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동 로타리에서 백 미터쯤 올라가다가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 두 집째, 골목들이 마주친 모퉁이의 자그마한 왜식 집으로 이사한 것이 초등 3학년 올라갔을 때였던 것 같다. 부산 피난 후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우리 집' 살림을 시작한 곳이다. 대지 30평 남짓에 건물 열댓 평의 조그만 집이었지만 단칸방 셋방살이에서 풀려난 우리들에겐 대궐 같은 곳이었다. 대문 안으로 조그만 마당이 있었고, 현관을 들어서면 복도 끝이 부엌, 그 오른편에 조그만 욕실까지 있었다. 복도 양쪽이 방인데, 오른쪽은 6조 다다미방이었고, 왼쪽에는 조그만 방 둘이 미닫이를 격하고 있었다. 오른쪽 방이 사내아이들 방이었고 왼쪽 깊은 방이 여자들 방이었으며, 왼쪽 바깥방은 거실이었던 셈이다. 마당에서 집 왼쪽으로 들어간 곳에는 집의 규모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어서 근처에서 '은행나무집'이라 불리기도 했다.

 

혜화동 집의 제일 큰 가구가 정릉 집에 보관하고 있던 아버지 책장 하나를 가져온 것이었다. 6자 정도 폭에 밑은 한 자 남짓 깊이에 두 자 남짓 높이의 장 모양이고(꼭대기엔 서랍도 한 층 있었다.) 그 위에 세 자 가량 높이의 책장이 얹혀져 있는 것이었다. 어머니 전공서적도 그 안에 들어 있었지만,(아래쪽 장 속에) 내게 중요한 것은 세 뭉치의 책들이었다.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 정음사 세계문학전집, 그리고 학원사 세계대백과사전.그 책들이 내 혜화동 생활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성분이었다.

책을 어떻게 읽으라는 가르침을 누구에게도 받은 기억이 없다. 그냥 "책이 거기에 있으니까" 읽을 뿐이었다. 대학생도 힘들어할 책들을 초딩이가 다 읽었다. 읽었다기보다 눈에 발랐다. 그래도 아무 생각 없이 눈에 바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너무 어려워 못 읽어낸 책이 딱 한 권 있었다는 사실이 반증해 준다. <20세기의 지적 모험>이란 제목이었는데, 톰 소여나 허클베리 핀 생각을 하고 펼쳤다가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난다. 요즘 니체 해설서 읽으면서 뻑뻑함을 느낄 때 그 기억이 떠오르며, 내가 원래 철학적 사고에 약점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생각해도 그 시절의 게걸스런 책읽기에 스스로 혀를 차는 것은 무엇보다 백과사전까지 읽을거리로 활용했던 기억 때문이다. 세계 모든 나라의 수도와 인구, 산의 높이와 강의 길이 등등 온갖 쓰잘 데 없는 정보를 머릿속에 쟁여넣는 것이 뭐 그리 재미있었는지. 당시에 골든벨 같은 퀴즈대회가 있었으면 한 주름 잡았을 것 같다. 흰 종이에 검은 글자 찍어놓은 거라면 뭐든지 환영이었다. 우리 집에선 한국일보를 구독했는데, 네 면밖에 없던 게 다행이다. 요즘처럼 몇십 면 찍어 보내면 학교 갈 틈도 없지 않았을지...

어린이 잡지로 <새벗>과 <학원>을 대놓고 봤다. <학원>은 중고딩 용이었지만 세계문학전집을 머리에 담아놓은 초딩에겐 부담없는 읽을거리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만화가게에 재미를 붙이게 됐다. 세계문학전집보다 훨~ 재미있었다. 이 취향은 고딩 때 무협소설로 발전하게 된다.

 

골목에서 아이들과 뛰놀고 싶어 했다. 그러나 동작이 굼떠서 환영받지 못하는 아이였다. 팽이도 못 돌리고, 제기도 못 차고, 달리기도 늦고, 힘도 약하고... 몸에 대한 컴플렉스가 심했다. 게걸스런 책읽기는 그 반작용이었을 수도 있다.

형들이 골목에서 놀 때는 덕분에 끼어 놀 수 있었지만, 노는 재간이 없으니 늘 놀아봤자였다. 골목의 놀이친구들보다 더 요긴한 놀이 상대는 우리 집에서 2백 미터 가량 더 올라간 곳에 있는 박 선생님 댁 아이들이었다. 우리 집에서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박 선생님"이라 불렀던 박종홍 선생님은 어머니의 이화여전 때 은사였고, 아버지께는 대구고보 때 은사였으며, 아버지와 문리대 동료 교수였던 분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처음 만나 가까워지는 데도 어떤 식으로든 매개 역할을 하셨으리라 짐작된다. 그 댁의 5남2녀 중 4남인 윤창 형이 큰형과 동갑이고 막내 순창 형과 예경이가 나보다 한 해 위, 한 해 아래였다. 그들이 우리 남매들과 뛰어 노는 데도 좋은 상대가 되었고,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노는 데는 골목의 다른 아이들이 해줄 수 없는 상대역을 맡아줬다.

박 선생님 댁 아이들과 함께 우리 남매들의 특별한 친구 역할을 한 것은 어머니 친구 고 선생님네 아이들이었다. <역사 앞에서>에 아버지 친구 이철 씨와 어머니 친구 고 선생님의 결혼을 권한 얘기가 나온다. 이철 씨가 전쟁 중 월북한 뒤 고 선생님은 숙대 교편을 잡으며 남매를 키웠는데, 은경 누나는 내 한 해 위였고 경이는 한 해 아래였다. 경이네는 우리 집과 5백 미터 가량 거리였다. 이 특별한 친구들과의 놀이는 어머니가 권장하며 거의 아무 제약을 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 하던 놀이를 새로 하게 되는 것은 대개 이들과 함께였다.

 

혜화동 살 때부터 생겨난 풍속 한 가지가 설 때 아버지 동료였던 세 분 선생님께 세배 가는 일이었다. 박 선생님 댁에는 어머니도 영아도 다 같이 가는 일이 많았는데, 동숭동의 서울대 관사에 살고 계시던 이희승 선생님과 김상기 선생님께는 대개 3형제가 다녔다. 이 선생님은 이화여전 이래 어머니의 직계 스승이셨는데, 어머니는 다른 제자분들과 함께 세배하느라고 우리를 따로 보낸 것 같다. 그리고 바로 앞집의 김상기 선생님을 피하려는 뜻이 있으셨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나중에 하게 됐다. 김 선생님 역시 어머니의 이화여전 스승이시고 문리대에서 아버지와 제일 가까운 동료로 계셨는데, 아버지 돌아가신 후 인세 문제 등 서운한 감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훨씬 뒤에야 알게 됐다.

박 선생님 댁은 우리 또래 아이들이 있어서인지 내외분의 성품 덕분인지 늘 화기가 넘치는 집이었고, 이 선생님 댁은 대체로 편안한 분위기지만 너무 점잖아서 주눅이 드는 편이었다. 김 선생님 댁은 썰렁~한 분위기여서 벌 서는 기분이었다. 표현력이 뛰어난 작은형은 머지 않아 이 선생님을 "땅꼬마 할아버지", 김 선생님을 "네모돌이 할아버지"로 지칭하게 된다. 그 무렵 세배 풍속이 만들어진 것은 큰형이 경기중학생이 되니까 아버지의 옛 동료들께 인사 드릴 자격이 되었다고 어머니가 판단하신 때문일 것이다.

세 분 선생님께 세배 오는 분들은 대개 아버지를 아는 분들이었을 것이다. 우리와 마주치는 분이 있으면 그 댁 선생님께 누구 자제들이란 말씀을 듣고 우리를 유심히 쳐다보곤 하던 생각이 난다. 아버지가 대단히 훌륭한 분이셨다고 하는 집안 어른들의 말씀에 그런가보다 하고 듣던 것과 다른 차원에서 아버지의 존재감을 느끼게 하는 경험이었다. 아버지가 안 계시다는 사실을 크게 느끼기 시작한 데는 이런 자극도 작용한 것이 아니었을지.

 

학교 얘기가 이제야 나온다. 깨어 있는 시간을 제일 많이 보낸 곳이 학교였다. 그런데 학교생활의 기억에서 짚어낼 것이 많지 않은 것은 학교가 재미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중고등학교는 물론이고 초등학교에서도 분단장 한 번 해본 적이 없다. (6학년 끝나갈 때 특수한 상황에서 명목상 분단장 잠깐 해본 걸 제외하면) 참 존재감 없는 아이였다. 쓰거든 떫지나 말라고, 공부를 못하면 놀기라도 잘해야 할 것을,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는 아이가 성격까지 뚱했으니.

훗날의 나를 보고는 초딩 때 공부가 시원찮았다는 사실을 누구도 잘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실이다. 100명 반에서 20등 30등 사이가 늘 내 자리였다가 5학년 이후에야 10등 안으로 들어와 그래도 괜찮은 중학교 바라볼 주제가 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치마바람이 없기 때문이 아니었을지. 어머니는 입학식 때도 안 오셨고, 나 때문에 우리 학교 오신 게 졸업식 때뿐이었던 것 같다. 졸업을 앞두고야 내 석차가 올라간 것은 중고등 때도 반복된 일인데, 입학시험을 앞두고는 성적 구성에 있어서 치마바람의 비중이 줄어들기 때문이었다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치마바람 없는 아이가 선생님께 무시받는 경향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당연한 사실로 감수하고 지냈는데, 더러 예외가 있었던 것 같다. 제일 뚜렷한 기억은 3학년 때의 여선생님. 가정방문이라 하면 같은 방향에 사는 아이들을 모아 한 집씩 우루루 몰고 가면 방문받은 집 문앞에서 놀며 기다리기도 하고 더러 잘 사는 집에는 다들 들어가 다과를 대접받기도 한다. 가까운 순서대로 하면 우리 집 들를 때가 되었는데 선생님은 내게 "너희 집은 나중에." 해서 저쪽 끝집까지 다 쫓아다녀야 했다. 내가 미워서 괄시하시는 건가, 속으로 억울한 생각도 드는데, 결국 애들 다 떨궈놓고 나서야 단둘이 우리 집으로 갔다.

어머니와 선생님이 마주 앉은 것을 보고, 나가 있으라 해서 멀리도 못 가고 마당에서 놀며 기다리고 있는데, 한참 있다가 이상한 소리가 새어나오지 않는가! 현관 모서리에서 살그머니 들여다보니 두 분이 손을 붙잡고 방성대곡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이상하고 두려운 생각에 몰려 어찌된 일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가 한참 지난 뒤에야 사정을 알게 되었다. 그 선생님도 전쟁 때 혼자 된 분이었고, 우리 집 사정을 보니 신세 비슷한 분 마주치게 될 것인지라, 다른 애들 데려오지 않기 위해 맨 뒤로 돌린 것이었다.

그 선생님은 나름대로 나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가 어머니 만난 길에 고무적으로 들릴 만한 얘기를 애써 해주셨던 모양이다. 후에 두고두고 나를 쪽팔리게 했던 인사성 밝다는 얘기도 그 때 나온 것인 듯. 운동장에서 선생님 세 분이 함께 지나가는 데 마주쳐서는 선 자리에서 머릿수대로 세 번 꾸벅댔다는 얘기.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어 보이지만 인사 하나만은 확실히 하는 아이라는 얘기가 왜 그리도 쪽팔렸는지...

 

일요일에 외갓집 가는 행사는 꾸준히 계속되었다. 친가 친척들은 차례, 제사 때 열심히들 찾아 줬다. 동성학교 교사로 있던 기돈 형님과 농협 근무하던 대규 형님은 그밖에도 자주 들렀는데, 교육 문제와 돈 문제 의논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남매들 사이에 오래갈 위계질서가 세워졌다. 큰형의 가부장적 권위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었다. 중학생이 된 큰형의 역할이 분명하기를 어머니가 원하신 결과인데, 그 때 나는 큰형이 얼마나 부러웠던지! 그것이 큰형에게 얼마나 큰 짐이었는지 깨닫고 미안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작은형은 이 권위에 반항적이었고 나는 순종적이었지만, 둘에게는 큰 폐해가 없었던 편이라고 생각한다. 유일한 여자아이인 영아가 전면적으로 불편한 압박을 받았고, 공주할머니가 그 수호천사 역할을 맡으셨지만, 오빠들보다 큰 상처를 남겼을 개연성이 있다.

'우리 집'에 살게 되면서 어머니 친구분들도 많이 찾아오시게 되었다. 제일 익숙한 그룹은 전쟁 때 혼자 되신 지식여성들의 자칭 '과부클럽' 신신회였다. 앞서 말한 경이 어머니 고 선생님을 비롯해 열 분 가량 되었던 것 같은데, 모두 우리 남매에겐 이모님들처럼 친숙하게 되었다.

특별히 칼러풀한 분이 두 분 계셨다. 한 분은 어머니의 고종사촌 병희 아주머니였는데, 어머니보다 한 참 연하에 직업도 성우이신지라 그 화려함이 당연한 것일 수 있는데, 이화여전 동창인 초열 아주머니는 참 놀라운 분이셨다. 검소하고 어두운 분위기의 어머니와 화려하고 밝은 분위기의 그 아주머니가 어찌 그렇게 단짝으로 지내셨는지는 근년 어머니에 대한 내 이해가 넓고 깊어지면서 비로소 풀리기 시작한 문제다. 해군 장교와 재혼한 초열 아주머니는 어머니께도 재혼을 권하셨던 모양이고, 그분 말씀만은 어머니도 귀담아 듣기는 하셨던 모양이니 우리 남매의 운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칠 잠재력을 가진 분이셨던 셈이다.




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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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6.16 19:34

    혜화동에서 책읽는 초등학생때의 모습이 정겹게 그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