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중세 말기의 유럽에서 경제와 문화가 가장 발달한 곳으로 이탈리아 도시들이 꼽힌다. 공화정과 자본주의를 비롯한 근대 유럽의 핵심 요소들의 기원을 이곳에서 찾는 연구가 많이 나와 있다. 그리고 유럽다운 유럽을 빚어낸 15-16세기 르네상스도 이 도시들을 무대로 펼쳐진 것이었다. ‘유럽문명의 기원으로서 그리스-로마 문명보다 근대유럽의 기원으로서 이 도시들의 역할이 더 구체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이 도시들의 구성원들이 과연 유럽인의 정체성을 갖고 있었을까? 그랬을 것 같지 않은 이야기가 많이 전해진다. 그 대표로 베네치아의 역사를 한 번 훑어본다.

 

421325일 정오 산자코모 교회의 봉헌을 베네치아의 기원으로 이야기한다. 3세기 이후 게르만 침략을 피해 방어가 쉬운 석호(潟湖)의 섬에 피난민들이 모여든 것으로 추정된다. 5세기에 비지고트 족과 훈 족의 침략으로 더 많은 사람이 모였고, 서로마제국의 멸망 후 553년부터 동로마제국의 관할을 받았다.

 

https://en.wikipedia.org/wiki/Venice#/media/File:Venice_as_seen_from_the_air_with_bridge_to_mainland.jpg

https://en.wikipedia.org/wiki/Venice#/media/File:Space_Station_Flight_Over_Venice.jpg (베네치아의 항공사진과 위성사진. 피난처로서 적합한 지형을 알아볼 수 있다.)

 

697년에 베네치아 공화정의 핵심인 도제(doge) 제도가 시작되었다고 전해지기도 하지만, 도시국가로서 독립성은 9세기 이후에 완성되었다. 8세기 중엽 인근의 라베나 총독령(Exarchate of Ravenna)이 롬바르드 왕국에 점령당하면서 동로마 영토로서 베네치아의 위치가 고립되었고, 베네치아를 넘보던 샤를마뉴가 814년에 동로마 황제와 협약을 맺었다. 베네치아는 동로마 영토로 인정받으면서 아드리아 해의 교역권을 부여받았다.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magne#/media/File:771_CE,_Europe.svg (샤를마뉴 시대 유럽의 국가-민족 분포. 지금의 터키를 비롯한 보라색으로 표시된 영역이 동로마제국에 속해 있었다.)

 

그 후 동로마제국의 쇠퇴에 따라 베네치아의 독립성이 강화되었고, 교역로 일대의 영토를 점령해서 해상제국을 이루기도 했다. 16세기 이후 대서양 항해의 발전에 따라 베네치아의 위상이 움츠러들다가 19세기 초 나폴레옹 침공을 계기로 오스트리아제국의 관할에 들어갔고, 1866년 통일된 이탈리아 왕국에 합류했다.

 

베네치아의 번영은 교역활동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지중해세계에서는 그리스시대 이전부터 교역도시들이 발달해 왔다. 교역도시 중에는 해로상의 요충지에 자리 잡고 항로와 항로를 연결하는 역할의 도시들이 있고, 해로의 끝에 자리 잡아 육상의 배후지와 바다를 연결하는 역할의 도시들이 있었다. 베네치아는 후자의 경우로 출발했다가 동로마제국의 옹호 아래 지중해 동부 해역과 흑해까지 활동 영역을 넓히면서 해상제국을 이루었다. 동로마제국의 베네치아 옹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1082년 알렉시오스 1세 황제의 황금칙령(chrysobull)’이다. 베네치아가 아드리아 해에서 노르만 세력을 막아주는 대신 교역의 권리와 관세 면제 혜택을 보장해주는 내용이었다.

 

장사꾼의 성공을 위해서는 누구에게도 충성심을 갖지 않아야 한다는 냉소적인 말이 있다. 베네치아에서는 확실히 적용된 원칙이다. 베네치아의 번영에는 이슬람권과의 교역이 큰 몫을 했고, 이를 억제하려는 황제와 교황의 뜻을 거침없이 거슬렀다. 베네치아 지도부는 교황에게 수없이 파문의 경고를 받고 실제로 두 차례 파문을 당하기도 했다. 11세기 말 시작된 십자군운동에서도 베네치아는 병력과 물자 수송대금을 착실히 징수할 뿐 아니라 정복 지역의 이권도 철저하게 챙겼다. ‘성전(聖戰)’의 명분을 위해 장삿속을 양보한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베네치아의 장삿속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제4차 십자군(1202-1204)의 혼란을 이용한 콘스탄티노플 약탈(1202)이었다. 애초에 십자군운동은 투르크계 이슬람세력의 침략으로부터 기독교세계를 함께 보호하자는 동로마제국의 호소로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제4차 십자군은 오히려 동로마제국을 파괴함으로써 이슬람세력의 진출을 더 쉽게 만들어주는 역설적인 행동을 취했고, 그 와중에서 베네치아는 인근 해역의 제해권을 포함한 막대한 이득을 취한 것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St_Mark's_Basilica#/media/File:Veneza38.jpg (콘스탄티노플에서 약탈해 온 마상(馬像)들이 산마르코 대성당 입구를 장식하며(지금은 복제품이다.) 당시 베네치아의 도덕적 감수성 수준을 증언해 주고 있다.)

 

수백 년간 종주국으로 모시며 많은 혜택을 얻던 동로마제국의 파괴에 앞장선 베네치아의 모습에 중국의 왕조에 복속하다가 왕조의 파괴에 앞장서던 오랑캐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어쩌면 동로마제국에 대한 베네치아의 태도를 이해하는 데도 바필드가 말하는 내경 전략을 적용할 수 있는 것일지 모른다. 서쪽 변방 유지를 위해 베네치아를 후원해 주며 포섭하고 있던 동로마제국 체제가 허약해졌을 때 베네치아가 배후의 오랑캐들을 규합해서 제국을 뒤집어엎은 것이다. 이때 무너진 동로마제국은 60년 후 일단 회복되기는 하지만 1453년 멸망에 이를 때까지 과거의 성세를 끝내 되찾지 못한다.

 

십자군운동(1096-1271)은 새로 태어나고 있던 유럽이 지중해세계와의 관계를 바꿔 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대항해시대 유럽의 모습을 파악하기 위해 보다 깊은 설명을 덧붙일 주제로 르네상스와 함께 남겨둔다.

 

 

6.

 

피렌느는 <중세의 도시>에서 베네치아의 흥기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베네치아가 유럽의 서쪽과 그토록 다른 세계와의 관계로부터 어떤 혜택을 얻었는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교역으로부터 번영을 얻었을 뿐 아니라 문명의 차원 높은 형태, 완성된 기술, 그리고 베네치아가 중세의 유럽과 차별된 위치에 서게 해준 정치와 행정의 조직방법을 동쪽에서 얻었다. 8세기까지 베네치아는 콘스탄티노플에 물자를 공급하는 사업에 전력을 기울여 갈수록 큰 성공을 거뒀다. 베네치아 배들은 인접 지역의 생산품을 콘스탄티노플로 실어 갔다. 이탈리아의 밀과 와인, 달마시아의 목재, 그리고 교황과 동로마 황제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아드리아 해 연안의 슬라브인으로부터 손쉽게 획득한 노예를 수송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배에는 비잔틴에서 생산된 값진 직물과 아시아에서 조달된 향료를 싣고 왔다. 10세기까지는 해상활동의 비중이 엄청나게 커졌고, 교역의 확장에 따라 이득에 대한 사랑을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절제심이라는 것을 아주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들의 종교는 장사꾼의 종교였다. 장사에 도움이 되기만 한다면 이슬람이 기독교의 적이라는 사실은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54쪽)

 

이 대목에서 유럽의 대표적 수출품으로 노예가 언급된다. 윌리엄 번스타인도 <A Splendid Exchange: How Trade Shaped the World 교역의 세계사>(2008)에서 13세기의 교역 상황을 검토하다가 유럽인들이 그토록 갈구하는 향료를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에서 구입하는 대가로 공급할 만한 다른 상품이 있었는가?” (111) 자문한 다음 노예가 그 상품이었다고 자답한다. 10세기에는 아드리아 해 연안에서, 13세기에는 흑해 연안에서 노예를 확보했는데 어느 쪽이나 슬라브인이 그 대상이었다. “slave" 등 노예를 뜻하는 유럽 어휘들이 ”Slav"에서 나온 것이다.

 

피렌느는 <마호메트와 샤를마뉴>에서 게르만인이 로마제국의 노예제도를 배웠고 라인 강 서쪽의 야만인으로부터 노예를 포획했을 것으로 추정했지만, (96) 나폴리와 베네벤토 사이의 836년 조약 중에 롬바르드 노예를 살 수는 있지만 되팔 수는 없게 한다는 조항으로 보아 게르만인 중에도 노예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181-2) 대상 종족에 제한이 지켜지지 않을 정도로 노예시장이 성행했던 것이다.

 

15세기까지 노예는 유럽의 중요한 수출 품목이었다.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교역도시들은 동방에서 향료와 직물 등 고급 상품을 수입하는 대신 목재, 곡물 등 원자재와 함께 노예를 수출했다. 문명 중심부에서는 다양한 인력의 수요가 있었고 노예 구입은 인력 확보의 한 방법이었다. 노예의 수급관계를 놓고 본다면 이탈리아 도시들은 지중해문명권의 외곽부, 유럽 내륙 지역은 배후지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8세기 중엽 중국의 제지술이 이슬람권에 전해진 후 수백 년이 지나서야 유럽에 전파된 사실을 놓고 그때까지 유럽에는 종이의 수요가 적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유럽에서 양피지가 널리 쓰인 것은 7세기 말부터의 일로 피렌느는 추정했다. (<마호메트와 샤를마뉴> 167-170) 그 전까지 로마시대 이래의 파피루스가 쓰이다가 양피지로 대치된 것은 이슬람세력이 지중해를 장악하면서 교역권에서 배제된 갈리아 지역에 파피루스 공급이 끊긴 때문이라고 그는 해석했다.

 

14세기 중엽 흑사병의 대유행에서 유럽 지역의 충격이 중국이나 이슬람권보다 더 강렬했을 이유를 두 가지 생각할 수 있다. 두 가지 다 낮은 문명 수준과 관련된 이유다. 하나는 유럽인의 유전자 풀이 문명 선진 지역보다 빈약해서 질병에 대한 면역력과 저항력이 낮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16세기에 아메리카인이 유라시아 질병에 취약했던 것과 비슷한 피해자의 입장에 14세기의 유럽인도 처해 있었던 것 아닐까? (지나친 상상 같기도 하지만, 마르코 폴로가 말한 “Cathay”가 중국이라는 사실을 수백 년간 모르고 있었던 사실을 생각하면 유럽의 고립성이 정말 심했던 것 같다. 14세기 말의 조선에서는 아프리카, 유럽과 대서양이 들어간 지도가 그려지고 있었는데!)

 

또 하나 이유는 개체가 아닌 사회체제의 저항력 문제다. 문명 선진 지역에서는 전염병 유행을 여러 차례 겪어 왔기 때문에 웬만한 비상사태에도 체제의 전면적 붕괴를 억제하는 제도적 장치가 나름대로 갖춰져 있었던 반면 안정된 문명 단계에 미처 진입하지 못하고 있던 유럽에서는 문명의 어귀에서 반()문명의 정글로 일거에 빠져들게 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지금의 코로나 사태에 이른바 선진국들이 오히려 더 큰 어려움을 겪는 데도 같은 이유가 다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두 이유 모두 확실한 근거 없는 추측일 뿐이다. 그러나 14세기 유럽의 문명 수준이 일반 통념에 비해 매우 낮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는, 그 시대의 여러 현상을 이 사실에 입각해서 다시 검토할 필요는 분명히 있다. 유럽 근대문명의 특성 중에 흑사병 대유행에 따른 체제의 파괴가 다른 문명권보다 혹심했다는 역사적 경험이 비쳐진 측면이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도 있다. 근대문명의 미래가 갈수록 불확실해지고 있는 시점에서 절실한 필요다.

 

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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