독립협회 활동 등 이완용의 개혁파 비스무리한 행보가 진정한 개혁 의지에서 나온 것인지, 정략적 술책이었는지는 이완용의 인격에 대한 판단에 따라 해석이 좌우될 여지가 크다. 저자가 이완용의 인격을 그리도 높이 평가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책의 끝 무렵에 “일상생활에 대한 이완용의 소신”이란 절이 있다. “사리사욕을 위해 나라를 판 ‘이완용’이라는 표상은 인간의 탈을 쓴 악귀에 가까웠기 때문에 이처럼 소소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이완용을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다.”는 문장으로 끝낸 이 절에서 저자는 이완용의 재산에 대한 성실한 태도, 검소한 생활방식, 그리고 교양 높은 취미생활을 부각시키려 애썼다. 악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는 성공했는지 모르지만, 이런 근거로 이완용의 인격을 높이 평가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가치관에 문제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재산에 대한 성실한 태도 때문에 만천하의 욕을 기꺼이 먹은 사람이었다. 음주량과 식사량이 적은 것은 체질과 취향의 문제이지, 탐욕의 반증이 못 된다. 그리고 겉보기 교양은 고급 사기꾼의 중요한 소도구다.


<프레시안>에서 내게 이 책을 맡긴 까닭의 일단은 관습헌법을 주장한 헌법재판관들에게 “이완용이 그대들보다 더 나쁜 짓을 했는가?”(2009. 10. 30) 따진 글에 있는 것 같다. 그 글 끝에 나는 이렇게 썼다.

“이완용을 생각해 보자. 그는 당대의 어느 누구 못지않은 교양과 기능을 아울러 갖춘 인물이었다. 그리고 대한제국 정부 최고직에 있던 인물이었다. 한일합방이 잘된 일이라고 우기는 뉴라이트 논객들조차도 이완용까지는 옹호하고 나서지 못한다. 자기 신분과 역할에 대한 책임을 너무 뚜렷하게 등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말도 안 되는 판결을 거듭거듭 내리는 헌법재판관들에게 묻는다. 그대들은 이완용이 그대들보다 더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하는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기 바란다.”

이 헌법재판관들의 범죄를 나는 이완용의 것과 같은 유형으로 본다. 맡아가지고 있던 공공재를 제멋대로 팔아먹은 것이다. 재판관들은 헌법을, 이완용은 국가를. 흉악범이 아니라 파렴치범이다. 이들을 굳이 악인으로 비난한다면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비속성’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그들을 증오하지 말고 경멸할 것을 나는 독자들에게 권한다.

이완용은 유교 경전을 공부했지만, 선비가 되지 못한 사람이다. 시골의 가난한 집에서 자라다가 열 살 때 서울의 대갓집에 양자로 들어온 것은 글재주 덕분이었다. 재주가 출세에 쓰인다는 사실을 그 나이에 경험하며 공부란 출세를 위한 것이라는 인식을 마음에 새긴 것이 아닐지. 그 인식이 너무 투철해서 공부의 다른 목적은 생각할 여지가 없었나보다.

선비의 기준도 시대에 따라 바뀌어 왔지만,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은 변함없는 기준이었을 것 같다. 예양의 죽음도 홍범식의 죽음도 이 마음 때문이었다. 부끄러움을 알면 ‘차마 못할 짓을 꺼리는 마음(不忍之心)’을 가진다. 이완용에게는 그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고종과 함께 ‘임금은 임금 노릇 않고 신하는 신하 노릇 않는(君不君 臣不臣)’ 관계를 누구보다도 잘 엮어나갈 수 있었다.

이완용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워 고종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흐리게 해 온 지금까지의 통념은 바뀔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 세계의 관점도 그를 바라보는 시각에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재산과 학력을 가진 ‘지도층’이 스스로를 ‘이기적 존재’로만 규정하며 사회적 책임을 소홀히 하는 풍조는 자본주의 체제로서도 불건강한 현상이다. 조선이 망할 때 이완용 같은 자들이 취한 태도가 이 풍조에 어떤 작용을 했는지 밝히는 것이 ‘합리적 근대인’이라는 애매한 이름을 붙이는 것보다 훨씬 더 절실하게 필요한 일이다.


다시 ‘평전’이란 말로 돌아가서. 출판계에서 ‘전기’란 말이 사라지다시피 하고 너도나도 ‘평전’을 들고 나오는 것은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이 일으킨 감동 때문일 것이다. ‘평전’이란 이름에 딱 맞는 책이었다. 대상을 투철하게 내면화하여 주관적 서술로도 독자의 신뢰를 빈 틈 없이 붙잡을 수 있었던 책이었다.

독재시대의 사상과 표현 통제가 풀어지면서 전기 분야에도 적극적 서술방법이 늘어남에 따라 ‘평전’의 의미를 진지하게 추구하는 책들이 많이 나왔다. 평전 시리즈도 괄목할 만한 것들이 있는 듯하다. 실천문학사의 평전 몇 권을 읽은 기억이 있는데, 평전다운 평전을 향한 노력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평전’을 ‘전기’와 동의어처럼 여겨서는 안 되겠다. ‘평’이란 글자가 왜 들어가는지 설명할 수 없는 책에는 ‘평전’이란 이름을 붙이지 말았으면 좋겠다. 평전다운 평전이 되려면 저자와 대상 사이에 조영래와 전태일 사이처럼 운명적인 만남까지는 아니더라도 특별한 만남의 의미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저자의 인생에 분명한 의미를 가진 대상이라야 평전이 될 수 있지, 기술과 노동만으로 붕어빵 찍어내듯 찍어내는 것이 아니다.

100권의 평전을 목표로 한다는 ‘한겨레역사인물평전’ 기획에 불안한 마음이 든다. ‘평전’이란 것은 기획을 하더라도 겸손한 자세로 소극적인 기획을 할 대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평전’의 이름에 맞는 작품이 나타나면 거둬들이는 것이지, 몇 년에 몇 권 만들도록 기획자가 저자들을 끌고 간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일 것 같다.

첫 책의 하나로 나온 <이완용 평전>에 ‘전’만 보이고 ‘평’이 보이지 않아서 더욱 걱정된다. 저자는 이완용이 분노할 줄 모르는 인간이었다고 말하는데, 이완용을 대하는 저자의 태도에 역시 아무 분노도, 사랑도, 애틋함도, 경멸도 느껴지지 않는다. 저자는 속마음으로 “발칙한 연구자”가 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발칙도 마음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