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북한 정권 세습 논란에 관해 글을(“경향일보와 이대근 씨! 정권 세습은 절대악이 아니요.”) 올린 후 논란이 있다는 얘기를 주변에서 들었지만 주중에는 <해방일기> 작업에 바빠 살펴보지 못하다가 오늘 둘러봤다. 경치가 별로 안 좋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15일자 <조선일보>의 이선민 기자 글. 싱가포르를 갖다 댄 내 얘기에 “기상천외한 주장”이란 딱지를 붙였다. 내 이름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같은 학과 선배라고 봐준 걸까? 누군가가 이것을 “유치원 수준의 논리”로 평가했다고 하니.


그 ‘누군가’를 찾아보니 진중권 씨인 모양이다. 진 씨 글은 더러 읽어본 게 있는데, 이건 수준이 좀 이상하다. 이 양반 아이디 관리를 잘못해서 도용당한 것 아닐까? 그래도 해명이 따로 없으니 본인이 쓴 걸로 가정해야겠다.


참 보기 안 좋은 글이다. 제목부터. “이정희 대표의 변명”이라고 남의 발언을 ‘변명’이라고 몰아붙여 놓았다. 내 글 이야기는 물론 “궤변”으로 간단히 규정되어 있고. “새나라 유치원” 운운은 유치원에 다녀보지 못한 나로서는 황감한 얘기지만, 그거 참, 남의 얘기를 비평하는 표현이 이런 것밖에 없나?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 표현 수준이 참 딱하다.


괜찮은 글도 쓸 줄 아는 사람인데, 왜 이럴까? ‘편 가르기’의 폐해겠지. 자기편 사람들을 상대로만 글을 쓰니까 자신을 돌아볼 틈 없이 둘러선 사람들이 부추기는 대로 마구 쏟아내는 거다. 그걸 딱해 하는 사람이 있으면 “저건 나쁜 놈이니까,” 하고 무시해 버리고.


정말 이 사회의 편 가르기 풍조가 너무 심하다. 이 풍조에 언론이 앞장선다. 이번 논란에 관한 언론 보도는 모두 옹호파와 비판파의 구분뿐이다. 북한 권력 세습의 의미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려는 노력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느 신문에선가, 내게 ‘진보 논객’이란 딱지 붙인 것을 보고 실소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진보도 아니고 논객도 아닌데.


2년 전부터 ‘보수주의자’를 표방해 왔다. 표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의미를 밝히기 위해 애를 꽤 써왔다. 그런데 MB정부 비판하면 무조건 ‘진보’로 보는 사람들이 있나보다.


논객? 이건 사실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일인데, 막상 그렇게 불려 놓고 생각하니 아니다. 논객이라면 주견을 가지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 아닌가? 내게는 남을 설득할 의지가 없다. 물론 내가 하는 생각을 주변 사람들도 함께 하기를 바라지만, 거기까지다. 내 ‘믿음’을 남들이 공유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생각을 더 해 볼 만한 방향을 권해주기 위해 글쓰기를 한다. 논객보다는 학인(學人),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이번 일도 그렇다. 나는 북한의 권력 세습에 대해 지지하지도 않고 반대하지도 않는다. 주견이 없다. 다만 경향신문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공박에 폭력성이 보여서 지적했을 뿐이다. 그리고 참고가 될 만한 포인트를 떠오르는 대로 제시한 것이다. 싱가포르의 비유가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많은데, 비유란 원래 완벽하게 맞을 수 없는 것이다. 결론(이라기보다 함축하는 뜻)이 싫다고 그냥 외면해 버리는 대신 차분히 새겨보면 다소나마 참고 되는 점이 있을 것이다.


<해방일기> 작업을 하며 해방공간에서 정치적 전선(前線)의 형성 과정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좌익과 우익 사이의 전선이 늘 주목을 끌어 왔다. 그런데 당시 상황에서 좌익과 우익 사이보다 중도파와 극단파 사이의 전선에 더 실질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관점을 떠올리고 있다. 극좌와 극우가 함께 중도파에 대항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는 말이다.


중도파는 민주주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극좌와 극우는 이 공감대가 안정된 체제로 자리 잡는 것을 함께 반대한 것이다. 적어도 분단국가 수립에는 극좌와 극우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민주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가 서로 어울리는 통일국가가 세워진다면 극좌, 극우, 모두 입지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분단국가 수립은 양자 간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통해 중도파를 배제하는 길이었다.


극좌와 극우의 공통점은 어디에 있었나? 이기심을 앞세워 폭력에 의존한 데 있었다. 극우가 물질적 이익을 추구한 것은 쉽게 보이는 사실인데, 극좌는 자기 믿음을 남들에게 강요하는 ‘정신적 이익’을 추구한 것으로 나는 해석한다. 양쪽 모두 폭력 사용에 망설임이 없었던 것은 이기심 때문이었다.


해방공간에서 짓밟힌 중도파의 역할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되살아나지 못하고 있다. 자기 이익을 남에게 앞세우기 위해서나 자기 믿음을 남에게 강요하기 위해 폭력을 마다하지 않는 세태 속에서 사람들은 밤낮으로 흑백론에 내몰리고 있다. 지나친 ‘편 가르기’ 풍조가 그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진보는 이래야 한다, 저러면 안 된다, 하는 얘기에서 ‘편 가르기’ 위험을 많이 본다. 가치관을 분명히 하기 위한 노력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 노력이 합리성의 기준을 벗어나면, 전술적 고려가 철학적 입장을 침해하면 패권주의의 폭력성이 나타난다.


<경향신문> 이대근 논설위원은 일전 “김정은을 우습게 보지 말라”는 글로 일관성 시비를 일으켰다. 그가 어떻게 변명할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권력 세습 비판은 도덕적 판단에 따른 것이고 현실로서 김정은 인정은 정책적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권력 세습이 절대악이 아니라고 내가 지적한 것은 권력 세습 비판이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도덕적 문제 아닌 것을 도덕적 문제라고 우기는 데 색깔론의 폭력성이 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