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그 사람 생각이 난다. 며칠 전 그를 처음 만날 때 생각하며 이렇게 썼다. "말을 가볍게 하는 듯하지만 아주 탈속한 느낌을 주는, 스스로를 관조하는 자세가 투철한 분으로 느껴졌다."

내가 그에게 얻은 큰 가르침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말에서도 글에서도 그는 듣는 사람, 읽는 사람을 편하게 해준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 때문이다. 얘기할 때 보면 배려 정도가 아니라 상대방 뱃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다. 용연마을 영감님을 취재할 때 얘기를 잘 끌어내던 놀라운 재간도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자기 입장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 너무나 가볍게 느껴진다. 상대방이 아무 부담감이나 거리낌을 느끼지 않게 해주는 것이다.

<프레시안>에서 조직한 백두산 관광단이 왔을 때, <프레시안> 관광단답게 진지한 강연을 프로그램에 넣겠다고 류 선생과 나를 강사로 초빙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워낙 욕심스럽게 일정을 잡아 강행군을 하다 보니, 떠나기 전날까지 강연할 틈을 내지 못하고는 연길에서 도문 가는 버스에 우리를 일단 태웠다. 그런데 시간이 이미 늦어 도문 도착해서도 강연시간 뽑기가 어려운 형편. 그래서 버스 안에서 마이크를 쥐었다. 내가 30분 떠들고 류 선생이 넘겨받아 30분 떠들었다.

도문에서 일행과 함께 자고 아침에 일어나 식당으로 가는데 한 아주머니가 류 선생을 보고 반갑게 인사한다. "선생님 어제 강연 감명깊게 들었어요. 너무나 감동스러워서 잠이 확 깼답니다." 류 선생이 점잖게 인사를 받고 있는데 자격지심을 이기지 못하고 내가 끼어들었다. "아니 류 선생, 피곤하신 분들 내가 겨우 재워 놨는데, 왜 깨우고 그랬지?"

내 수면제 성능은 내가 안다. 나는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하려고 낑낑댔다. 하루종일 벅찬 행정에 시달려온 분들이 그런 소리 들으면서 잠 안 들기를 바란다면 내가 생각해도 도둑놈이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더 잘해 드릴 길을 찾지 못하는 것이 내 주변머리다. 그런데 류 선생은 마이크를 넘겨받자 고속도로 위에서인데도 일어나 서서 청중을 바라보며 진부한 설화들에 감정을 실어 일장 공연을 한 것이다. 경험 차이도 있지만, 상대방의 필요를 본능적으로 헤아리는 품성의 차이가 더 크다.

글도 그렇다. 똑같은 메시지를 담는 데 류 선생은 나보다 몇 배 더 길게 쓴다. 문장 전문가에게 채점하라고 하면 대부분이 내 글에 점수를 많이 줄 거다. 그런데 류 선생 글이 내 글보다 효과가 좋은 면이 있고, 나는 그것이 무척 부럽다. 무익무해한 사설이 하염없이 늘어지는 중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슬금슬금 얹어 풀어내니까, 읽는 사람이 아무 긴장감 없이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내 글은 읽는 사람에게 긴장을 요구한다. 백두산 관광단처럼 피곤한 사람들에겐 접근할 길이 없다.

그의 실용주의적 자세와 나의 권위주의적 자세 사이의 차이가 글쓰기 방식에서 제일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에는 타고난 품성의 차이 위에 경력의 차이가 큰 역할을 했다. 내 경우 학문에 매여 있을 때는 글쓰기를 부수적 작업으로 여겼고, 칼럼니스트로 나서고도 귄위 있는 입장의 글쓰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류 선생은 독자의 관심을 권위의 도움 없이 자기 노력으로 끌어와야 하는 입장에서 글쓰기를 해 왔다.

1957년생의 류 선생이 연변대학 조선어조선문학과에 입학한 것이 1981년 아니면 1982년이라고 들은 것 같다. 개혁개방 정책이 1979년에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연변대학 학생 선발방법이 문혁의 여파에서 벗어나는 데는 2-3년 시간이 더 걸린 모양이다. 능력과 취향에 따라 대학에 진학할 수 있게 되면서 한 10년쯤 적체된 지원자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고. 고중 졸업한 지 5년이 넘은 류 선생도 동급 신입생 중에서 늙은이 축에 들지 못했다고 한다.

문학을 전공하게 된 것도 당시 사회와 대학의 여건에 좌우된 결과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아마 우리 사회 같은 여건이었다면 인문사회 분야 중 적성에 더 맞는 전공을 고를 여지가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거다!" 할 만큼 독서의 폭도 가지지 못한 채로 꽤 늦은 나이에 진학하면서 글쓰기의 기본기만으로 자신감을 가질 분야가 아니고는 엄두를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대학 다닐 때 개혁개방 덕분으로 '민족' 이야기에 눈을 뜨면서 민족의 의미를 탐구하는 긴 작업이 시작되었다. 지금 같은 여건이라면 석사과정에서 역사학으로 전공을 바꿨기 쉬운데, 그럴 여건이 아니었으니 '작가'라는 직업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조사-연구 작업을 행해 왔다. 2002년 나와 만날 때는 한국 쪽에서 도움을 받는 길도 더러 열리고 해서 형편이 많이 풀렸을 때였지만, 1990년대 여러 해 동안 답사작업을 어떻게 해냈는지, 아무리 이야기를 들어도 이해가 잘 안 된다. 몇만 리 길 걸어다닌 노고는 차치하고, 그 동안 출판사 직원에서 잘리지 않도록 무슨 재주를 부렸을까?

청년기 이래 문화활동의 여건이 각박한 사회 안에서 류 선생은 참 독창적인 일거리를 많이도 만들어내며 지냈다. 그러기 위해 매우 금욕적인 생활 자세를 지키지 않을 수 없었는데, 금욕주의자로 찍히는 일은 절대 피했다. 술 먹고 노는 일에도 빼는 사람이란 인상을 결코 주지 않는다. 다만 너무 많이 불려다니지 않도록 '인기 관리'를 적절히 하고, 적당한 시기에 빠져나오는 탁월한 솜씨를 익혔다.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가 이례적으로 분명히 한 일이 하나 있다. 카드놀이다. 일종의 브리지 게임인데, '푸커'라 불리는 이 놀이가 중국의 국민스포츠다. 우리의 고스톱보다 훨씬 더 쎄다. 네 사람만 모이면 아무 데서나 판이 벌어진다.(등산 가서도 점심 먹고 푸커판 펼치는 데는 진짜 놀랐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였을 때 선수가 아무리 모자라도 유 선생 끌어들일 생각을 아무도 하지 않는다. 부득이해서 끌어들이면 얼마동안은 매우 재미있다. 승리를 위해서 패를 놀지 않고 엉뚱한 장난만 치기 때문이다. 잠깐은 웃고 즐기지만, 게임의 김이 새버린다. 시간이 아까워서 이 놀이를 싫어하는 것일 텐데, 그는 그렇게 말하는 일이 없다. (그렇게 말하더라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다.) 아무리 좋은 놀이라도 나랑 치면 재미없다는 사실을 몸으로 보여주니까 욕도 할 수 없다. (욕하는 사람도 있지만 진지한 욕이 되기 힘들다.)

술자리에서 노래시키는 것도(조선족 사회의 민족스포츠) 그런 식으로 대응한다. 시키면 마다하는 일이 없다. 그저 시키고 싶은 생각이 많이 들지 않게 만들 뿐이다. 그런 용도에 많이 쓴 노래 하나, 가사를 도입부만 소개한다. 이 가사가 그의 창작이라고 나는 믿는다.

"한 할아버지 나무를 하다가 / 실수를 해서 잠지를 잘랐네 / 잠지가 굴러 연못에 빠졌네 / 산신령이 나~타났네"

허허실실의 자세가 몸에 밴 사람이다. 말하는 식도 글쓰는 식과 마찬가지다. 실없는 사람으로 보일 정도로 싱거운 소리만 늘어놓는 것 같은데, 뭔가가 슬쩍슬쩍 얹혀서 날아온다. 그 메시지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힘들이지 않고 받아볼 수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메시지가 지나간 줄도 눈치채지 못한다. 자신을 관조하는 초연한 성품으로 하고 싶은 일 하기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연마한 처세술일 것이다.

5년 전 내가 연변을 떠나고 얼마 후 연변대로 옮기면서 뭔가 조금 달라지는 것 같았다. 어릿광대 놀이가 줄어드는 것 같았다. 그것도 반가웠다. 일할 여건이 이제 웬만큼 갖춰졌으니 여건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줄여도 되는 것으로 생각되어서였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놀라운 일을 이뤄온 이 사람이 이제 어떤 일을 얼마나 신나게 해나갈까, 잔뜩 기대를 품었는데...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