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몇몇 사람들의 준론(峻論)은 비록 받아들일 수는 없으나 피리춘추(皮裏春秋)로 치부한다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는 내가 애초에 아무아무를 일으켜 그렇게 말하도록 권하고 가르쳐준 것이다. 아무아무는 그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어 그들의 미덕을 이루게 하고, 경들은 일을 참작하고 헤아려 이치에 어긋나는 중에 또다시 이치에 어긋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니, 성인이 다시 나타난다 해도 사변에 대처하는 방법은 여기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권도(權道)는 본디 보통 사람이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이 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공부가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였다고 해서 사변에 대처하고 권도를 쓰는 방법을 생각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다시 깊이 생각하는 것이 어떠한가?


심환지가 1799년 2월 19일에 받은 어찰 내용의 일부다. 정조는 자신의 '어찰정치'를 비롯한 정국 운용방법이 책략에 의존하는 '권도'임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권도의 문제점을 알지만, '사변, 즉 비상한 상황 때문에 부득이한 것으로 생각하고 권도를 행사한 것이다.

순조 이후의 정국을 '세도(勢道)정치'라 하고 정조 초년의 홍국영 등용을 세도정치의 선구라고 흔히 말한다. 정조의 정국 운용방법의 한 측면을 '권도정치'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홍국영의 등용도 권도정치의 한 양상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생각한다.

세도정치의 주체가 세도가였던 것과 달리 정조의 권도정치는 왕이 주체였다. 명분이 모든 것을 정해주는 유교국가의 원리에서 벗어난 점이 있다는 점에서 '권도'이기는 하지만 왕이 주체라 하는 가장 기본 원리는 지켜지고 있었던 것이다. 홍국영의 권력은 왕권에 종속된 것으로서 왕의 승인 하에서만 유효한 것이었다. 그가 외척이 되어 자기 권력에 지속성을 확보하려 하자 정조는 승인을 철회했고 그의 권력은 즉각 소멸되었다.

심환지가 받은 어찰에는 권도가 많이 들어 있다. 짜고 치는 고스톱, 눈가리고 아웅 같은 대목이 거듭거듭 나타난다. 그렇지만 권도가 주종은 아니다. '세도(世道)'를 받드는 자세가 바닥에 깔려 있다. 정조의 정치에서 세도는 목적이고 권도는 방편이었던 것이다.

심환지 어찰집 내용의 놀라운 점 하나는 시파와 벽파에 대한 정조의 태도다. (어찰에는 '時牌'와 '僻牌'로 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시파를 가볍게 보고 벽파를 무겁게 보는 것이다. 시파를 여당, 벽파를 야당으로 보는 통념이 뒤집어져 보인다.

벽파 인사에게 보내는 것이라서 본심과 다른 태도를 거짓으로 지어낸 것일 수는 없다. 이 어찰집 안에 폭넓게 담겨 있는 정치관과 시국관에 연결된 태도이기 때문이다. 나도 이 어찰집을 처음 보면서 이 점이 당혹스러웠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럴싸하게 보이기도 한다. 정조가 정치의 목적인 '세도'를 벽파에게 구하고 방편인 '권도'를 시파에게 구한 것이 아닐지. 권도를 통해 유교정치의 회복을 꾀하는 과정에서 세도 자체가 너무 손상되지 않도록 노심초사한 것이 아닐지.

정조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사변'이라고 생각했다. 상황이 비상한 것인지 여부는 정상적 상태를 규정하는 기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정조는 원론적 유교국가를 정상적 상태로 규정했던 것 같다. 대충 돌아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과로사에 이를 만큼 일을 많이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심환지 등 벽파에 대해서도 관리 차원이 아니라 육성 내지 지도 차원에서 임했던 것 같다.

권도까지 구사해 가며 열심히 일해 세도를 되살려 놓으면 권도의 필요도 임금이 과로할 필요도 줄어들기를 정조는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나이 오십도 안 되어 갑자기 죽었을 때, 형편이 근본적으로 좋아져 있지 못했던 것 같다.

유능하고 부지런한 임금이 사라지자 시파도 벽파도 정조가 바라던 역할에서 벗어나 정권 경쟁에만 몰두하는 상황이 펼쳐졌다. 먼저 정권을 잡은 벽파는 신유박해(1801)를 일으키는 등 편협하고 독선적인 길을 걸었다. 벽파 이념의 궁극적 타당성을 보장해 주던 임금이 없어졌기 때문에 극단으로 흐르는 경향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던 것 같다.

편협한 노선은 반작용을 불러오지 않을 수 없다. 벽파의 배경이던 정순왕후가 1803년 말 수렴청정을 거두고 1805년 초 죽음에 따라 벽파의 권력이 왕비 집안인 안동 김씨에게 옮겨져 세도(勢道)정치가 시작된다. 이 권력 이동 과정을 촉진한 김달순의 옥사를 살펴봄으로써 당시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해 본다.

정순왕후가 죽은 지 1년이 되어 갈 때 권력 약화를 걱정하고 있던 김관주 등 벽파 거두들은 자기네 입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 사도세자와 관련된 안건을 제기하고자 했다. 사도세자를 비판했던 인물들의 포상을 통해 자기네 당파의 정당성을 과시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조가 당쟁의 격화를 막기 위해 사도세자의 일을 일체 따지지 못하게 한 방침이 그때까지 지켜지고 있었다. 이 방침을 뒤집으려 달려드는 것은 큰 위험이 따르는 정치적 모험이었다.

김관주는 외척의 범주에 드는 두 인물, 박종경과 김달순을 설득해 총대를 메게 하고 입궐할 순서와 날자까지 잡아 줬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안 박종경의 아버지가 집안 망칠 짓이라고 펄펄 뛰며 입궐하지 못하게 가둬놓았다. 이것을 모르고 김달순이 입궐해 자기 몫의 이야기를 했고, 어리둥절한 왕은 벽파가 원하는 반응을 일으켜주지 않았다. 안동 김씨 측에서 이를 기화로 김달순을(그도 안동 김씨이기는 했지만 벽파였다.) 공격해 사사(賜死)에 이르게 했고, 그 과정에서 벽파가 조정에서 축출되었다.

1806년 집권한 안동 김씨는 소명세자의 빈만 풍양 조씨에게 양보했을 뿐, 헌종과 철종의 왕비를 들여보내 1802년에서 1863년까지 한 갑자 넘게 왕비의 친정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헌종 때 일시 풍양 조씨에게 밀려났을 때를 제하고는 조정에서 과거 어느 외척보다도 고위직을 많이 차지했다. 이 시기에 안동 김씨는 보통명사 아닌 고유명사 "세도가"였다. 순-헌-철 3대의 세도정치는 "안김정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조가 죽기 전에 세자와 김조순의 딸을 정혼해 놓은 것이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씨앗이 되었다. 정조가 김조순을 사돈으로 찍은 것은 기대하는 역할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외척으로서 세도정치를 행하는 것이 정조의 기대는 아니었을 것이다. 왜 김조순은 정조의 기대를 등졌을까?

김조순의 집안은 조선 최고의 명문이었다. 병자호란 당시 김상헌-김상용 형제가 충절의 상징이 된 이래 그 후광 속에서 재상과 거유들이 속출했다. 도덕적-학문적 귄위와 정치적-재정적 실력을 두루 갖춘 집안이었다. 조선 국가체제 안에서 왕실 다음으로 누릴 것이 많은 가문이었다. 김조순 개인보다 그 집안을 특별한 위치에 두고 활용할 뜻이 정조에게 있었을 것이다. 물론 세도를 만들어주려는 것이 아니라 권도에 이용하려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권도의 주체인 정조가 사라져버리자 안동 김씨가 권력의 주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권력의 주인이라도 명분 있는 진짜 주인이 아니라 맡아 놓은 권력의 명분 없는 주인이었다. 걷잡을 수 없는 모럴 해저드 사태가 펼쳐졌다. 19세기 세도정치는 백성 괴롭히고 나라 망칠 악의가 있어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나라가 나라 구실 제대로 하게 하려는 의지와 힘이 미약해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도덕적 해이는 정조조에도 만연해 있었다. 1797년 10월 5일 심환지가 받은 어찰은 이런 내용이었다.


근래에 온갖 일에 대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가 있다지만, 차마 정리곡(整理穀)처럼 백성을 위해 만들 일에 대해서도 이렇게 잡다한 말이 많고 간사한 폐단이 생겨날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중략)... 정리곡은 피곡(皮穀)이다. 봄에 한 알을 나눠주어 가을에 만 알이 익도록 하겠다는 지극하고 성대한 뜻은 미물도 감동시킬 만하다. 그런데 어떤 놈의 관리가 이처럼 공적인 일을 빙자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챙기는 짓을 하는가? 자애로운 은혜를 널리 펴기 위해 마련한 본뜻이 도리어 원망을 부르는 단서가 되었으니, 여기에 생각이 미치면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리곡은 1795년 화성 행차에서 남은 비용을 백성 구휼에 쓰게 한 것이라는데, 오래된 제도도 아니고 새로 만든 제도까지 왜곡되어 왕을 분노케 한다면 부패 풍조가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임진왜란 이후 국가체제가 해이해진 결과 영조와 정조의 수십 년 노력으로도 만연한 부패를 억누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19세기의 권력자는 부패를 억누르려 애쓰기는커녕 권력 유지와 확대에 오히려 부패를 이용하게 되었으니 총체적 난국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1623년 광해군 축출 이후의 권력자들이 권력 쟁탈전에 몰두해서 경세의 과제를 소홀히 한 정도의 문제였다면, 19세기 들어와서는 권력 경쟁의 명분마저 도외시하고 돈과 주먹의 현실권력에 매달리게 된 것이다. 국가와 백성을 위할 줄 모르는 정치를 넘어 국가를 망치고 백성을 괴롭히는 정치가 된 것이다.

16세기 말에 중국에 온 마테오 리치가 중국 사회의 평화로운 분위기와 문민 질서에 탄복한 이야기를 앞서 인용한 일이 있는데, 그 시기의 명나라와 조선에서는 같은 시기 유럽과 달리 주먹과 돈의 벌거벗은 폭력을 억제하는 유교국가 체제가 작동하고 있었다. 유교국가는 전제왕권이라는 이념의 힘이 재산, 권력, 정보를 장악한 유력계층의 현실의 힘을 견제해 힘없는 백성들을 무절제한 폭력에서 보호하는 기능을 가진다. 19세기 세도정치 하의 조선에서는 이러한 유교국가의 기본 기능이 마비상태에 이르렀다.

유교국가는 대규모 보험체계의 성격을 가진 조직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납입금이 많은 고객에게 더 큰 혜택을 제공하지만, 납입금이 거의 없는 고객에게도 최소한의 생존조건을 보장해 주는 보험체계다. 오늘날의 정치론으로는 사회주의에 가까운 것이다. 부와 권력의 성장에 한계를 두고 생존조건을 보장하는 체제이므로 부와 권력을 추구할 동기도 약하기 때문에 자원의 효율적 배분에 큰 장애를 일으키지 않는다. 농업사회에 매우 적합한 체제로서 중국과 한국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중세사회의 해체를 몰고 온 것은 무엇보다 생산력의 발전이었다. 잉여생산의 폭이 커짐에 따라 안정성 위주의 중세체제를 벗어나는 원심력이 일어난 것이다. 생산력 증가라는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것이 유교국가 체제로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을까? 그렇게 생각해야 할 이유를 나는 떠올릴 수 없다. 오히려 환경과의 관계와 사회 내부의 긴장 두 가지 측면 모두에서 유럽식 근대화보다 연착륙을 바라볼 수 있는 길이었을 것 같다. 문제는 연착륙에 필요한 충분한 길이의 활주로가 주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볼 일이 아닐지.

산업화와 자본주의화를 중심으로 하는 유럽식 근대화가 19세기의 세계를 이끌었다. 그러나 그 방향의 변화가 가진 문제점이 바로 지적되기 시작했고 대안이 제시되기 시작했다. 문제점은 지금까지 더욱더 명확해져 왔고, 대안 모색은 계속되고 있다. 19세기의 경쟁에서 패퇴한 노선도 그 가치를 다시 검토할 여지가 있는 상황이다.

19세기의 조선은 근대화의 과제 앞에서 유교국가 체제로 경쟁에 나설 자세가 무너져 있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경쟁에 나서기 전에 유교국가 체제를 회복할 시간을 벌기 위한 노력이었다고도 이해할 수 있다. 조선의 실패는 개항 후의 잘못된 선택으로 비로소 결정된 것이 아니라 유교국가 체제를 발전시키기는커녕 유지도 못하고 있던 세도정치에서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근대화에 성공한 나라들은 유럽식 근대화를 주축으로 하면서도 각자의 전통을 이와 병행하여 발전시켰다. 유럽식 근대화를 시작시킨 유럽국들까지도 그렇다. 이렇게 살아남은 전통이 근대화의 주변적 현상, 또는 심지어 근대화가 미진한 봉건적 잔재로 폄하되기도 했지만, 근대화의 모순을 완화해 주기도 했고 탈근대화의 열쇠로 주목받기도 한다. 근대화의 성공 여부를 양적 측면보다 전통을 살려낸 질적 측면에 더 비중을 두고 평가하는 편이 더 실질적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조선의 실패는 전통이 철저하게 좌절되었다는 점에서 참혹한 실패였다. 지역적 불평등 구조를 추구하던 당시의 제국주의적 근대화 추세 때문에 이 좌절이 더욱 심화되었다. 지금 시점에서 전통으로부터 찾아낼 가치가 무엇이 있는지 내게 확신은 없다. 그러나 19세기의 실패에서 전통의 좌절이 가졌던 의미가 분명한 것이므로 그 가치를 지금이라도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를 느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